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워터게이트 제보자, 마크 펠트
작성일 : 2021-09-18 08:52조회 : 51


워터게이트 제보자, 마크 펠트


2005년 7월, <Vanity Fair>지에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원이었던 ‘깊은 목구멍’(Deep Throat)이 당시 FBI 부국장이던 마크 펠트(Mark Felt 1913~2008)임을 밝히는 기사가 났다. 이로서 30년 동안 숨겨져 있던 ‘Deep Throat’의 정체가 확인됐다.

마크 펠트는 조지워싱턴 로스쿨을 나온 후 FBI에서 수사관(G-Man)으로 일해 왔다. 그는 1960년대 미국 내 신(新)좌파 급진세력을 감시하고 수사하는 일도 맡았다. 오랫동안 FBI 국장을 해오던 에드가 후버가 사망하자 1972년 5월 3일, 닉슨 대통령은 법무부 차관보급이던 패트릭 그레이를 FBI 국장 서리로 임명했고, 마크 펠트를 FBI 부국장으로 임명했다. 펠트는 FBI 직원으로서는 최고 직위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후인 1972년 6월 17일 밤,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선거본부에 도둑이 들었다. 경비원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된 도둑은 금품을 훔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전직 CIA 요원과 FBI 정보원이었다. 이것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워터게이트 도둑의 배후를 수사하려던 FBI 수사관들은 여러 가지 방해에 봉착했다. CIA가 안보문제가 있다면서 간여했고, 패트릭 그레이 국장은 백악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1972년 11월, 닉슨 대통령은 무난하게 재선에 성공했다.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부터 워싱턴 포스트의 젊은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은 이 사건에 대한 단독보도를 이어갔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그들의 비밀 취재원을 ‘Deep Throat’로 지칭해서 그가 누구인가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정부 기관의 미행을 당하는 신세가 됐고, 두 사람이 어떻게 미행을 따돌리고 ‘Deep Throat'를 만나고 있는지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닉슨은 FBI 국장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보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으며, 백악관 비서실장 밥 할데만은 증거는 없지만 마크 펠트가 의심스럽다고 닉슨에게 보고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특종 보도를 다른 매체들이 따라가서 보도함에 따라 의회는 청문회를 열었고, 1973년 5월 아치볼드 콕스가 특별검사로 임명됐고, 그해 10월 닉슨이 콕스를 해임하자 탄핵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말았으며, 이듬해 여름 닉슨은 하원 본회의 표결 직전에 사임했다.  두 젊은 기자와 그들의 취재원인 ’Deep Throat'가 현직 대통령 사임이란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닉슨이 임명한 FBI 국장 패트릭 그레이는 1년도 못 채우고 1973년 3월 사임했다. 백악관 비서실장 밥 할데먼 등 닉슨의 측근들로부터 워터게이트 수사에서 손을 떼라는 압력을 받은 그가 상원 인사 청문회에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크 펠트는 자기가 그 후임으로 FBI 국장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펠트가 워싱턴 포스트에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의심을 했다. 닉슨 대통령은 환경보호처장이던 윌리엄 러클샤우스를 FBI 국장 서리로 임명했고, 6월 22일 마크 펠트는 FBI에서 퇴직했다. 펠트가 사임한 시점에 상원은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열고 있는 등 워터게이트 문제가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마크 펠트는 아내 오드리와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두었다. 아들은 나중에 공군 장교가 됐다. 딸 조언(Joan Felt)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칠레 유학 중 아엔데가 주도한 공산주의 체제에 심취해서 미국에 돌아 온 후 웨더 언더그라운드 등 급진 좌파와 어울렸고 부모와는 결별해 버렸다. FBI 고위 간부의 딸이 FBI가 수사하는 신좌파 지하단체와 연루되어 있었으니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더구나 마크 펠트는 블랙 팬더 등 미국 내 급진 폭력단체를 수사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조언은 남자들과 동거해서 아이를 셋이나 두었고, 마리화나와 술에 젖어서 살았다. 딸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 펠트의 부인 오드리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다.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과거 CIA와 FBI가 저지른 불법행위를 의회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법무부는 1970년대 초에 웨더 언더그라운드 등 과격 단체를 불법적으로 도청하고 감시했다는 등의 이유로 당시 FBI 국장서리이던 패트릭 그레이, 부국장이던 마크 펠트, 그리고 3인자였던 에드워드 밀러를 기소했다. 그레이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됐으나 펠트와 밀러는 오랜 재판 끝에 각각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항소를 했으나 2심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이 사면을 해서 이 사건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펠트의 재판에는 닉슨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와서 불법적인 행위가 없었다고 증언을 해서 눈길을 끌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일했던 법무부에 의해 기소되어 고생을 한 펠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부인 오드리는 딸 문제로 얻은 우울증이 더욱 심해졌다. 1984년 7월, 남편이 외출 중에 그녀는 남편의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펠트는 아들과 함께 장례식을 치르고 캘리포니아 산타 로사에서 세 아들과 어렵게 살고 있는 딸 조언에게 어머니가 암으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1987년, 조언이 암에 걸리자 펠트는 딸과 외손자들과 함께 살기 위해 버지니아의 집을 팔고 산타 로사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 조언은 암을 이겨냈고, 스페인어를 가르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조언은 아버지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의 ‘Deep Throat'임은 전혀 알지 못했다.

1999년 8월, 조언은 낮선 방문객과 마주치게 됐다.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신사가 아버지가 집에 있냐고 물어 본 것이다. 펠트는 우드워드를 반갑게 맞아서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드워드는 존 메케인 선거 운동 취재차 부근에 왔다가 예고 없이 펠트를 만나 본 것이다.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세계적 명사가 됐지만 특종을 가능하게 해 준 마크 펠트는 오랜 재판으로 피폐해 졌고, 부인마저 자살을 한 불우한 80대 노인이 되어 역시 의지할 데가 없는 딸과 외손자들과 함께 사는 처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이던 시절을 히피로 살았던 조언은 우드워드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하지만 점차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됐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아버지와 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조언은 이따금 아버지에 대해 물어 보는 기자들의 전화를 받곤 했다. 2002년 어느 날, 이들은 조언의 아들 릭의 여자 친구 가족과 모임을 갖게 되었고, 거기서 릭의 여자 친구의 아버지인 존 오코너라는 변호사를 알게 됐다. 그 즈음 ‘Deep Throat’가 마크 펠트 일 것이라는 추측 기사가 나와서 이제는 진실을 말할 단계가 됐다고 느낀 펠트는 조언, 그리고 공군에서 제대한 후 민간항공사 조종사로 일하는 아들에게 자기가 ‘Deep Throat’임을 고백했다. 

펠트는 자기가 미국을 생각한 애국자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조직을 배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30년을 살아왔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애국자라고 확신을 주었다. 조언은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명성도 얻고 부(富)도 얻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면서, 아이들을 키우느냐고 빚도 많으며 아이들이 대학도 가야 한다면서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러자 마크 펠트는 “그것은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면서 동의를 했다.

이렇게 해서 존 오코너 변호사가 <Vanity Fair> 2005년 7월호에 기사를 써서 당시 FBI 2인자인 마크 펠트가 ‘Deep Throat'였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그것을 확인했다. 워싱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켜 온 비밀이 베일을 벗은 것이다. 그는 커밍아웃하고 나고 4년 반이 지난 2008년 12월에 95세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오코너와 함께 회고록을 펴냈으며 영화저작권을 100만 달러에 팔아서 손자들이 학비를 조달토록 했다. 2017년에 영화 <Mark Felt>가 개봉됐는데, 리암 니슨이 펠트 역할을 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