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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닉슨 대법원’
작성일 : 2022-06-21 14:59조회 : 957
‘닉슨 대법원’
미국 대법원은 대법원장의 이름을 따서 그 대법원장이 이끌었던 시기를 부른다. 얼 워렌이 대법원장을 지낸 시기를 ‘워렌 대법원“(The Warren Court)라고 부르는 식이다. 1969년 6월, 닉슨 대통령은 은퇴를 선언한 얼 워렌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워렌 버거(Warren E. Burger 1907~1995) 컬럼비아 지구(DC) 연방항소법원장을 지명했다. 그는 보수 성향이었지만 법관으로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서 상원은 인준 절차를 신속하게 매듭지었고 6월 23일 취임선서를 했다. 워렌 버거는 미네소타 출신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민사담당 법무차관보를 지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워싱턴 지구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으며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부터 닉슨과 아는 사이였다.
문제는 사임한 에이브 포터스가 남긴 빈자리를 채울 후임 대법관이었다. 닉슨은 남부 출신으로 헌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보수 법률가를 임명하고 싶어 했다. 렝퀴스트 차관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인 클레멘츠 헤인스워스(Clement Haynsworth 1912~1989) 제4 연방항소법원장과 버지니아 출신으로 미국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루이스 파월(Lewis Powell 1907~1998)을 선정했으나 루이스 파월이 고사를 해서 헤인스워스를 단수로 천거했다. 닉슨은 헤인스워스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으나 인종차별적 성향으로 인해 논란이 일더니 11월에 상원은 55대 45로 인준을 부결시켰다.
당황한 백악관과 법무부는 플로리다 출신으로 제5 연방항소법원 판사인 해롤드 카스웰(G. Harrold Carswell 1919~1992)을 후보로 지명했다. 카스웰도 인종차별적이고 반여성적이고 반유태인적 성향임이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나서 논란 끝에 1970년 4월 상원은 45대 51로 인준안을 부결했다. 특히 공화당 의원 13명이 반대 투표를 해서 닉슨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대법관 후보가 연거푸 상원에서 부결된 것은 민주당 의원들이 정파적으로 반대한 탓도 있겠지만 남부 출신으로 대법관 후보를 찾다보니 후보자의 성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렝퀴스트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낭패를 경험한 닉슨은 남부 출신을 포기하고 워렌 버거 대법원장이 추천한 해리 블랙먼(Harry Blackmun 1908~1999) 제4 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1970년 6월, 상원은 미네소타 출신으로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블랙먼을 94대 0으로 통과시켰다. 블랙먼은 버거 대법원장과 마찬가지로 미네소타 출신이고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남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부 출신 대법관을 임명하고자 했던 닉슨의 시도는 실패했다. 바로 그 즈음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제럴드 포드는 대법관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윌리엄 더글러스(William O. Douglas 1898~1980)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하는 등 대법원을 둘러싼 논란이 크게 일었다.
1971년 9월, 휴고 블랙(Hugo Black 1886~1971.9.25) 대법관과 존 할란(John Marshall Harlan 1899~1971.12.29) 대법관이 건강상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 휴고 블랙은 30년 넘도록 진보적 판결을 주도해 온 대법관이었고, 존 할란은 법률 논리가 탁월한 보수 대법관이었다. 이렇게 해서 닉슨 대통령은 대법관 2명을 또 임명할 수 있게 됐다. 닉슨은 당시 큰 논쟁이던 스쿨버스를 통한 흑백학생 강제 통합에 반대하고 법과 질서를 강조할 법률가가 대법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변호사협회(ABA)의 의견을 참조해야 함을 알게 됐다.
법무부와 백악관은 여러 채널로부터의 추천을 받아서 검토한 후 아칸소 출신 변호사 허셀 프라이데이(Herschel Friday 1922~1994)와 캘리포니아 항소법원 판사를 10년째 지내고 있던 밀드레드 릴리(Mildred Lillie 1915~2002)를 블랙과 할란의 후임으로 추천하면서 미국변호사협회(ABA)에 대해 자격 여부를 문의했다. ABA는 두 사람 모두 대법관 자격이 안 된다고 백악관에 통보했다. 이에 닉슨은 두 사람을 지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닉슨이 UC 버클리 로스쿨을 나온 여성인 밀드레드 릴리 판사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과연 닉슨이 정말로 여자 대법관을 임명하려고 했나 하는 의문이 있다. 여기에는 닉슨의 부인 패트 여사가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닉슨은 자기가 어떤 최초 기록을 남기는데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ABA가 릴리 판사를 대법관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남성 우위적 편견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문제도 있다. 사실 밀드레드 릴리의 학력과 경력은 10년 후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최초의 여성 대법관 산드라 오코너(Sandra Day O'Connor 1930~)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워렌 버거 대법원장이 여성이 대법관이 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그런 대법원장의 의중이 ABA에 반영됐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대법원에는 여자 대법관용 화장실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허셀 프라이데이와 밀드레드 릴리가 ABA에 의해 부적격으로 판정이 나고, 물망에 올랐던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과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도 대법관에 생각이 없다고 해서 닉슨은 적절한 대법관 후보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무부와 백악관은 에이브 포터스의 후임으로 거론됐던 루이스 파월 변호사에게 대법관을 맡아 달라고 강력하게 권유해서 승낙을 받아냈다. 백악관 참모들은 또 다른 대법관 후보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법률비서관인 존 딘(John Dean 1938~ )이 렝퀴스트를 지명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내서 닉슨은 렝퀴스트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다. 파월은 무난하게 상원을 통과했으나 렝퀴스트는 그의 보수적 견해 때문에 논란이 일어서 12월 10일에야 68대 26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72년 1월 7일 취임선서를 했다.
이로서 불과 2년 남짓 기간 동안 닉슨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3명을 임명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그 시절 대법원을 언론은 ‘닉슨 대법원’(The Nixon Court)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대법원은 결코 보수적이지만은 않았다. 닉슨에 의해 임명된 버거 대법원장은 스쿨버스를 통한 강제 흑백학생 통합을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해리 블랙먼 대법관은 낙태는 여성의 사생활권이라는 Roe v. Wade 판결을 썼다. 또 바로 그 대법원은 뉴욕타임스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국방부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를 보도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고,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 녹음 테이프 제출을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결해서 닉슨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니까 ‘닉슨 대법원’은 결코 보수적이지도 않았고 닉슨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40대 후반 나이에 대법관이 된 윌리엄 렝퀴스트는 1980년대 들어서 점점 영향력을 키우더니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이 되었고,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추가로 임명되자 대법원은 보수 성향을 진하게 띄게 되었다. 대법관 후보자를 선정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할 책임을 지고 있던 법무차관보 렝퀴스트는 적절한 대법관 후보자를 찾아내지 못한 탓에 그 자신이 대법관이 되었으니 나중에 자기가 대법원장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렝퀴스트를 대법관으로 지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존 딘은 워터게이트에 연루되어서 유죄판결을 받고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렝퀴스트야말로 우주의 기(氣)을 받고 태어난 행운아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 사진: 루이스 파월과 렝퀴스트 대법관 임명을 다룬 1971년 11월 1일자 타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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