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로버트 보크

작성일 : 2022-07-04 15:32조회 : 1,015

로버트 보크

1981년 7월, 레이건 대통령은 은퇴하는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의 후임으로 애리조나 항소법원 판사이던 샌드라 오코너(Sandra Day O'Connor 1930~ ) 를 임명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된 오코너는 윌리엄 렝퀴스트(William Rehnquist 1924~2005) 대법관과 스탠포드 로스쿨을 같이 다녔다. 오코너 대법관은 2006년 초에 은퇴할 때까지 전임 스튜어트 대법관과 비슷한 중간 성향이었으나 일관성 있는 철학이 없이 우왕좌왕 하는 식으로 판결을 했다.

1986년 9월, 워렌 버거 대법원장이 은퇴를 선언하자 레이건 대통령은 렝퀴스트 대법관을 후임 대법원장으로 지명하고 안토닌 스칼리아를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렝퀴스트는 대법관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음에도 동료와의 인간관계가 원만해서 대법관들은 렝퀴스트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데 대해 만족을 표했다. 상원 법사위 청문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등 몇몇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렝퀴스트에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으나 상원 본회의는 65대 33 표결로 인준을 동의했다.

렝퀴스트의 후임으로 스칼리아가 지명된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레이건의 측근이며 당시 법무장관이던 에드윈 미즈(Edwin Meese III 1931~)는 연방항소법원 판사인 로버트 보크(Robert Bork 1927~2012)나 안토닌 스칼리아 (Antonin Scalia 1936~2016)가 대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즈 장관은 보크는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콕스를 파면했던 일과 그간의 발언과 글로 인해 공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많을뿐더러 보크가 스칼리아 보다 나이가 거의 열 살이 많기 때문에 보다 젊은 스칼리아를 임명해야 인준도 쉽고 또 레이건의 철학을 오랫동안 대법원에 남길 수 있다고 보아서 스칼리아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스칼리아가 대법관 후보로 지명됐다. 스칼리아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알지 못한 민주당 의원들은 인준 청문을 한가하게 진행했고 상원은 98 대 0으로 통과시켰다. 스칼리아는 이탈리아계로서 최초로 대법관으로 지명됐기에 민주당 의원들은 비판하기를 꺼렸다. 안토닌 스칼리아가 대법원에 입성함에 따라 대법원은 한층 더 보수적 색깔을 띠게 됐다.

1987년 7월 1일, 레이건 대통령은 은퇴하는 루이스 파월(Lewis Powell Jr. 1907~1998) 대법관 후임으로 로버트 보크를 지명했다. 보크는 대법원에 빈자리가 날 때마다 후보자로 거명됐는데, 그럴 때마다 민주당은 보크는 대법관으로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공언을 해 왔다. 그럼에도 레이건이 보크를 지명한데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 대학 총장을 지내고 포드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에드워드 리바이(Edward Levi 1911~2000)가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레이건이 보크를 대법관으로 지명하자마자 상원 법사위 위원인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성명서를 내고. “보크의 미국에선 낙태를 숨어서 몰래 해야 하고 흑인들은 분리된 시설에서 살아야 하고 경찰은 한밤중에 멋대로 주택을 수색하게 된다”는 등 보크를 비난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냈다. 보크는 이 모든 주장이 허위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보크는 사생활권, 낙태 등 워낙 많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해 왔기 때문에 상원 법사위 청문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발전했다. 프라이버시권과 낙태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보크의 개인적 취향과 가족 문제까지 법사위에서 거론됐다. 흑인 민권단체는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했고, 보크에 반대하는 모임이 TV 광고를 사서 인신공격을 했다. 이 정도로 반대가 거세어 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백악관은 당황했다.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까지 법사위에 참석해서 보크를 응원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상원 법사위는 9 대 5로 보크를 지지하지 않기로 의결했고 10월 23일 상원 본회의는 58 대 42로 인준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198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상원에서 8석을 상실해서 상원의석은 민주당 55석, 공화당 47석이었는데, 공화당 의원 6명이 인준에 반대했고 민주당 의원 2명이 찬성했다.

로버트 보크에 대한 상원의 인준 거부는 큰 충격이었다. '보크 사건'은 미국 정치가 문명성(civility)을 상실하고 이념과 진영 대립이 격화해 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보크를 임명하는데 실패한 레이건 대통령은 온건 보수 성향인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1936~ ) 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했고 상원은 곧 동의했다. 케네디 대법관은 2018년 7월에 은퇴했다.

상심한 보크는 이듬해 항소법원 판사직을 사퇴하고 그 후 대학 강의와 저술로 시간을 보냈다. 청문회에서 일생일대의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보크는 기회만 있으면 진보주의와 민주당을 비난했다. 1996년에는 진보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를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모라에 비유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보크는 2012년 12월, 75세로 사망했다. 보수 평론가들은 보크가 진보 세력의 비열한 책략에 의해 희생됐다고 기회만 있으면 강조했다. 보수 평론가들은 자기 여비서를 한 밤중에 개울에 빠져 죽게 한 에드워드 케네디가 보크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민주당이 위선과 가식에 병들어 있는 집단임을 증명한다고 비난하는 등, ‘보크 사건’은 보수 진영을 결집시켜서 반격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사진 (1) 청문회에서 답변하는 로버트 보크 (2) 보크의 적(敵)인 조 바이든 의원과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3) 보크를 지원하러 청문회에 참석한 포드 전 대통령, 오른 쪽은 밥 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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