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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랑이 한반도’
작성일 : 2021-07-25 09:37조회 : 1,794
‘호랑이 한반도’
도쿄 올림픽 한국선수촌에 걸려있던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본 딴 현수막을 내리고 그 대신 ‘범 내려온다’는 구호와 한반도 호랑이 현수막을 내 걸었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표현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다. 최남선은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08년에 펴낸 잡지 <소년> 창간호에 호랑이를 한반도 지형으로 보이게 그려 놓고 해설을 붙였다. 고또라는 일본 지리학자가 한반도 지형을 토끼에 비유한 데 대한 반론이었다. 최남선은 기회만 있으면 ‘호랑이 한반도론’을 내세워서 민족혼을 일깨우려 했다.
1914년에 최남선은 잡지 <청춘>을 창간했다. <청춘> 창간호는 포효하는 호랑이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같은 젊은이 모습을 칼러판(版) 표지로 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표지를 그린 작가는 당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고희동(高羲東 1886~1965), 즉 나의 외조부였다. 외조부는 최남선으로부터 표지에는 호랑이가 있어야 하고 청년의 기상이 나타야 있어야 한다는 주문을 받고 표지를 제작했다.
최남선은 호랑이를 일본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생각했는데, 거기에 고희동은 포효하는 호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젊은이의 모습을 더해서, 한반도를 이끌어나갈 청년이 마치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나게 했다. 이 표지는 “최남선이 이념화시킨 호랑이 형태론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기호였고, 청년은 진취적인 한반도 조선을 거느리고 이끌어나갈 남성주체로 해석된다”고 서유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설명했다. (‘한국 근대의 잡지 표지 이미지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13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남성상(像)은 20세기 초 일본의 미술 교육에서 많이 다루던 주제였고, 당시에 나온 일본 잡지에도 반(半)누드의 남성상이 나온 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최남선과 고희동의 조국인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받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국가는 없지만 민족은 신화로 남으며, 현실은 지난하지만 미래의 역사는 알레고리로 남아 민족적 성취의 예감을 상상하는 것. 고희동/최남선 제작의 <청춘> 표지는 창안해 낸 민족주의적 신화를 청춘의 알레고리로 응축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적 현실을 상상의 신화적 역사로 대체시켜 버리려고 했”으며, “호랑이와 결합한 청년이라는 <청춘>이 제시한 잡지-독자 주체는 - - 민족의 계몽을 향해 지난한 현실을 초극할 이성적이고 신화적인 공동체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고 서유리 박사는 말한다.
<청춘> 창간호가 나온 이듬해인 1915년 고희동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서 조선인 최초 서양화가라는 뉴스를 만들어 내며 중앙, 중동, 보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고 서화협회를 운영하는 등 화단(畫壇) 활동을 이어 간다. 최남선은 그의 탁월한 문장력으로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그로 인해 2년 여 동안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감옥을 나온 최남선은 <동명>이란 잡지를 발간하는 등 언론문필 활동을 계속했으나, 그의 논지는 3.1 운동 전과는 다르게 갔다. 그러더니 1928년 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한일간 문화동원론(同源論), 일본 신도(神道) 보급 등 친일 행보를 보였고, 1936년~38년간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학병 지원을 앞장서서 독려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했고, 그로 인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청춘> 창간호 표지로 인연을 맺기 전에 고희동과 최남선이 서로 알았다면 그 기간은 1911년이 될 것이다. 외조부는 1911년 한 해 동안 학업을 쉬고 서울에 돌아와서 체류했다. (그 기간 중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이 기간 중일 것이다.
한국혼(魂)의 상징으로 도쿄올림픽 선수촌에 걸린 ‘호랑이 한반도’의 원조 저작자는 의심할 바 없이 최남선이다. 하지만 당대의 민족주의자이며 문필가이며 역사학자였던 최남선은 친일로 변절한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손꼽히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의 아이디어인 ‘호랑이 한반도’가 민족의 상징으로 도쿄 올림픽 선수촌에 휘날리고 있는 현실은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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