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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보와 보수, 그 논쟁의 뿌리를 찾아서 (주간경향)
작성일 : 2015-07-09 09:04조회 : 2,901
<주간경향> 1134호 (2015년 7월 14일자)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
진보와 보수, 그 논쟁의 뿌리를 찾아서
Yuval Levin, The Great Debate (2014, The Basic Books, 275 pages)
"유벌 레빈이란 정치학자가 펴낸 <대토론>(The Great Debate)은 오늘날 보수와 진보, 더 나아가 우파와 좌파라는 철학을 탄생시킨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이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이란 인류사적 사건을 두고 벌인 대토론을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해 놓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히 회자되는 단어가 ‘진보’와 ‘보수’다. 길을 지나는 행인마저 자신이 진보에 가까우니, 자신은 보수니 하는 말을 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좋아하면 보수이고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면 진보이며, 새누리당을 지지하면 보수이고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하면 진보인 것이다. 복지와 분배, 그리고 증세를 강조하면 진보이고 성장과 감세를 주장하면 보수이며, 북한과 대화하자고 하면 진보이고 북한에 대응하자고 하면 보수가 된다.
이 정도로 보수와 진보를 말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엔 쇠고기 수입 개방이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면, 그리고 현 정권 들어선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요구하면 대뜸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덤벼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 보수의 뿌리는 ‘친일’이라는 식의 획일적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도 보편적 개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라서 나라에 따라 다소간 차이는 있을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론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수주의 철학의 출발점인 버크
유벌 레빈이란 정치학자가 펴낸 <대토론> (The Great Debate)은 오늘날 보수와 진보, 더 나아가 우파와 좌파라는 철학을 탄생시킨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이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이란 인류사적 사건을 두고 벌인 대토론을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해 놓고 있다.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더블린에서 태어났는데, 변호사이던 부친은 성공회 신자였으나 모친은 가톨릭 신자였다.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토론 클럽을 만들어서 활동했고, 부친의 권고에 따라 법률을 공부했으나 곧 포기하고 유럽을 여행한 후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1765년에 버크는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의정활동 외에도 새무엘 존슨 같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했다. 버크는 휘그 당원이었고,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영국 정부의 재정을 강화하는 등 정부개혁을 주장했고, 가톨릭 같은 종교적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며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 정치가 기득권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자 버크는 그 같은 과격한 현상이 영국에 수입될 가능성을 경계하게 됐다. 버크는 개혁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영국의 정치적 전통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던 전통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왕실의 권한과 귀족제도를 약화시키는 데 반대했고, 같은 맥락에서 한 국가를 전통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과격한 정치적 개혁에 반대했다. 개혁 정당인 휘그당 소속의 대표적 논객인 버크가 이런 주장을 하자 휘그당은 구파(Old Whig)와 신파(New Whig)로 갈라졌다. 버크가 대표하는 구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그리고 신파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버크가 그 같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서 펴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성찰>(1790년)은 보수주의 철학의 출발이었다.
버크가 공부를 많이 한 학자 출신의 정치인이며 논객이었다면 토머스 페인(1737~1809)은 선동가 기질이 농후했던 대중운동가였다. 버크의 저술이 선행 연구를 반영하고 비판하는 등 학술적인 데 비해 페인의 글은 팸플릿 수준이었으며,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고 대중을 움직이고자 하는 선동적 요소가 강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페인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지식인 반열에 낄 수 없었다. 페인은 자신은 남의 글을 읽기보다는 혼자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독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그러한 페인을 좋아해서 친구처럼 생각했다.
선동가 기질의 대중운동가 페인
잉글랜드 남부의 작은 자영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페인은 부친의 일을 도우며 야간에 문학 모임에 참여해 식견을 높였다. 때 이른 부인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그는 세리(稅吏)가 됐는데, 부패한 세금행정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목격한 후 의회에 청원운동을 벌이는 등 정치적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를 움직여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던 그는 곧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미국 식민정부를 대표해서 런던에 와 있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났다. 프랭클린은 페인에게 미국에 와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페인은 1774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얼마 후 잡지사에서 일하게 됐다.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고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신문에 자주 기고한 그는 독립혁명을 앞둔 미국에서 주목을 받게 됐다.
페인은 이제는 고전이 된 <상식>(Common Sense)(1776년)을 펴내서 유명해졌다. 50쪽에 불과한 이 팸플릿은 왕실과 세습 제도에 근거한 영국 정치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정부는 시민에게 동등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며, 이를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갈파(喝破)했다. 미국 독립운동이 식민지 인민들의 정당한 권리임을 주장한 <상식>은 미국 식민지 전역에서 몇 주일 만에 수만 부가 팔리고 각지의 신문들이 그 내용을 소개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조지 워싱턴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페인의 이 같은 논리를 지지해 페인은 정치적 인물로 부상했다.
페인은 미국 독립이 세계사적 운동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는 것을 본 페인은 이듬해에 파리로 향했다.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는 책을 낸 것을 알게 된 페인은 버크를 비판하는 <인간의 권리>(1791년)를 펴냈다. 이 책은 영국에서 수백만 권이 팔리는 등 역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페인은 영국의 체제를 뒤집어엎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혔다. 당시 영국을 이끌던 토리당 정부는 페인을 반역과 명예훼손 혐의로 소추하려 했다. 영국에 잠시 머물던 페인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싸우기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영국 법원은 페인이 출석하지 않은 재판에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버크와 페인은 문필가이자 사상가였지만 동시에 정치적 행동가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치사회적 개혁을 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버크는 점진적 개혁으로 사회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던 데 비해 페인은 부당한 정부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새로운 출발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페인은 스스로 혁명운동가임을 자처하고 혁명의 기운이 있던 미국과 프랑스를 찾아 다녔다. 죽음을 앞둔 버크는 자기가 사망한 후에 영국에서 프랑스에서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서 자신의 시신이 파헤쳐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18세기 말에 ‘현대적 자유주의’(modern liberalism)을 두고 세기의 거장이 벌인 이 지적인 토론의 많은 부분은 21세기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다. 무엇보다 원색적 용어와 막말이 난무하는 한국에 과연 제대로 된 진보와 보수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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