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피그스 만 침공

작성일 : 2022-09-14 21:51조회 : 848

피그스 만 침공

케네디 대통령 못지않게 이안 플레밍의 <007 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은 당시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Allen Dulles 1893~1969)였다. 2차 대전 중 스위스에서 CIA의 전신(前身)인 OSS의 지부장으로 첩보활동을 지휘한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친형인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국무장관이었으니 아이젠하워 시절은 덜레스 형제가 미국을 움직였던 셈이다.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앨런 덜레스 국장을 경질하지 않았다. <007 소설>을 탐독한 앨런 덜레스는 소설 속에서 제임스 본드가 사용한 기발한 소품(小品)을 개발하라고 지시했고, 1959년 영국 방문 중에는 이안 플레밍을 만나서 환담을 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이 끝나자 덜레스 국장은 대통령 당선자 케네디에게 브리핑을 했는데, 그 때 CIA가 준비해 온 쿠바 침공계획을 보고했다. CIA는 그 동안 훈련시켜온 쿠바 난민(카스트로 집권 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 사람들)으로 구성된 ‘2506 여단’이 미 해군 함정과 공군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 쿠바 해안에 상륙해서 쿠바내의 반(反)카스트로 세력의 봉기를 일으켜서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작전이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는 그 계획이 너무 크다면서 규모를 줄이라고 지시했고, CIA는 규모를 축소해서 쿠바 남쪽 피그스 만(灣)(Bay of Pigs)을 통해 상륙하는 계획을 새로 세웠다. CIA는 이렇게 규모를 축소하면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인근에 있는 항공모함에서 대기하고 있는 지상공격기가 출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참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 침공 작전을 승인했다. 4월 17일, 1500명 규모의 침공군(2506 여단)은 피그스 만에 상륙했으나 쿠바 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포위됐다. CIA의 작전 상황실은 백악관에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나 케네디 대통령은 끝내 출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침공군은 수백 명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했으며 부상자를 포함해서 12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카스트로는 기고만장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카스트로는 소련과 군사협력을 강화하게 되어 결국 쿠바 미사일 위기를 야기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해야 했다.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와 비밀 협상 끝에 5,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포로로 잡혔던 1,000여명을 마이애미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이 때 귀환한 포로 중에는 쿠바 태생 가수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 내에 많은 적(敵)을 만들었다. CIA 간부들은 케네디가 유약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항공모함을 대기시켜 놓고 출격 명령을 기다리던 합동참모본부도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대장들이 포진하고 있던 합참은 이듬해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와 또 다시 충돌하게 된다.) CIA와 합참 못지않게 케네디의 배신에 흥분한 집단이 또 있었는데, 바로 마피아였다.

마이어 랜스키, 샘 지앙카나, 산토 트라피칸테 등 미국 각지의 마피아 두목들은 하바나에 거대하고 화려한 카지노 호텔을 갖고 있었다. 1950년 대에 하바나는 환락의 도시였고, 카스트로가 무너뜨린 바티스타 정부는 마피아가 운영하는 카지노 호텔이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에 크게 의존했다. 쿠바에 막대한 투자를 한 마피아들은 미국 정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하바나로 초대되어 즐거운 시간을 갖곤 했는데, 상원의원 존 F. 케네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자 빈손으로 쿠바를 빠져나와 미국으로 온 마피아들은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을 도와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작전을 실행에 옮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케네디가 카스트로 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바를 해방시키겠다고 약속하자 마피아는 케네디가 쿠바를 해방해서 카스트로가 몰수한 카지노 호텔을 자신들에게 돌려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쿠바 해방군이 피그스 만을 침공했는데도 케네디는 공중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11월 앨런 덜레스를 경질하고 후임으로 원자력위원장이던 존 매콘(John McCone 1902~1991)을 임명했다. 피그스 만 참사의 책임을 CIA에 돌린 셈이었다.

케네디가 암살되자 그 배후에 마피아와 CIA가 있다는 음모설이 난무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실제로 케네디가 암살되자 존 매콘 CIA 국장은 처음에는 총탄이 두 방향에서 날라 왔다고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알렸으나 CIA는 나중에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앨런 덜레스는 케네디 암살을 조사하기 위한 ‘워렌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해서 오스월드가 단독범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피그스 만에 침공한 ‘2506 여단’이 카스트로 군대에 의해 살육을 당하고 있을 때 CIA의 상황실은 비탄(悲嘆)에 잠겨버렸다. ‘2506 여단’을 구성하고 이들을 훈련시키고 작전을 기획한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1918~2007)는 통곡을 했다. 그러면 하워드 헌트는 어떤 사람인가 ? 2차 대전 중 OSS 대원으로 복무해서 첩보 사회와 인연을 맺은 헌트는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을 침입한 5인조 절도범을 지휘해서 2년 여 동안 복역을 하게 된다. 많은 소설을 써낸 작가이기도 한 하워드 헌트는 1954년 과테말라 우익 군사 쿠데타와 1961년 쿠바 피그스 만 침공, 그리고 미국판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키기 위한 작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살았다.

- 사진 (1) 케네디 대통령과 앨런 덜레스 CIA 국장 (2) 피그스 만에서 카스트로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된 자유 쿠바 침공군(‘2506 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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