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북녘동포들의 참상을 외면하고 얻어낸 어설픈 평화
2018-05-14 16:46 643 유은선

나는 지금 과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역사의 최종 기착지는 어디가 될것이며 후세의 평가는 어찌될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의문과 회의감 그리고 불안감을 안고 이 글을 쓴다. 그러고보니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의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은지도 어느덧 보름여가 지났다. 언론,방송은 여전히 마치 전쟁위기라도 가신 듯이 여전히 정상회담 이후의 들뜬 사회분위기를 담고있으나 필자는 막상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을 읽고나니 어떤 공허함과 허탈감만 밀려들었다.




 합의문은 첫 부분엔 ‘남북간 끊어진 혈맥을 잇는다’느니 어쩌느니하며 웬만한 대필작가나 축사 대필자도 할법한 추상적인 이야기만 쭉 나열해놓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남북간 연락사무소 설치나 이산가족 상봉,철도연결등 남북교류와 관련된 대화가 있을때마다 늘 논의되어 왔던것들이 나열되어있고, 정작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던 북한 핵문제는 ‘비핵화’라는 애매한 표현과 함께 끝에가서 달랑 한줄 언급하고 있을뿐이다. 남북대화 지지파들은 흔히 북한체제의 특성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하지만 이해해주는것도 한계가 있다.




 직장생활을 한 몇 년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떤 보고서든 기획안이든 사업계획서든 대개는 중요한 사업항목이 위에 올라오기 마련이고 뒤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추상적인 사안,내용들이 ‘기타사항’ 이런식으로 언급되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회사직원이 상사에게 보고서를 쓰면서 중요한 사안은 뒤로 미뤄놓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사안이나 추상적인 문구만 앞에서 쭉 늘어놓고 있다면 그 직원은 그날로 아마 짐 쌀 각오 해야할 것이다. 헌데 이번 ‘판문점 합의문’은 (설사 북한 김정은을 정상국가 수반으로 인정한다쳐도) 세상천지에 이런 정상회담 합의문도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따름이다. 한마디로 앞부분엔 추상적인 미사여구, 늘 이야기되어온 남북교류 사안에 대한것들만 쭉 열거되어있고 맨 끝에가서야 마치 귀찮지만 하나 끼워넣어주듯 ‘비핵화’ 어쩌구 하는 문구 하나만 달랑 들어가 있을뿐이다. 마치 김정은이 북한 핵문제는 정말 정상회담에서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남한이든 미국이든 하도 요구를 해대니까 귀찮아서라도 억지로 맨 끝에 끼워넣어준 그런 느낌마저 든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 남북문제는 우리사회 보수-진보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자 이슈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80년대 운동권의 친북기류라던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듯한 일부 반미 재야단체 같은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북한문제와 관련 사회 전체가 보수-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9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아주 골수 종북인사들을 제외한 어느정도 합리적인 중도개혁파거나 정치에 별반 관심없는 일반인들을 만나보면 ‘북한과 그냥 전쟁치르지 말고 이렇게 평화적인 분위기로 계속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원론적으로야 그럴듯하고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그 평화의 이면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기에 하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지난 현대사는 비록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출발했지만 근본적으로 냉전시대였고 남북분단 자체가 바로 그 냉전의 희생양이었기에,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에 넘어가면 안된다’는 명분하에 독재가 합리화되던 시절이 있었다. 장기집권도, 군사혁명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도 공산주의 침략을 막자는 명분하엔 그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은 바로 그런 우리 한국사회가 떠안고있는 근본적인 모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6.25때 가족,친지의 석연찮은 행보로 연좌제로 고통받은 사람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수많은 학자나 문화예술계 인사들, 또는 다당제하에서 그래도 야당을 지켜야했기에 정치활동을 하면서 무수히 탄압받고 고통받았던 사람들. 민주화운동은 바로 그렇게 우리 현대사에 어두운 부분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필요가 있었기에 그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고자하던 투쟁이었기에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한 뒤,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북한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한인권이니 북한민주화니 하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한게 대략 그 무렵(90년대 중,후반)부터의 일이다.




 보통 북한인권문제를 보수진영에서 먼저 꺼낸걸로 알기 쉬운데 정작 초창기 북한인권단체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대개 국내의 순수한 인권운동가나 북한전문가 또는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이라던가 기독교 선교사등 대략 그런 사람들이었다. 북한인권문제에 보수단체들이 개입하면서 이후 정치적으로 변질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이 글에선 생략한다.




