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폴리뷰 펌] 대한민국 올림픽, 손기정에서부터 김연아,박태환까지
2012-07-19 08:14 1,043 유은선

2012 제30회 런던 올림픽이 어느덧 열흘앞으로 다가왔습니다. 1948년 14회 대회이래 무려 64년만에 다시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는 이번 올림픽이 특히 우리에게 남다른 감회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그 런던이 지금으로부터 64년전인 1948년에 우리나라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출전했던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올림픽은 돌이켜보면 우리에겐 곡절많았던 근,현대사의 곳곳에 참으로 묘하게 크고 작은 인연으로 다가온 일들이 있었기에 올림픽을 대하는 감정이 늘 남다른것 같습니다. 우리민족의 올림픽과의 첫 인연.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저 유명한 1936년 일제강점기때 손기정 선수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만 했던 베를린 올림픽이죠.


 올림픽 금메달이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거늘, 어느 유럽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인간이 표현할수 있는 가장 슬픈표정’을 하고 시상대에 선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장에서의 손기정 선수(금메달)와 남승룡 선수(동메달). 그후 이 사진은 우리에게 참으로 오랫동안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지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후 처음으로 드디어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할수 있었던 첫 대회가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평균 200-300명씩 출전하게 되는 요즘의 대규모 우리나라 올림픽 대표선수단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소규모로 조촐하게 참석했던 런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역도에선 김성집 선수, 복싱에선 한수안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 우리나라에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안겨주게 됩니다. 비록 동메달 2개라는 단촐한 성적이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64년전 런던에서 처음 얻은 두 개의 동메달은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코리아의 작고 의미있는 첫 걸음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6.25 전란의 와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올림픽에 참가 1952년 헬싱키 대회에서도 복싱과 역도에서 각각 한 개씩 두 개의 동메달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4년후인 1956년 제16회 멜버른 대회에선 복싱의 송순천 선수가 올림픽 출전사상 우리나라의 첫 은메달을 안겨주게 됩니다. 당시로선 최초의 은메달도 매우 값지고 의미있는 것이라 송순천 선수는 일약 국민영웅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56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게 됩니다.


 1960년은 4.19 혁명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 이 해 참가한 제17회 로마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는 단 한 개의 동메달도 얻지 못하는 이른바 ‘노메달 치욕’을 안게 됩니다. 올림픽 참가국이 어느덧 200여개국에 달하는 요즘도 그 모든 나라들이 전부 메달을 따는것은 아니라, 전체 참가국의 절반정도에 달하는 100여개국은 동메달 하나도 획득하지 못하는 ‘노메달 국가’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지만, 우리에게도 ‘올림픽 노메달 시절’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그런시절도 있었다는 의미로 알아둘 필요도 있을것 같습니다.


 1964년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일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도쿄올림픽은 우리에겐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전 국민이 울어야만 했던 일이 벌어졌던 대회이기도 합니다. 당시 북한 선수단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북한의 육상 금메달 유망주 신금단 선수. 헌데 실은 이 신금단 선수의 아버지인 신문준씨가 1.4 후퇴때 가족을 북에 남겨둔채 홀홀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으로 올림픽 기간을 통해 북에 두고온 딸 신금단 선수를 만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북한측이 제공한 조선회관에서 상봉하게 된 신금단과 신문준 부녀. 하지만 14년만의 상봉인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7분. “어머니는 살아계시냐 ?”, “네, 잘 있습니다. ” 이들이 나눌수 있는 유일한 대화였습니다. 이후 7분만에 다시 딸과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던 실향민 신문준씨는 19년 세월이 지난 1983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은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이른바 ‘피의 올림픽’으로 유명하지요. 헌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 대회에서 북한의 이호준 선수가 사격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기자회견장에서 소감을 묻는 서방 기자들에게 “수령님의 교시대로 원쑤놈의 심장을 쏘는 심정으로 쏘았다.”는 발언을 해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편 뮌헨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유도의 오승립 선수가 은메달 하나만을 획득하는데 그치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목에걸던 사진을 늘 가슴아프게 바라보며, 우린 언제쯤 우리나라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당당히 시상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나 안타까와하던 우리에게 바야흐로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기쁜 소식은 그로부터 4년후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입니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 바로 우리나라의 올림픽 공식 첫 금메달 리스트의 탄생이었습니다. 1936년 베를린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손기정 선수와는 대조적으로 몬트리올 시상대에 올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손을 흔드는 양정모 선수의 모습은 그후 참으로 여러차례 자료화면으로 방송을 통해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의 종합 성적은 금 1 은 1 동 4. 그리고 여자배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 구기종목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합니다.


