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의 연방대법원 (주간 조선 2005. 11. 7.)

작성일 : 2008-03-23 00:05조회 : 1,946

<주간 조선, 2005년 11월 7일자>

미 연방대법원 : 유래와 발전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최근 우리나라에선 신임 대법원장과 새 대법관 임명을 두고 논란을 빚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현상이 미국에도 일고 있어 흥미롭다. 하지만 같은 대법원이라고 할지라고 미 연방대법원이 헌법질서와 정치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헌법재판소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은 미국에선 연방대법원이 위헌법률에 대한 사법심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헌법과 법률을 최종적으로 해석할 뿐더러 위헌법률을 무효화해서 헌법을 수호하는 권한과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워터게이트 사건, 2000년 대선(大選) 등 국가적 위기를 사법적 판단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연방대법원이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역할을 정립하고 권한을 확립해 왔다. 미국 헌법은 연방대법원의 재판관할에 대해선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구성원인 대법관에 대해선 개략적 조항만 두고 있다. 오늘날처럼 대법원장을 포함해서 9명의 대법관으로 대법원이 구성된 것은 1869년이다. 위헌법률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이 스스로 판결을 통해 확립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이 헌법을 해석×적용하는 최고기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건국 초의 마아버리 대(對) 매디슨 판결(1803년)이다. 대법원장이던 존 마셜은 이 판결을 통해 의회와 대통령을 견제하는 독립적인 사법부의 위상을 확립했다. 하지만 그 후 대법원은 흑인노예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 남북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一助)하는 우(愚)를 저지르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동안 대법원은 시민의 재산권을 수호하는데 주력했는데, 이런 대법원의 태도는 노동법 등 사회복지법을 제정해서 당시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의회와 충돌했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해서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는데, 의회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대통령의 판단을 존중해 왔다. 대법관을 위시한 연방판사는 정해진 임기가 없기 때문에 사임하거나 탄핵을 당해 파면되지 않는 한 종신의 임기가 보장된다. 그런 탓에 한번 임명되면 20-30년 동안 대법관으로 재직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하곤 했다. 존 마셜, 새먼 체이스, 윌리엄 태프트 등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이 대법원장이 된 것은 그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연방대법원의 색깔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서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에도 미치고 있다. 보수적 법률가들로 구성된 대법원이 사회주의적인 뉴딜 입법에 대해 제동을 걸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곤궁에 빠뜨렸는데, 이에 루스벨트는 대법관 숫자를 늘리겠다고 제안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1930년대 들어 나이 많은 대법관들이 은퇴하거나 사망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휴고 블랙, 윌리엄 더글러스 등 진보적 법률가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해서 대법원의 판결성향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새롭게 태어난 대법원은 뉴딜 입법과 루스벨트의 전쟁정책을 지지했다.
대법원이 판결을 통해 사회개혁에 앞장서게 된 것은 1953년에 얼 워렌 대법원장이 취임한 후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워렌을 보수적 법률가로 생각하고 대법원장으로 임명했지만, 워렌은 취임하자 마자 흑백분리 정책을 위헌으로 판시하고 형사피의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등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혁신적 판결을 연거푸 내놓았다. 이 시대의 대법원은 인종차별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사법적극주의의 전성기였다고 평가된다. 닉슨 대통령은 사법보수주의자인 워렌 버거와 윌리엄 렌퀴스트를 대법원장과 대법관으로 임명해서 대법원의 그런 성향에 제동을 걸었다. 그 후 대법원은 중도성향의 대법관의 결정에 따라 판결이 좌우됐는데, 1973년 낙태 자유화 판결도 그러했다.
1981년에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대법원의 색깔을 보수로 바꾸고자 했다. 레이건은 렌퀴스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대법관 3명을 새로 임명했는데 그의 소망은 반쯤만 이루어 졌다. 레이건에 의해 임명된 3명의 대법관 중 오직 안토닌 스칼리아만이 확실한 보수 편에 섰고, 샌드라 오코너와 앤서니 케네디는 중도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2명의 대법관을 임명했는데, 그 중 흑인인 클라렌스 토머스는 확실한 보수 편이었지만 데이비드 수터는 오히려 진보성향을 보였다. 토머스는 상원에서의 인준 청문 중 그가 오래 전에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주장이 제기돼서 곤혹을 치렀는데, 한참 후에 그것은 일종의 마녀 사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중 저명한 진보성향의 법률가인 루스 긴스버그와 스티픈 브라이어를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대법원은 진보 4인(존 스티븐스, 수터, 긴스버그, 브라이어), 보수 3인(렌퀴스트, 스칼리아, 토머스), 중도 2인(오코너, 케네디)로 구성되어 중도 2인이 중요한 판결을 좌우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재임에 성공하고 몇몇 대법관이 고령과 질병으로 은퇴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미국의 보수진영은 대법원을 보수의 철옹성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됐다. 지난 여름 오코너 판사가 은퇴를 밝힘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존 로버츠를 후임으로 지명했는데, 9월 초에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사망하자 부시 대통령은 그를 후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오고 법무부 고위직을 거쳐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내던 로버츠는 상원에서 78 대 22로 대법원장으로 인준됐다. 부시 대통령은 오코너 대법관의 후임으로 백악관 법률고문인 해리어트 마이어스를 지명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오래된 친구인 마이어스는 법관 경력이 없을 뿐더러 확고한 보수철학을 갖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서 오히려 공화당 보수파들이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에 마이어스가 인준되면 대법원은 7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 그리고 8명의 백인과 1명의 흑인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여성 대법관 긴스버그는 유태인이고, 로버츠 대법원장이 보수 가톨릭 교회에 나가는 천주교 신자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하다. 과거에는 정치인, 법무부 고위관리, 저명한 변호사나 학자를 대법관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연방항소법원 판사로서 검증을 받은 법률가를 임명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두 명의 대법관을 더 임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진보 성향인 존 스티브슨 대법관이 85세 고령이고, 긴스버그 대법관은 암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부시 대통령이 이들의 후임으로 보수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한다면 대법원은 보수 7인, 중도 1인, 진보 1인으로 구성되며, 이렇게 구성된 대법원은 향후 최소한 수십 년에 걸쳐 미국의 헌법질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대법관 임명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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