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좌파는 단지 좌파일뿐 2009-04-02 464 진보는좌파다 진보·정의·민주.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좋은’ 개념의 단어들이다. 이걸 반대하면 퇴보(혹은 수구꼴통)·부정·반(反)민주가 된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이런 좋은 단어들을 쓰고 있는 단체와 조직들은 정말 진보적이고, 정의롭고, 민주적일까. 이에 대해 보수우파 논객 중 하나인 서울대 박효종(62)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2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정명(正名) 토론회’란 조금 생경한 제목의 세미나에서 기조발제를 한다. ‘올바른 이름’을 요구하며 그는 묻는다. “진보좌파라고 하는데, 한국의 좌파가 진짜로 진보란 말인가.” 박 교수가 보기에 좌파 세력은 교묘한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하고 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민주니 정의니 하는 단어들을 앞세워 반대 진영을 비민주와 부정의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 교수는 그동안 성역처럼 여겨져 왔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대놓고 거론했다. 지난해 4월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을 신앙의 이름으로 단죄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박 교수는 이걸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이름과는 달리 편협한 시각으로 정치적 쟁점을 바라보며 ‘대의’와 ‘절대선’을 독점한 것처럼 정부의 특정 정책을 ‘신앙의 이름’으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이어 “이런 태도는 ‘신앙’이란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신성모독’ 행위”라고 비판했다. 박 교수의 지적은 가볍지 않다. 그 자신이 가톨릭대 신학부 출신으로 부제(副祭) 서품까지 받은 ‘친(親)가톨릭 인사’다. 그의 친형은 가톨릭 신부라고 한다. 박 교수는 또 “‘참교육’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전교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짓교육’을 부르짖는 사람들처럼 간주된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단어 독점’은 많다. 가장 오용되는 단어는 진보다. 사실 진보라는 단어는 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데올로기와는 별 상관이 없다. 소련에선 구체제를 지키려는 공산주의자가 ‘보수’였다. 공산주의 해체와 시장경제를 주장한 이들이 ‘진보세력’이었다. 따라서 진보우파, 보수좌파라고 부르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선 ‘진보=좌파, 보수=우파’라는 개념이 별 이의 없이 통용돼 왔다. 박 교수는 “친북 좌파처럼 진보하지 않는 세력, 세계사적 흐름에 역행하고 문명사적 가치에 둔감한 세력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피땀 흘리며 살아온 가치에 대한 모욕”이라며 “한국사회의 이념 지형을 ‘진보-보수’가 아닌 ‘좌파-우파’로 불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소위 ‘진보 진영’은 명분과 권력을 함께 쥐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은 이동했다. 그러면 ‘보수 진영’은 권력만 탐하던 세력이었을까. 박 교수의 주장은 우파의 ‘정당성’, 보수 진영의 ‘명분’을 쌓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좌파 진영의 ‘고상한 이름 독차지하기’에 맞서 우파 세력이 선포한 ‘말들의 전쟁’이다. 그의 문제 제기를 학계와 지식인 그룹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진보 진영의 학자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보수-진보 구도가 다변화되고 재구성돼야 한다는 의견엔 동의한다”며 “그러나 좌파-우파 구도만으론 이념적 지형이 풍부해지기보다 더 협소해질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다. 박 교수의 주장이 ‘좌익’을 포위하는 색깔론 공세를 벗어나 한국사회의 협소한 이념 지형을 풍부하고 정정당당하게 만드는 전환점이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