 1972년에 태어난 필자의 기억에 바야흐로 TV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수 있었던 첫 올림픽의 기억은 1984년 제23회 LA 올림픽입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어 대체적으로 그에대한 사회적 기대심리도 높아져있던 그 시절. 동구 공산권 국가의 불참의 덕을 본 탓일까요, 아니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스포츠 실력도 그만큼 향상되었음을 보여준 결과일까요. LA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를 획득 종합 10위의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양궁의 서향순 선수는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 첫 여성 금메달리스트가 되기도 했고, 동구 공산권이 불참한 가운데 출전권을 획득한 여자농구와 여자핸드볼은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값진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의 올림픽 출전 성적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예전에 어떤 정치인은 197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을 ‘올림픽 세대’라 부르기도 했더군요. 뭐 아주 틀린말은 아닌게 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저희 세대는 그야말로 ‘서울올림픽 세뇌교육’을 받으며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여하튼 그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표현대로 ‘듣기만 해도 설레고 가슴 뿌듯한 일’이었던 서울올림픽 개최. 하긴 1936년 일제강점기 당시 손기정 선수의 가슴아픈 금메달을 기억하고 있는 이 한많고 설움많은 민족이 설마 이 나라 한복판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일이 벌어질거라곤 한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누가 꿈에선들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비판론자들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5.18 광주참극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여론무마용으로 무리하게 개최한 대회’라 혹평하기도 했지만 ‘서울올림픽 개최’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가슴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인것만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88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종합성적은 금 12 은 10 동 11로 4위. 양궁에선 김수녕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을 기록하기도 했고, 여자핸드볼은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우리나라 구기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구기종목사상 우리나라의 첫 금(핸드볼),은(농구,핸드볼),동(배구)메달은 모두 여자선수단이 획득했군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우리로선 잊지못할 또 하나의 감격스러운 금메달을 안겨다준 대회입니다. 바로 손기정선수 이래로 56년만에 드디어 ‘마라톤’에서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것입니다. 그 장본인은 다름아닌 황영조선수.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자랑스럽게 올라가는 태극기. 56년전의 베를린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바르셀로나의 무대였습니다.


 92년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 12 은 5 동 12로 종합 7위를 달성했고, 여자핸드볼은 88년에 이어 92년에도 금메달을 획득 구기사상 첫 2연패를 기록하게 됩니다. 여자핸드볼은 한마디로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올림픽때마다 늘 눈부신 투혼을 보여준 상징과도 같은 종목이기도 하지요. 한편 바르셀로나 이후 우리나라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금 7 은 15 동 5,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금 8 은 10 동 10의 성적을 거둡니다. 서울올림픽때에 비해선 아무래도 약간 주춤한 모습이지요.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금 9 은 12 동 9로 총 31개의 메달을 획득합니다.


 한편 4년전인 2008년 북경 올림픽은 서울 올림픽 이후 다소 주춤했던 한국 스포츠가 다시한번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준 대회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에 이어 아시아에선 세 번째로 열린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의 올림픽. 이 대회에서 우리나란 금 13 은 10 동 8개를 획득했지요. 박태환 선수는 우리나라 수영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고 그외 사격,역도,펜싱 등등 기록경기나 격투기등 보다 다양한 종목에서 많은 선수들이 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대회이기도 합니다. 야구도 북경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0년 아테네 올림픽에서야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는 북경대회에서 출전선수 4명 전원이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동계 올림픽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하네요. 사실 하계올림픽과 달리 동계올림픽은 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메달보다는 참가에 의미를 두는 대회였습니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동계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딴것은 쇼트트랙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 대회였습니다. 김기훈 선수가 이 대회에서 동계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이자 2관왕을 기록한것을 시작으로 쇼트트랙은 이때부터 우리나라 동계올림픽 단골 메달밭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동계올림픽을 4년마다 개최되는 하계올림픽의 중간지점에 개최하기로 한 이후에 열린 1994년의 릴리함메르 대회. 이 대회에선 쇼트트랙의 전이경 선수가 2관왕을 하는등 금 4 은 1 동 1의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전이경 선수는 4년후인 98년 나가노 대회에서 다시 2관왕을 차지 우리나라 올림픽 사상 첫 2관왕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98년 대회에선 그 외 남자 쇼트트랙에서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등 금 3 은 1 동 2의 성적을 거둡니다.


