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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루스벨트의 사실상 비서실장
작성일 : 2022-08-26 07:48조회 : 868
루스벨트의 사실상 비서실장
대통령을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비서실장이다. 제도적으로 비서실장이란 직책은 닉슨 대통령에 의해 처음 생겼다. 그 전에는 비서실장 같은 역할을 했던 가까운 비서가 있었을 뿐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에는 해리 홉킨스가 사실상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에 앞서 루스벨트에게는 또 다른 사실상의 비서실장이 있었는데, 바로 여비서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4.12) 대통령을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백악관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하루 24시간 그의 옆에서 모든 것을 챙겨준 사실상의 비서실장은 마그리트 (미씨) 르핸드(Marguerite (Missy) LeHand 1896~1944. 7.31)라는 여비서였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 하에서 태어난 르핸드는 고등학교에서 비서 교과목을 공부하고 여러 곳에서 비서로 일하다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루스벨트가 차관을 지내던 해군성에서 잠시 일했다. 루스벨트가 1920년 대선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서자 루스벨트의 참모가 그녀를 데려와서 선거 캠프에서 일하도록 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루스벨트는 성실하게 일한 그녀를 뉴욕의 로펌에 데려왔는데, 이듬해 4월 루스벹트는 치명적인 소아마비 증세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르핸드는 루스벨트의 거동을 돕고 치료차 온천 등을 갈 때에 동행해서 루스벨트의 재활을 도왔다. 루스벨트의 부인 일리노어(1884~1962) 여사는 사회활동으로 바빴을 뿐더러 남편이 자기의 비서 루시 러더포드(Lucy Rutherford 1891~1948)와 불륜관계이었던 것이 드러난 후 남편과 멀어졌기 때문에 하반신 마비와의 힘든 싸움을 하는 루스벨트에게 르핸드는 배우자 그 이상이었다. 르핸드는 심장이 약해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장래의 미국 대통령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루스벨트는 192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고, 루스벨트 가족은 뉴욕주 수도 올바니에 있는 관저로 이사를 했다. 관저에서도 루스벨트가 머무는 마스터 베드룸 바로 옆에 르핸드의 침실이 있었고, 일리노어 여사의 침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침이면 일리노어 여사는 수행비서이자 경호원인 뉴욕시경 소속 얼 마일러 경사와 함께 자기 일정을 나갔고 루스벨트 지사는 르핸드와 함께 주 정부 청사로 출근을 했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인 얼 마일러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일리노어 여사를 수행해서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두고 말이 많았다.)
이런 관계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르핸드는 대통령의 비서이자 게이트 키퍼(gatekeeper)였다. 르핸드를 통하지 않고는 대통령과 만날 수가 없었다. 백악관 업무는 워낙 격무였고, 루스벨트는 몸이 불편해서 모든 것을 르핸드에 의존해야 했다. 루스벨트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물러나서 생활공간으로 퇴근한 후에도 르핸드는 옆방에 있어야 했다. 르핸드는 루스벨트가 온천장으로 물리치료를 갈 때도 동행을 했다. 이처럼 루스벨트가 하반신 마비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어 대공황과 2차 대전이란 위기 국면을 감당한데는 르핸드의 역할이 컸다. 심장이 약했던 르핸드는 1941년 6월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루스벨트는 르핸드의 의료비를 지불해서 치유토록 했지만 그녀는 1944년 7월 사망했다. 루스벨트는 그녀의 사망을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르핸드의 뒤를 이어서 차석 비서였던 그레이스 튤리(Grace Tully 1900~1984)가 루스벨트를 보좌했지만 튤리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공백을 메운 사람은 루스벨트가 건강했을 때 불륜관계를 맺었던 루시 러더퍼드였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루스벨트가 온천장이나 휴양지를 갈 때 동행을 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조지아 주 웜스프링 온천장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웜스프링에는 그레이스 튤리와 루시 러더포드가 동행했는데, 루스벨트는 루시 러더포드의 품에 안겨서 운명했다. 백악관은 루시 러더포드가 웜스프링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으나 한참 후에 사실로 확인됐다. 어떤 역사학자는 루시 러더포드 덕분에 루스벨트가 1년을 더 버텨서 2차 대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루스벨트가 2차 대전을 지휘할 때 백악관에는 공무원 명단에도 없는 사실상의 비서실장이 있었다. 그는 아예 백악관에 거주하면서 루스벨트의 전쟁 정책과 전쟁 외교를 보좌했는데, 그가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 1890~1946)이다. 홉킨스는 그리넬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시의 사회복지 업무를 주관했는데, 그의 유능함을 눈 여겨 본 뉴욕 주지사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를 긴급구호계획 등 뉴딜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 책임자로 기용했고 1938년에는 상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홉킨스가 루스벨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해서 루스벨트는 3선에 나서서 당선됐다. 그 즈음 홉킨스가 위암이 악화해서 쇠약해지자 루스벨트는 그로 하여금 백악관 2층 침실에 머물면서 건강을 돌보도록 했다. 홉킨스는 상무장관직을 사임한 후에도 백악관에 머물렀다. 홉킨스는 루스벨트와 점심과 저녁을 같이 하는 등 루스벨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루스벨트에게 전화로 보고했을 때에도 옆에는 홉킨스가 있었다.
