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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명예훼손소 난무하는 정치판 (동아일보 2007년 6월 25일)
작성일 : 2008-02-20 22:19조회 : 1,196


명예훼손訴 난무하는 정치판

(동아일보 2007년 6월 25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과거를 둘러싼 검증공방이 청와대의 고소와 이씨 측의 맞고소 사태로 발전했다. 박근혜 전 대표 측도 청와대와의 정보공유설이 명예훼손이라면서 이 씨 측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나섰다. 또한 박 씨 측은 최 아무개와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발언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과 청와대가 명예훼손 고소로 난타전을 벌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예훼손이 단순한 민사상 불법행위가 아니라 형법상 범죄이기도 하다. 형법은 사실을 적시해서 명예를 훼손하면 2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 벌금,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명예를 훼손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며, 비방할 목적으로 출판물으로 이런 행위를 하면 이 보다 더 중한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명예훼손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고 민사상 불법행위일 뿐이다.
명예훼손죄는 그 기원을 로마제국에 두고 있다. 15세기 말에서 17세기까지 존재했던 영국의 성좌(星座)법원은 왕권에 대한 비판을 명예훼손죄로 엄하게 처벌했다. 영국법에서 발전한 명예훼손죄는 식민지 시기에 미국에 도입됐는데, 명예훼손혐의로 형사재판을 함으로써 툭하면 명예를 걸고 결투를 벌이던 당시의 사회상을 다소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건국 초 미국 의회는 치안법을 제정해서 정부비방(誹謗)을 범죄로 규정했지만, 법원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비방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1964년 미국 대법원은 ‘뉴욕타임스 대(對) 설리번’ 사건에서 정부비방죄는 자체로서 위헌이며, 공무원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보도가 있더라도 그것이 고의나 중대한 과실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른 판결에서 미국 대법원은 진실확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경우가 아닌 한, 언론 보도를 명예훼손으로 형사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이 판결 후 많은 주(州)에서 명예훼손죄가 폐지됐으며, 그렇지 않은 주에서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고 말았다. 대법원은 정부는 부당하게 비판받더라도 오히려 강화된다면서, 정부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자체가 모순이라고 했다.
유럽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영국과 북유럽 국가에서 명예훼손죄는 법전 속에서 잠자는 조항으로 전락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법원은 이를 극히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1986년 유럽인권법원은 정치인은 자기 자신을 언론과 대중의 검증대에 던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혹한 비판을 수용(受容)해야 하며, 언론인에 대해 명예훼손죄를 적용하면 언론의 비판기능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판시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정치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는 나라는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뿐이다. 명예훼손죄는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집권세력이 언론과 야당 정치인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제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 점에서 대단히 걱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에 자신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보도한 몇몇 신문사와 야당의원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언론보도에 대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적절하게 반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대통령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납득하기 어렵다.   
정치인이 상대방 정치인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여권의 한 의원은 한 야당 의원을 상대로 세 건의 명예훼손 고소를 했다니 웃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은 자기의 정적(政敵)을 얼마든지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검찰의 힘을 빌리는 것은 졸렬한 소치다. 자신의 명예에 대한 손상이 극심해서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다면 상대방에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을 고소하고, 청와대와 야당 대선 주자들이 고소와 맞고소로 맞서는 이런 난장판을 ‘소돔과 고모라의 정치판’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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