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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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971년 5월
작성일 : 2022-08-01 13:40조회 : 42


1971년 5월


1971년 봄, 나는 서울법대 2학년이었다. 당시 서울대는 1학년은 공릉동에 있는 교양학부에서 공부를 하도록 했다. 머나먼(서울 4대문 안을 기준으로) 공릉동에서 국어 영어 독어 등 고등학교 시절에 지겹게 공부한 과목을 다시 공부했으니 학교가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대충 수업을 끝내고 좌석버스를 타면 종점이 명동 입구여서, 번화한 명동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1971년에 드디어 2학년이 되어서 동숭동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게 됐으니 비로소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1971년 봄 학기는 처음부터 교련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고, 4월에는 대선이 있었고 5월에는 총선이 있었다. 4월 대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40대 후보로 나서서 열기가 뜨거웠고, 서울에선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5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 대표 유진산이 자기 지역구 영등포를 버리고 비례대표 전국구로 옮긴 ‘진산 파동’이 일었다. 영등포에는 공화당에서 장덕진(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이 출마해서 서울에서 유일한 공화당 당선자가 됐다. 총선 투표일을 앞두고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신민당 대표가 호헌선(護憲線)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대구에서도 이효상 국회의장 등 공화당 중진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야당이 약진했다. 공화당은 개헌을 할 수 없게 됐고, 결국 1972년 가을에 ‘10월 유신’이 일어났다. 

1971년 봄, 워싱턴 DC에선 ‘메이데이 시위’가 있었다. 당시 우리는 대선과 총선으로 뜨거웠기 때문에 미국의 수도에서 있었던 시위는 언론에 외신 기사로 간략하게 나왔을 뿐인데, 나는 대학 입학 후 <TIME>지(誌)를 열독했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반전(反戰) 시위 등에 대해 보다 상세히 알았다. 
그 해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는 약 1주일 동안 신좌파 단체가 주도한 시위대 수 만 명이 워싱턴 DC에 모여서 반전 캠프를 열고, 이어서 다리와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미국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던 것이 ‘1971년 메이데이 시위(또는 소요사태)’이다. FBI와 워싱턴 경찰은 이런 정보를 사전에 파악했고 이를 보고 받은 닉슨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해서 연방정부 건물을 지키고 시위대는 전원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자기는 가족과 비서를 대동하고 캘리포니아 별장으로 떠났다. 

미 육군 정예 부대인 82공수사단(노르망디 작전에서 독일군 후방으로 낙하했던 공수부대)과 해병대 병력이 워싱턴 한복판에 진입했고, 워싱턴 경찰 5000명이 총동원돼서 집회 참가자 1만 3,000명을 체포해서 워싱턴 스타디엄과 콜로시엄에 구금했다. 기록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다 보니 화장실 문제가 심각했고, 경찰은 이들을 먹이기 위해 맥도널드 햄버거를 수 만개 주문해야 했다. 고생을 견디다 못한 대부분 사람들은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을 내고 귀가했으나 끈질기게 법정 투쟁을 한 사람들은 구금이 불법이란 판결을 얻어 냈다.

‘메이데이 시위’는 미국에서 있었던 마지막 대규모 반전 시위였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닉슨의 승리였다. 워싱턴 DC 경찰은 단 한명의 사망자도 없이 시위를 완전히 진압하고 해산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해서 훈장을 수여받은 존 케리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진술을 해서 유명해진 것이 가장 큰 이벤트였다.

1970년 5월에 뉴욕 맨해튼에서 반전 시위대가 건설노동자들에게 집단적으로 구타를 당한  'Hard hat riot' 사건과 1971년 ‘메이데이 시위’는 그 후 역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건은 진보와 민주당, 그리고 보수와 공화당에 모두 불편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신좌파 세력에 편승해서 1972년 대선을 치렀으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은 닉슨 대통령에게 역대급 기록으로 참패를 당했다. 워터게이트 덕분에 1976년 대선에선  민주당이 승리했으나 카터가 외교 경제에 모두 실패해서 1981년부터 레이건과 부시로 이어지는 12년 동안의 공화당 전성기가 열렸다. 1993년에 집권한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은 1970년대 맥거번류(類)의 좌파와는 결별을 한지 오래였다.

공화당의 입장에서도 메이데이 소요사태를 진압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니 닉슨을 상기시키는 메이데이 시위를 구태여 역사에서 끄집어 낼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 정치 담론은 골드워터를 시작으로 레이건을 다루고 닉슨은 의도적으로 빼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워터게이트 때문이라고 하겠다.

아래 사진은 메이데이 50주년을 맞아서 로렌스 로버츠가 펴낸 책이다. 저자는 19살 대학생으로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구금되는 경험을 했다. 저자는 워싱턴포스트, 블룸버그 뉴스 등 매체에 기고를 해 온 프리랜서 기자였는데, 19살 대학생으로 참가했던 역사의 현장인 메이데이 시위를 책으로 내고 싶었고, 7순 나이에 드디어 이 책을 냈다. (그는 나와 동년배이다.) 메이데이 시위의 배경부터 관련된 인물들의 그 후의 생애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시위 진압의 일등공신인 워싱턴 DC 경찰청장 제리 윌슨은 타임지 커버에도 등장해서 에드가 후버의 후임으로 FBI 국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닉슨은 다른 사람을 국장으로 임명했다.

시위대를 구금한 조치가 불법이라고 판결한 워싱턴 DC 지역법원장 해롤드 그린(Harold Greene 1923~2000)이 1982년에 AT&T와 연방통신위원회(FCC) 간의 독과점 소송을 합의명령(consent decree)으로 해결한 바로 그 ‘그린 판사’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워싱턴 DC 지역법원에서 통상적인 사건을 다루던 그린 판사는 1978년에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됐는데, 그가 맡은 첫 사건이 바로 AT&T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내가 유학 중에 다루어져서 기억에 생생하다. 일개의 지방법원 판사가 미국 통신업계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서 ‘그린 판사’(Judge Greene)는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남는 인물인데, 그가 메이데이 사건을 맡았다는 사실은 이 책을 보고 알게 됐다.

- 1970년 5월 초, 뉴욕 맨해튼에서 일어난 Hard Hat Riot (또는 Hard Hat Rebellion)에 대해선 서울신문 4월 11일자 아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411027007

- 1971년 4월 말~5월 초 워싱턴 DC에서 있었던 메이데이 집회의 배경과 상세한 과정은 서울신문 7월 4일자 아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704027002

사진 (1) 경찰이 단 하루에 7000명을 체포했음을 다룬 신문 1면. 사진 (2) 로렌스 로버츠의 책(페이퍼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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