 반미 촛불시위라던가 광우병 사태 또는 최순실 사태때 있었던 촛불집회와 같은 범 국민적 이슈, 하지만 탈북자와 북한인권문제는 그런 범 국민적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난 20년 확실하게 느껴온터다. 생각해보니 북한인권문제가 다른 촛불집회처럼 국민적 이슈가 되지 못하는 것은 피부로 와닿는 나 자신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여학생이라던가, 광우병 쇠고기 문제라던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바로 그 비선실세의 의혹을 받는 당사자가 대학 부정입학 논란을 빚는 과정에서 ‘돈 없는 네 부모를 원망하라’며 SNS에 별 생각없이 남긴글은 바로 나도 언제 저런 불이익이나 모욕,손해를 받을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점에서 바로 분노와 격분의 감정으로 이어지지만 북한인권이나 탈북자는 그야말로 관심갖는 사람들만 관심갖는 사안일뿐 나 자신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정서는 더해간다. 6.25 이전에 북에 두고온 가족이 있는 실향민이나 그 2세정도까지라면 모를까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북한은 그저 좀 ‘특이하고 이상한 나라’일뿐. 실향민의 경우에도 2세까진 몰라도 3세,4세 정도로 내려가면 그저 북한은 ‘할아버지 옛날 사시던 고향’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노무현 정권때 북한 미녀응원단에 열광하던 젊은 세대의 정서나 케이블에서 젊고 예쁜 탈북 여성들이 나와서 벌이는 토크쇼에 관심갖는 사람들이나 그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녀응원단이든 탈북여성이든 대다수 젊은 세대들에겐 그저 자기네들끼리 얼짱각도 사진찍어 SNS에 올리며 자기네들끼리 공유하며 즐기는 그야말로 ‘호기심의 대상’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젊은세대들에게 그렇게 북한은 그냥 좀 ‘신기하고 이상한 나라’이거나 ‘무력도발이나 핵위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그런 무서운 나라였던것이고 미녀응원단이든 탈북여성이든 그런 ‘이상하고 신기하고 무서운 나라’에서 온 ‘신기한 여자’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심있게 봤을뿐이다.




 남북간에 전쟁없이 평화가 정착된 체제로 계속 갔으면 한다는 바램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결국 저와같은 인식의 바탕하에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는 반공보수적인 시각에서도 진보적 낭만주의적 시각에서도 민족적 당위성 때문에 통일은 반드시 해야하는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단이 된지 어느덧 70년 세월. 남북간의 이질감 때문에 통일은 아무래도 부작용만 클 것 같고, 또 통일담론 자체가 막연하고 공허하기도 해 그보다는 차라리 남북간에 전쟁없이 평화가 정착된 체제.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에 북한동포의 참상을 외면한채 얻어내는 이 어설픈(!) 평화가 과연 역사의 순리적 흐름일지 그 의구심을 갖게되는 것이다. 어쨌든 북한동포들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한민족이요 실리적으로도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헌법적 논리는 일단 배제한다면) 바로 인접해있는 국가다. 무엇보다 동북아의 복잡한 국제정세 때문에 북한체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만약 저 멀리 아프리카나 중남미 어느곳에 있는 나라라면 그곳 주민들의 인권과 생활상이 아무리 참혹한다한들 거기에 관심갖는 사람들만 관심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으론 한민족이요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휴전선을 맞대고 이웃한곳의 주민들의 실상을 외면한다는 것을 과연 정의롭다 할수 있을까 ? 정치가 도덕군자들 담론 나누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한 주민들의 민주와 인권을 위해 투쟁해온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북한동포의 참상을 외면한채 얻어내는 남북간의 평화정착이란 점에서는 실로 역사적 아이러니를 느끼기에 이 말을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설사 정말 북한인권을 어디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있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인식한다 할지라도 탈북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지금도 1년에 천수백명 이상씩 한국으로 들어오고있고 어쩌면 여전히 그보다 열배이상 되는이들이 목숨을 걸고 그곳을 탈출해나오거나 탈출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탈북자가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치적 핍박 때문이요, 두 번째가 경제적 이유다. 북한동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것도 그 근본원인도 결국 그곳 정치체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북자 문제는 북한의 정치체제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한 앞으로도 현재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분명할진대 북한동포의 참상을 외면한채 얻어내는 이 ‘어설픈 평화’가 과연 역사의 정의라고 볼수 있을지 다시한번 진지하게 묻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이 땅의 민주와 인권과 자유를 위해 그토록 투쟁했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얻어낸 최종 결과물이 결국 이것인지. 겨우 이 모습을 보고자 그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했었던것인가. 실로 깊은 회의와 의문과 불신을 갖지 않을수가 없다.

차라리 친박을 정면에 내세워보자 
박근혜의 실책과 문재인의 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