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쿄미술학교

작성일 : 2021-07-26 23:07조회 : 1,851

도쿄미술학교

1885년에 설립된 도쿄미술학교는 2차 대전 후 미 군정 시절 도쿄음악학교와 합쳐져서 도쿄예술대학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나의 외조부 고희동(高羲東)은 1915년에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년 후에는 김관호(金觀鎬)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게 된다. 고희동과 김관호의 은사는 유럽의 서양화를 일본에 도입해서 외광파(外光派)라는 화풍을 일본 화단(畫壇)에 조성한 쿠로다 세이키 교수다. 도쿄예술대학에는 일본에 서양화를 도입한 그를 기념하는 쿠로다 기념관이 있다. (나는 도쿄를 여러 번 갔지만 도쿄예술대학을 가보지 못해서 미술사 전문가들과 함께 방문할 계획을 세우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수년 내에 꼭 방문하려고 한다.)

도쿄미술학교는 졸업생에게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도록 해서 대학이 보관하고 있다. 졸업생의 자화상은 사이즈가 정해져 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정해진 사이즈 보다 큰 자화상은 고희동 자화상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러면 당시에 외조부한테만 그런 예외를 인정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게 된다. 머리에 쓴 정자관 때문에 규격 보다 큰 사이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 외에는 다른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여하튼 외조부는 졸업작품으로 정자관(程子冠)을 쓴 조선의 사대부 모습을 한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당시 그의 조국 조선은 망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본에 의해 합병되기 전에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고종과 순종, 그리고 이완용 윤덕영 등 매국 원훈(元勳)들은 유럽의 귀족이나 장군이 입는 군복 비슷한 정체불명의 유럽식 복장을 하고 이상한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젊은 나이에 구 한말 궁내부에서 프랑스어 통번역을 하던 관직을 물러나고 도쿄로 유학을 와서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된 외조부는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자화상을 그릴 때 조선 관료의 복장인 정자관을 쓴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김영나 전 중앙박물관장은 이 자화상은 고희동이 비록 나라는 망했더라도 자신은 조선의 관료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외조부에 이어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 이종우 등은 모두 양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식민지에서 그림 공부를 하러 도쿄에 온 나이든 학생이 졸업작품으로 민족의식이 충만한 ‘정자관을 쓴 자화상’을 그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높이 솟은 정자관 때문에 그림 규격을 맞출 수가 없어서 학교 측이 특별하게 보다 큰 사이즈로 그리도록 해 주었으니 당시 도쿄미술학교의 관심과 배려도 기억할 만하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우리나라에 두 차례 온 적이 있다. 1990년대에 서울에서 전시를 위해 온 적이 있고, 2020년 1월에는 현대화랑 기획전을 위해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

- 사진은 2020년 1월 현대화랑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오른 쪽은 김관호의 졸업작품인 자화상인데, 이 사이즈가 도쿄미술학교 표준이다.

이전글고희동 유화 ‘자화상’

다음글‘호랑이 한반도’

리스트로

이상돈닷컴

이상돈

LEESANGDON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