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님께 2009-06-28 527 인문학도 말씀하신 내용의 요지는 잘 알았습니다만 문제는, 말씀하신 사항이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씀하신 대로의 내용을 수긍하면 결국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저 '있었던(existed)' 것이 되고 맙니다. 즉, 통치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미 그리 된 것이므로 거기에 순응한 것이 왜 잘못이냐, 따라서 통치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명제가 되고 말지요. 뭐, 이런 부분은 일단 차치해두고서라도. 일단,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했는데, 이 나라는 충분히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사실상 백성들을 수탈하는 지배자의 노릇을 했으므로, 사람들이 이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 라고 지적하고 계신 듯합니다만 문제는 조선이라는 '수탈자'의 자리를 대체한 일제는 그보다 '더 큰 수탈자'라는 걸 간과할 수 없겠죠.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자영농 비율, 빈곤층 비율, 아사자/병사자의 숫자, 혹은 실질적인 생산 계층으로부터 세금이나 기타 징납의 형태로 차압된 자원의 규모, 이 모든 것을 비교하더라도 지적하신 내용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일제 강점기 이후 조선 때보다 살기가 편해졌다, 혹은 먹고 사는 데에 좀 더 나아졌다는 점을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상황이어야만 하겠지요. 더군다나 망한 대한제국을 되살리자는 취지에서의 독립운동, 즉 '복벽주의' 경향은 1919년의 3.1 운동을 기점으로 사실상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병탄 이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지향점은 조선에 대한 복권이 아니라, 일본의 치하로부터 벗어나서 '20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게 됩니다. 즉, 이전에 있었던 '망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도 싼' 나라였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과연 한반도를 일본이 점령한 채 조선인을 지배하는 상황 자체가 정당하느냐를 따지게 되었단 거지요. 망해버린 건 조선이라는 '왕조'이지 백성 그 자체가 아니므로 그들에겐 별 상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에서는 그저 '백성'에 불과했던 이들이 '국민'으로 거듭나면서 '민족'과 '민족국가(Nation-State)'에 대한 자각을 가짐으로써 이러한 일이 가능해졌던 겁니다. 3.1운동 당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것도 이런 이유지요. 병탄 후 10년 사이에 이미, 사람들은 '백성'이 아닌 '국민'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느냐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사실 '백성'에서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일에 대한 자각은 이미 1890년대 후반부터 있어왔습니다. 소위 '계몽운동'이라 불리우는, 당대의 지식 전파운동이 삼고 있는 최대의 목표가 그것이었으니까요. 즉 일찌기 외국서적이나 선교사, 유학 등을 통해서 '국가'라는 개념에 눈뜨기 시작한 지식인들이 아직 '백성'으로 남아있는 이들을 '국민'으로 '개조'하고자 했던 프로젝트가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입니다. 이미 1900년대의 사람들은 '국가'라는 말을 쓸 줄 알았고, '애국'과 '국민'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중요하다는 것 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대한자강회월보> 등을 일독하시면 아실 수 있을 테구요, 이런 애국계몽운동이 1910년의 강제병탄으로 인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퍼진 '계몽'의 정신이 결국 이후 계속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독립/자강운동으로 꽃피게 되는 것이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수준을 지나치게 얕잡아(?) 보신 게 아닌가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역사라는 것이 언제나 일정하게 '발전'해간다는 환상을 품고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낮은 수준의 지식/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국가'에 대한 토론의 수준은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국가관보다도 나으면 나았지 모자란 수준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왜놈'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런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땅을 빼앗기고 재산마저 빼앗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공분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는 점 또한 생각해보셔야 할 겁니다. 다만, 법치가 사라진 곳에는 총칼이 앞서는 법인지라, 무력을 앞세운 철권통치 앞에서 감히 '일제는 물러가라'라고 아무나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 또한 생각해두어야 하겠지만 말이죠. 일제강점기의 상황에 그저 순응하고 살아간 것이 죄랄 수도 없지만, 그저 순응하고 살아갔다고 해서 그에 대한 역사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더군다나 박정희라든지 백선엽이라든지 이광수라든지 이근석이라든지 혹은 또다른 누구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백성'도 아닌, 말마따나 '사회 지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의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네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공과 논쟁은, 그네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으로 일제에 대한 협력 내지는 순응을 택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협력/순응의 결과로 해방 이후 그들의 행보가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이런 사항들을 '책임'의 무게와 치밀하게 비교해가면서 따져봐야만 할 문제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