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보수주의 : 이상돈과 박효종 (경향)
2014-02-17 10:03 929 관리자


경향신문 2014년 2월 17일자 기사

[김호기의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

(10) 보수주의, 사상의 빈곤과 정치의 과잉: 이상돈과 박효종

ㆍ이상돈, 국가·공동체 관점 ‘정통 보수주의 대표’

ㆍ박효종, 개인보다 공동체 중시 ‘뉴라이트 대변’

이제 이 기획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인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상을 차례로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가능한 한 객관적 시각에서 평가하고 전망하려 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무릇 어떤 글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이다. 한국 보수주의를 특징짓는 게 ‘사상의 빈곤과 정치의 과잉’이라면, 진보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사상의 과잉과 정치의 빈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정치란 좁은 의미의 제도정치를 지칭한다.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보존한다(conserve)’는 말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서구 보수주의의 선구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대혁명 분석에서 그 기본 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합리적 능력은 제한돼 있고, 사회는 이성이 아니라 전통적 도덕·관습에 의해 재생산되며, 문명의 진보는 사회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전통주의·질서주의·점진주의를 강조해 계몽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된 진보주의에 맞서는 이념적 대항축을 마련했다.

이러한 ‘고전적 보수주의’는 20세기 사회변동 속에서 변화를 모색해왔다. 그 대표적인 흐름은 1970년대 이후의 신보수주의,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였다. 학자로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정치가로는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는 전통과 질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보수주의를 계승했지만, 자유시장경제를 적극 옹호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의 새로운 변신을 추구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지식사회의 주류를 이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중요했다. 첫째, 해방 이후 분단체제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생생한 체험은 우리 사회를 ‘보수 주도의 사회’로 바꿔 놨다. 냉전분단체제 아래서 반공주의는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고, 진보의 이념인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시민권은 불허됐다. 둘째, 전통적 유교사상 또한 보수주의 발전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유교적 전통주의와 도덕주의는 서구 보수주의와 높은 친화성을 갖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상황이 이런데도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을 적어도 대학사회 안에선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치학자 강정인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기존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집권세력의 ‘상황적 보수주의’, 즉 ‘철학 없는 보수 세력’만 존재해온 현실이 한국 보수주의의 자화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빈곤 속에서 보수주의 이념을 가다듬고 성숙시켜온 이들로 나는 두 사람을 주목하고 싶다. 법학자 이상돈과 정치학자 박효종이 그들이다.

■ 이상돈, 정통적 보수의 법학자

보수주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기반해 유기체로서의 전체 사회를 위한 실현 가능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기본에 가장 충실한 지식인으로 나는 늘 이상돈을 꼽아왔다. 그는 엘리트주의자이지만 기품 있는, 전통을 존중하지만 개방적인, 법치를 중시하지만 권력에는 비판적인, 우리 사회에선 드문 보수주의자다.

이상돈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앙대에서 법학을 가르치다 2012년 은퇴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보수주의에 대한 ‘보수적 비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든 진보든 자기 진영에 대한 비판에는 인색하다. 하지만 이상돈은 진보는 물론 보수에 대해서도 언제나 거침없는 비판을 가해왔다. 그에게 성역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돈의 사유와 실천을 잘 보여주는 책이 <조용한 혁명>(2011)이다. 이 책이 큰 화제가 됐던 것은 보수적 지식인으로서 보수 정부인 이명박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때문이다. 그는 ‘진영의 논리’보다 ‘사안의 논리’를 중시한다. 자기 진영이라 해서 무조건 감싸지 않고, 사안에 따라선 상대 진영의 주장까지도 존중한다.

이상돈이 강조해온 세 가치는 국가안보, 경제성장, 법치주의다. 다른 보수주의자들도 이 가치들을 중시하지만, 이상돈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그 태도에 있다. 다른 이들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 가치들을 빈번히 이용해온 데 반해, 이상돈은 언제나 국가와 공동체의 관점에서 안보·경제·법치를 분석하고 평가해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 보수주의를 대표한다.

이상돈이 4대강 사업의 비판에 앞장선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경향신문에 ‘이상돈·김호기의 대화’를 연재하던 2011년 장맛비가 내리던 어느 날, 상의할 일이 있어 전화를 걸어보니 한강과 그 지천들이 걱정돼 우중을 뚫고 답사를 나왔다고 했다.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는 따듯한 사상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상돈은 내게 ‘따듯한 보수주의’ 지식인이다.

■ 박효종, 뉴라이트의 정치학자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 보수주의에서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뉴라이트’다. 뉴라이트는 개발독재적 보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보수의 혁신을 내건 일종의 사상운동이었다. 산업화 시대의 ‘안보적 보수’와 비교해 세계화 시대의 ‘시장적 보수’라 부를 수 있는 이 뉴라이트를 대표한 지식인들은 고(故) 김일영, 전상인, 윤창현 그리고 박효종이다.

박효종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윤리교육과 정치학을 가르치다 지난해 은퇴한 다음 서울대에서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박효종은 내게 상반된 모습을 가진 지식인이다. 한편에서 정치철학에 대한 그의 전문적 연구들은 음미하고 경청할 만한 통찰을 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 현실 문제에 대한 그의 칼럼과 논설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국가와 권위>(2001)는 박효종의 대표작이다.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을 받은 이 책의 핵심 주장은 국가의 권위에 대한 시민적 복종을 ‘의무’가 아니라 ‘덕목(virtue)’으로 봐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신학에서 출발해 정치철학으로 나간 그의 학문적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사상의 저류에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기독교적 공동체주의가 놓여 있다.

이러한 정치철학자로서의 모습과는 달리 공론장에서 박효종은 뉴라이트를 일관되게 대변했다. 내가 보기에 뉴라이트는 정치적 세력화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사상적 혁신에는 실패했다. 냉전반공주의를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로,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독재를 시장이 선도하는 성장제일주의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새로운(new)’ 게 없는 우파가 뉴라이트일 것이다.

그동안 박효종과는 신문 및 방송에서 여러 차례 토론하고 논쟁해왔다. 역사인식과 현실분석에는 이견이 작지 않았지만,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선 생각을 같이했다. 합리성과 관용을 늘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보수 지식인은 물론 진보 지식인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으로 보인다.

■ 보수주의의 미래

최근 한국 보수주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보수 정치세력은 2007년과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2007년의 경우 뉴라이트가, 2012년의 경우 보수적 경제민주화론과 복지국가론이 크게 기여했다. 우리 사회 보수 정치세력은 대단히 기민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파워엘리트 연합 또한 강고하다.

하지만 이러한 능수능란한 정치에 대비해 보수주의 사상은 여전히 빈곤하다. 보수 정치세력이 여전히 의존하는 것은 지역주의 정치와 박정희 시대에 대한 그리움,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중도층의 실망이라는 반사이익이다. 보수주의는 과거를 고수하려는 ‘수구(守舊)’ 또는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反動)’과는 다른 사상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보수주의를 수구나 반동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진지한 자기성찰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상으로서 보수주의의 본령은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모색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통합, 무엇보다 안정 속의 개혁을 중시하는 사상적 기획이다. 이러한 보수주의 사상과 정책 대안을 새롭게 탐색하는 데 이상돈과 박효종의 연구들은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안겨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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