조지 마셜 등 군 지휘부는 백악관에 머물면서 대통령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홉킨스를 불편해 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루스벨트는 홉킨스를 자신의 외교 사절로 런던에 보내 처칠을 만나게 하고 모스코바에 보내 스탈린을 만나게 했다. 자연히 국무부와 합참은 홉킨스에 대해 우려하게 됐다. 홉킨스를 둘러싼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홉킨스에 대한 루스벨트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공무원이 아니면서 정부 급여를 받았던 홉킨스는 위암이 악화하자 백악관을 나와서 요양을 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그를 수시로 불러서 만났다.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홉킨스는 루스벨트에 대해 소련에도 영국에 한 것처럼 무기를 대여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은 2차 대전 중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아서 그렇게 받은 트럭과 탱크 엔진이 남아 돌자 전후에 북한에 주었고, 북한군은 그런 탱크와 트럭을 타고 6.25 남침을 했다. 당시 부통령이던 헨리 월러스와 해리 홉킨스가 친소 성향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홉킨스는 대통령 비서 자격으로 전후(戰後) 질서를 논의한 카이로 회의, 카사블랑카 회의, 그리고 얄타 회의에도 참석했다. 1945년 2월 3~11일 간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열린 회의에도 루스벨트는 홉킨스를 대동하고 참석했다. 루스벨트는 너무 쇠약해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고 위암 말기인 홉킨스도 마찬가지였다. 얄타 회담의 실무 준비를 담당한 사람은 국무부 차관보였던 앨저 히스(Alger Hiss 1904~1996)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반도의 운명은 그 때 결정되고 말았다.
얄타 회의를 준비했던 앨저 히스는 전후에 소련의 간첩이란 혐의를 받았다. 젊은 하원의원 리차드 닉슨이 하원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서 히스를 몰아붙이자 히스는 “당신은 듀크를 나왔지만 나는 하버드를 나왔다”고 해서 거기에 열 받은 닉슨은 그 후 도무지 하버드 출신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히스는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는데 그쳤으나 원자폭탄 기밀을 소련에 넘긴 로전버그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을 당했고, 역시 간첩 혐의를 받던 재무부 고위관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 1892~1948)는 자살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소련에 동조하는 발언을 자주 했던 해리 홉킨스도 역시 소련의 간첩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홉킨스는 1946년 초에 사망해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1985년 7월, 런던 주재 KGB 요원이던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Oleg Gordievsky. 1938~ )가 본국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자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KGB 요원으로 일한 그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치에 환멸을 느끼고 1974년부터 영국의 MI6에게 소련의 기밀정보를 전달했다. 그는 오랜 기간 매우 유용한 서방측 정보원이었는데, 신분이 들통 나자 가족을 소련에 둔 채 영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그는 1990년에 <KGB : Inside Story>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그는 해리 홉킨스가 ‘19호 요원’으로 불린 소련의 간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런 정보를 KGB 고위 간부로부터 들었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케네디 백악관에서 보좌관을 지낸 아서 슐레징거 교수는 홉킨스는 소련과 협상에 나섰을 뿐이며, 홉킨스가 소련에 동정적이었을 수는 있으나 홉킨스를 소련의 간첩으로 볼 증거는 없다고 비판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미국 상원은 냉전 시절에 국가안보국(NSA)이 공산주의 동조자를 상대로 비밀리에 도청을 해 온 특급비밀작전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를 공개하도록 촉구했다. 이렇게 해서 ‘판도라의 상자’가 활짝 열렸다. 이 문서는 로젠버그 부부, 앨저 히스, 덱스터 화이트 등이 모두 간첩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앨저 히스가 매카시즘에 의해 희생됐다고 주장했던 하버드 로스쿨 동문들은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또한 베노나 문서는 고르디에프스키가 지목했던 대로 ‘19호 요원’이 해리 홉킨스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2차 대전 중 백악관 2층 침실에 소련의 간첩이 머물면서 대통령과 식사를 같이 하고 카이로에서 얄타에 이르는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다.
- 사진 (1)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그리트 르핸드(가운데), 그레이스 튤리(1938년) (2) 루시 러더포드 (대단한 미인이다.) (3) 루스벨트와 상무장관 해리 홉킨스. 1938년 (4) 베노나 문서를 정리한 책. 2000년에 나왔는데, 210~215쪽에 해리 홉킨스에 관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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