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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악관 안보보좌관
작성일 : 2021-09-06 16:37조회 : 76


백악관 안보보좌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완전한 실패로 귀결됨에 따라 대통령은 물론이고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혼돈에 빠지게 된 데는 안보보좌관의 실패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러면 대통령 안보보좌관으로 성공한 사람은 누구인가 ? 흔히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와 카터 행정부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떠 올릴 것이다. 하지만 하버드와 컬럼비아에서 교수로서 명성을 날렸던 이들은 대통령에 대해 보좌를 했다기보다는 자기 정치를 했다. 브레진스키가 보좌관을 지낸 카터 대통령 재임기간은 호메이니의 이란 귀국,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역대 안보보좌관을 연구한 데이비드 로스코프(David Rothkopf)는 가장 성공한 안보보좌관으로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 1924~2018)의 백악관에서 일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1925~2020)를 뽑는다. 부시가 대통령을 지낸 4년 동안 국제정세는 격동의 시간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졌고, 중국에선 천안문 사태가 발생해서 미-중 관계가 위기에 처했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서 중동에 긴장이 감돌았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2차 대전 중 웨스트포인트를 다녔으나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에 임관을 했다. 조종사 훈련을 받았는데, 그 즈음 육군 항공단이 공군으로 독립을 해서 공군 장교로 변신했다. 그는 머스탱 기(機)를 몰았으나 어느 날 기체 고장으로 추락해서 부상을 입고 조종사의 길을 포기해야 만 했다. 그는 전략 분야를 하기로 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공군본부, 합동참모본부, 국방부 등에서 일했다. 해군전쟁학교(Naval War College)를 이수하고 컬럼비아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공사 교수를 지냈다.

1972년 초, 스코크로프트는 닉슨 대통령에 의해서 군사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백악관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안보보좌관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였고, 부(副)보좌관은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Haig 1924~2010)였다. 당시 유엔 주재 대사이던 부시는 스코크로프트와 자주 연락을 했다. 1973년 1월, 헤이그가 비서실장이 됨에 따라 스코크로프트는 안보 부(副)보좌관이 되었다. (이 때  공군 중장으로 전역을 했다.) 헤이그는 나토군 사령관을 역임한 후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국무장관을 지내게 된다.

한편, 베트남에서 헬기 추락사고로 부상을 당하고 본국에 들어온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 )은 조지워싱턴 대학 경영대학원을 다닌 후 1972~73년간 백악관 예산실에서 펠로우로 일했다. 당시 예산실장은 캐스파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 1917~2006)였는데, 와인버거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내게 된다. 이처럼 1972~73년 백악관은 1980년대 공화당 정권의 주인공들을 배출한 산실(産室)이었다.

1974년 8월, 닉슨이 사임하자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됐다. 1975년 11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겸직 중이던 안보보좌관직을 내려놓자 스코크로프트는 안보보좌관이 됐다. 1976년 1월, 조지 H. W. 부시가 CIA 국장이 되자 부시와 스코크로프트는 더욱 가까워졌다. 포드 대통령이 연임에 실패하자 부시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게 됐고, 스코크로프트는 헨리 키신저가 세운 컨설팅 회사에 가담했다.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도 스코크로프트는 안보 관련위원회에 참여했다.

1988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이 된 부시는 안보보좌관으로 스코크로프트를 불러들였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장 빛났던 4년을 만들어 냈다. 키신저나 브레진스키와 달리 스코크로프트는 언론 앞에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관련 부처의 의견을 대통령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조율해서 대통령이 가장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91년 걸프 전쟁을 전반적으로 기획한 책임자는 스코크로프트였다. 컬럼비아 대학과 해군전쟁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랜 기간 안보와 국방을 다루어본 그는 그런 일을 하는데 최적임자였다. 그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수도를 점거하게 되면 이라크를 통치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밝혔다.

부시가 재선에 실패함에 따라 스코크로프트도 정부에서 나와서 강연과 저술, 그리고 컨설팅을 했다. 2002년, 스코크로프트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라크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기고문을 써서 주목을 샀다. 대통령의 아버지의 친구가 대통령에게 훈계를 한 셈인데, 조지 W. 부시가 그 훈계를 들었다면 미국과 세계가 오늘날처럼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시와 스코크로프트는 말년에 자주 어울렸다. 부시는 2018년 11월에 사망했고, 스코크로프트는 2020년 8월에 사망했다. 스코크로프트는 불가능해 보였던 냉전 종식의  연착륙을 이루어 냈고, 국제사회에서 침략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걸프 전쟁을 통해 보여준, 최고의 대외정책 브레인이었다. 우리가 부시 같은 대통령, 스코크로프트 같은 안보보좌관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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