 하지만 김동성 선수는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대회에선 심판진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실격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지요. 그 때문에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 2, 은 2의 성적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4년후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선 우리나라는 또다시 올림픽 출전사상 새로운 의미의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바로 ‘올림픽 3관왕’의 탄생입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올림픽 다관왕은 하계에선 양궁 여자 단체전과 개인전을 석권한 88년의 김수녕, 92년의 조윤정, 96년의 김경욱, 2000년의 윤미진, 2004년의 박성현등 5명. 그리고 동계올림픽에선 쇼트트랙의 김기훈,전이경 선수가 2관왕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전이경은 2관왕 2연패) 사실 상대적으로 메달박스인 육상,수영,체조등의 기록경기에 취약하고 격투기나 구기종목등에 강한 우리나라는 대체로 올림픽 다관왕은 꿈꾸기 어려운것 아닌가 생각되어왔던것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올림픽 3관왕’은. 하지만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선 그 꿈의 ‘올림픽 3관왕’이 탄생했던것입니다. 쇼트트랙 남자에선 안현수, 여자에선 진선유 선수입니다. 이 두 선수의 맹활약을 포함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 6 은 3 동 1의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2010 뱅쿠버 동계올림픽 또한 우리에겐 참으로 의미있는 성과를 안겨준 대회입니다. 사실 이전까지의 동계올림픽 메달은 90퍼센트 이상이 쇼트트랙에서 거둔것. 하지만 2010 뱅쿠버 대회에선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최초로 이상화,모태범,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회에서만 유난히 부진을 보였던 쇼트트랙의 경우 이정수 선수의 2관왕에만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뱅쿠버 대회의 백미는 피겨스케이팅에서의 김연아 선수였죠. 사실 리듬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경기는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키크고 늘씬한 서양미녀들의 묘기나 구경하며 눈요기하는 그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는 종목이었습니다. 헌데 거기에 언제부터인가 혜성같이 나타난 김연아... - 저 개인적으로는 김연아 선수를 하늘이 이 민족을 어여삐 여기사 천년만에 내려준 보석같은 선물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


 그 김연아가 마침내 2010 뱅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 금메달 시상대에 오르게 됩니다. 1936년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마라톤 시상식에서의 슬픈 손기정의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환하게 웃는 밝고 귀여운 모습으로...


 국민요정 김연아를 홍보대사로 앞세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까지 이루어낸 대한민국. 그리고 이제 제30회 2012 런던 하계올림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올림픽이 금메달을 따기위해 존재하는것만은 아닙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힘과 기량을 겨루는 한바탕 축제. 그리고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다짐하는 자리. 그러나 솔직히 올림픽은 강대국들의 한바탕 힘자랑대회의 성격이 더 커보인다는것 부인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올림픽 금메달에 우리가 한때 그토록 애태워하고 목말라했던 그 근본원인을 따지고보면 역시 1936년 일제 강점하에 참가했던 베를린 올림픽의 일장기를 단 손기정 선수의 아쉬운 금메달의 기억 때문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덧 대명천지 21세기. 요즘은 올림픽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의식도 많이 성숙해 반드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박수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 수많은 무명의 선수들이나 아쉬운 은메달,동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더 격려와 박수를 보내기도 하는등 이제 국민의식도 많이 성숙한듯 합니다.


 1948년 건국이래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에서 역도와 복싱에서의 동메달 두 개로 출발한 대한민국. 4년전 북경 올림픽에선 2008년 금 13 은 10 동 8로 당당 세계7위를 기록하고 그리고 이제 실로 64년만에 다시 1948년의 그 런던을 찾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을 바라보는 느낌도 아마 세대별로 조금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메달보다는 참가에 더 의미를 두며 어쩌다 획득하게 되는 은메달,동메달 한두개에 만족해야만 했을 가난했던 시절의 올림픽을 기억하는 50대 이상의 세대들, 냉전의 소용돌이속에 자유로울수 없던 올림픽들 (72 피의 올림픽, 80,84 반쪽 올림픽 등)을 성장기때 지켜보았을 486 세대들, 또는 ‘서울올림픽 세뇌교육’을 받으며 자란 70년대생들, 아직 세상물정을 모를때 서울올림픽을 접하게 되었을 80년대생들, 서울올림픽 이후에 태어난 90년대생과 밀레니엄 세대들. 이들의 올림픽에 대해 갖는 느낌이 어찌 다 같을수가 있을까요 ?


 무슨 이야기냐면 솔직히 저희가 초등학교때만해도 친구들끼리 노골적으로 “야, 근데 우리나라 서울올림픽때 금메달 딸수나 있긴 한거냐 ?” 하는 이야기 주고받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요즘의 10대-20대 초반 젊은이,청소년들은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열 개정도는 따는걸 기본실력(?)으로나 인식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란걸 이야기하고 싶은겁니다.


 여하튼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았던 우리의 지난 100년 가까운 현대사에 참으로 묘하게 직,간접적으로 얽힌 인연이 많았던 그것이 올림픽입니다. 아마도 올림픽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감정과 감회가 남다른 것이 그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이제 17일간의 열전을 치를 런던올림픽이 어느덧 열흘앞으로 다가왔습니다. 64년전 처녀출전한 동북아의 작은나라 대한민국에게 두 개의 동메달을 안겨다주었던 런던하늘은 과연 그로부터 64년 세월이 흐른 ‘다이나믹 코리아’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까요 ? 그 성과를 조심스러운 설레임으로 기대해보며, 보다 많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2012 런던 올림픽을 기다려볼까 합니다.

'티아라 사태'와 '광우병 사태'는 닮은꼴이다. 
보수단체는 보수가 아니라 반북단체로 이름을 바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