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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울법대에 출강한 강병두
작성일 : 2024-12-25 23:31조회 : 97
서울법대에 출강한 강병두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71년 1학기, 서울법대의 헌법 과목은 본교 교수인 김철수, 국민대 교수 강병두, 그리고 고려대 교수 한동섭이 각기 한 반 씩 담당했다. 나는 법B반으로 강병두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강병두(姜炳斗 1921~1971)는 192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서 1943년에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아서 귀국해서 경성제국대학 법과대학에 편입했다. 국대안(國大案)이 통과해서 서울대학교가 태어남에 따라 서울법대 1회로 졸업했다. 서울법대 1회생으로는 서울법대 교수, 문교부차관, 법제처장, 그리고 한국공법학회장을 역임한 행정법학자 김도창(金道昶 1922~2005)이 가장 유명하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강병두는 1949년에 경북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아서 헌법을 가르쳤다. 1958년에 하버드 연칭학회 방문학자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1년 동안 미국 헌법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우리나라 헌법 교수 중 아마도 처음으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구할 기회를 갖은 강병두 교수는 미국 대법원의 역할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경북대로 복귀한 강병두 교수는 5.16 직후인 1961년 6월에 국민대 헌법교수로 부임했다. 어떤 연유로 대구를 떠나서 국민대에 정착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초대 학장을 지낸 국민대는 효자동에 있는 건물 한 동(棟)이 전부인, 종합대학이 아닌 단대(單大)였으나 야간이 있어서 공무원 은행원 등 직장인들을 많이 다녔다. 5.16 후 군정(軍政) 당국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때 강병두 교수는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동경제대와 경성제대를 거쳐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수를 한 40세 나이의 강병두 교수는 화려한 학력을 자랑하는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헌법학자였다.
3공 헌법 심의에 참여
당시 헌법심의위원회를 주관한 5.16 주체세력은 육사 8기 이석제(李錫濟 1925~2011) 대령으로, 그는 3공화국에서 총무처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내게 된다. 3공화국 헌법 제정 과정에는 서울법대 헌법교수 한태연(韓泰淵 1916~2010)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3공화국 헌법은 미국식 사법심사를 채택했다. 유럽 헌법에 친숙한 한태연 보다는 하버드 로스쿨을 다녀온 강병두 교수가 사법심사를 도입하는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는 미국의 얼 워렌 대법원장이 역사적인 판결을 많이 낼 때라서 조진만(趙鎭滿 1903~1979) 대법원장도 위헌법률심사권을 법원으로 가져오고 싶어 했다. 결국 3공 헌법은 독일식 헌법재판소가 아닌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했다.
강병두 교수는 1962년 4월에 국민대 학장이 됐다. (국민대는 종합대학이 아닌 단대였기 때문에 총장이 없고 대학을 책임지는 대표자는 학장이었다.) 강병두는 1967년 3월까지 국민대 학장을 지냈다. 학장직을 마친 총무처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이 됐는데, 당시 총무처장관은 바로 이석제였다. 1970년에 강병두는 ‘행정부에 대한 의회 및 사법부의 통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모교인 서울법대에서 박사학위(舊制)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모교인 서울법대에 강사로 출강해서 헌법을 가르쳤다. 강병두는 서울법대 후배들에게 헌법을 가르치는 데 더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71년 봄은 교련(군사훈련) 반대 시위로 대학가가 시끄러웠다. 개학 후 한 달 반 정도 공부를 하다가 휴교령이 떨어져서 몇 주일을 쉬고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그런데 우리는 강병두 교수의 유고(有故)를 접했다. 한옥에서 살던 강 교수님이 밤에 구들장에서 새어 올라온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옥은 대개 연탄을 직접 아궁이에 넣어서 난방을 한 탓으로 연탄가스 사고가 종종 나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헌법 강의를 몇 번 듣고 학기가 끝나고 말았다. 시험 대신 리포트를 내서 학점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해서 동경제대에 입학하고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구를 한 강병두 교수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겨우 1년이 지나서 50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경북대와 국민대로 옮겼고 변변한 제자를 키우지 못한 강병두 교수는 이렇게 해서 잊혀져갔다. 그런데, 나는 우연히 강병두 교수가 남긴 흔적을 접할 수 있었다.
중고 책방에서 만난 강병두 교수
1974년 여름부터 나는 미국 헌법, 특히 미국 대법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우리 말로 된 책이나 논문은 읽을 것이 없어서 영어 원서 문헌을 읽었다. 그 즈음 광교 입구에 있던 외국서적 중고책방을 종종 들르곤 했다. 한국에 근무했던 미국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내어 놓은 책과 잡지를 팔던 작은 책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베트남 전쟁 비록(The Pentagon Papers)', '워터게이트 청문회 기록‘ 같은 포켓북을 사곤 했다. 1974년 초가을로 기억되는데, 그 책방에서 나는 뜻밖의 책을 몇권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벤자민 라이트(Benjamin F. Wright 1900~1976)의 <The Growth of American Constitutional Law>(1946), 토머스 파월(Thomas Reed Powell 1880~1955)의 <Vagaries and Varieties in Constitutional Law>(1956), 어니스트 베이츠(Ernest S. Bates 1879~1939)의 <The Story of the Supreme Court>(1936), 그리고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ice 1838~1922)경(卿)의 <The American Commonwealth>(1888)의 단권 요약본이었다. 미국 대법원 역사를 다룬 앞의 세 책은 모두 하드커버로, 저명한 학자들이 펴내서 고전(古典)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당시 내가 준비하던 석사학위 논문 주제에 관한 것이니 그야말로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제임스 브라이스 경(卿)의 책은 영국 정치학자/법률가가 본 미국 정부에 관한 유명한 책인데, 나의 논문 주제와는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골동품 사는 기분으로 손에 넣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이 책은 강병두 교수가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구할 때 사서 귀국할 때 갖고 온 것으로, 강 교수가 사망한 후 가족들이 용도가 없는 장서(藏書)를 중고 책방에 내어 놓은 것이다. 내면 표지에 ‘Harvard, Byoung Doo Kang'이라고 힘 있게 눌러쓴 사인이 있었다. 나는 그 때 내 수중에 들어 온 책 4권 중 3권을 읽었고 석사논문에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들을 지금도 갖고 있으니, 내 수중에 들어 온 후 반세기가 되는 셈이다.
2학년 1학기는 불과 두 달도 공부를 하지 않았고 특히 강병두 교수는 학기 도중에 사망해서 그다지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헌 책방에서 하버드에서 친필 사인을 한 책을 만나고 난 후 강병두 교수를 지금까지 이따금 생각을 하곤 한다. 무엇보다 본인이 사망하고 나서 하버드에서 구매해서 자기 사인까지 한 전공분야 책이 중고 책방에 매물로 나왔다는 사실은 나를 무척 슬프게 했다.
지금은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지만 그 이전에는 책은 학자들에게 생명선과 같았다, 하지만 전문분야 책은 오직 본인에게나 용도가 있으니 가족에게는 부담이었을 것 같다. 강병두 교수는 대학원생 제자를 키우지 못해서 후학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기억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하지만 동경제대를 들어갈 정도로 수재였으며, 1950년대 말에 (아마도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미국 헌법을 연구했고, 귀국해선 마침 발생한 5.16으로 인해 헌법 제정 심의가 시작되자 그 과정에 참여한 유능한 학자였다. 강 교수가 그 후 계속 활동을 했으면 어떤 길을 갔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사진 : 강병두 교수와 1967년 서울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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