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를 위한 변명 2009-01-06 690 유은선 2009 KBS 새 대하드라마 ‘ 천추태후 ’가 지난주 스타트를 끊었다. 새해 벽두에 시작한 공영방송의 새 대하드라마다. 한편 제작과정에서부터 워낙 다각도로 홍보활동을 한 덕택인지 1,2회 시청률은 20퍼센트를 넘는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이정도면 그야말로 쾌조의 출발이다. 뿐인가.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벌써 2,800여건의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그녀를 다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애초부터 논란이 예견되었던 인물이다. 특히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블로거들 사이에선 이미 역사왜곡 논란이 뜨겁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이 계속 된다는것 자체가 천추태후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을 더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고, 제작진은 특별히 노이즈 마케팅(논란 마케팅) 전략을 세우지 않고도 천추태후를 논란의 핵심에 갖다놓는데 성공했다. 아직 1,2회만 방영된 상태에서 속단은 성급하지만, 여하튼 천추태후가 2009년 벽두부터 뜨거운 화제가 될것 같은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1. 천추태후는 누구인가. 천추태후. 혹은 헌애왕후라 불리기도 하고 본명은 황보수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봐야 워낙 고려사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천추태후란 이름 역시 생소하기 때문에 무슨 헌애왕후니 황보수니 하는 부연설명을 덧붙여봐야 읽는이의 답답함만 더해갈뿐이다. 그러나 ‘ 목종의 어머니로 김치양과 불륜을 저질렀고,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된 여인 ’이라고 하면 그제서야 ‘ 아 ! 그 사람 ’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천추태후, 하지만 고려 5대임금 경종의 비로 소개할때는 ‘ 헌애왕후 ’라 불러야 합당할 것이다. 바로 고려 5대 임금 경종의 세 번째 황후로 왕건의 네 번째 부인인 신정황태후 황보씨의 손녀다. 964년생으로 동생 황보설(헌정왕후, 훗날 현종의 어머니)과 함께 경종에게 시집가 그녀는 제3비, 황보설은 제4비가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6년만은 981년에 세상을 떠나 헌애왕후 황보수는 17세에 과부가 되었다. 한편 목종이 태어난것은 980년의 일이니 헌애왕후가 경종의 비가 된것은 978-979년경 그녀의 나이 14-15세 정도때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2. 김치양과의 관계는 불륜인가 ? 역사는 헌애왕후 혹은 천추태후를 불륜녀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목종의 재위시절 태후가 되어 천추전을 짓고 그곳에 매일같이 김치양을 불러들여 정을 통한 이유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천추태후는 나이 15세 정도때 경종에게 시집가 얼마안가 목종을 낳았고 17세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17세면 요즘으로 치면 여고생. 한창 꽃다운 어린나이다. 17세 어린나이에 과부가 된 여인이 이후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것을 불륜이라 말할수 있을까 ? 그래서 ‘ 고려사 ’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 학자들이 주목하게 된 것이다. 실상 고려시대 여인들은 재가가 가능했고, 활동도 조선시대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인 고려 6대임금 성종(천추태후의 친오빠)도 그녀의 첫 번째 왕후도 재혼녀였다 (문덕왕후 유씨). 사실 경종이 죽은뒤 다른 남자를 만난것은 헌애왕후뿐만 아니다. 헌정왕후 역시 경종이 죽은뒤 숙부뻘 되는 왕욱과 관계를 맺었다. 헌정왕후가 헌애왕후의 동생이니 과부가 되었을시 나이는 당연히 헌애왕후보다 더 어렸을것이다. 헌데 실제 역사를 보면 헌애왕후는 불륜녀라 매도한 고려사가 정작 헌정왕후의 경우는 그렇게까지 매도하진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헌정왕후에 대해선 버드나무 밑에서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노라 슬프게 묘사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 실상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 고려 제8대 임금이 되는 현종이다. 바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천추태후를 폐위시키고 옹립한 이가 헌정왕후의 아들인 현종인 것이다. 그리고 현종시대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거란과의 3차 전쟁이 있었다. 3. 7대 실록의 비밀 천추태후가 억불숭유의 시대인 조선시대 초기 유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매도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지적되어온 바다. 또한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건의하여 성종이 유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을때, 유교계 : 불교계 혹은 신라계 : 고구려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가능성 역시 지적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고려시대의 여인은 재가가 가능했다. 조선시대 여인의 관점에서 고려시대 여인의 삶을 평가할수는 없다. 여필종부라며 아무리 어려서 과부가 되었더라도 수절을 강요했던 조선시대와 고려의 윤리관은 분명 다를수밖에 없다. 우리 한번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의 경우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재클린 역시 케네디가 암살당한후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하지만 ‘ 슬픔에 잠긴 젊은 미망인 ’을 바란 미국인들의 정서와는 달리 얼마가지 않아 재클린은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그렇다고 재클린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 마찬가지다. 천추태후. 태후가 되어서 정조(?)는 지키지 않고 다른남자와 놀아나다니. 웬지 지금의 정서로도 화가날만 하다. 하지만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고려시대엔 남편이 죽은뒤 여인이 수절을 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헌데 천추태후가 매도되고 폄하된것이 조선시대 유학자 탓이라 지적하는 이는 많아도 또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본적으로 천추태후는 강조의 정변으로 실각되었다. 그리고 천추태후와 목종을 몰아내고 강조가 세운것이 헌정왕후의 아들 현종이다. 헌애왕후, 헌정왕후. 똑같이 경종이 죽자 스무살도 채 되기전인 어린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이후 다른 남자를 만난것은 마찬가지임에도 헌애왕후는 불륜녀로 묘사되고 있고 왕욱과의 사이에서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을 낳은 헌정왕후는 버드나무 밑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은 ‘ 비극의 여인 ’으로 묘사되어있다. 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것일까. 현종4년에 현종은 태조부터 목종때까지 7대에 이르는 실록이 거란의 2차 침입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며, ‘ 7대실록 ’을 새로이 편찬할것을 명한다. 이 칠대실록은 그로부터 20년후인 덕종때 완성된다. 실제 우리나라엔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사료들이 많다. 고려실록 역시 조선시대땐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실제 거란의 2차침입때 개경이 함락된 바 있고, 따라서 그때까지의 실록이 불에 타 사라져 새로운 실록을 만들라 명한것 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연 현종때 편찬된 7대실록에선 목종대에 대하여 그리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에 대해서 어떻게 적었을까.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자신들의 정변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이전 정권을 깎아내린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고 공식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비행이 전부 거짓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은 분명 있었을것이다. 실제 강조의 정변과 그 직후 일어난 제2차 거란과의 전쟁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의혹이 많다는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글쎄, 과연 현종은 평소에 헌애왕후나 김치양에 대해 어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근본적으로 현종 자신이 강조등의 정변으로 인해 목종과 천추태후가 폐위되고 즉위한 임금이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다. 똑같이 경종의 비가 되었고, 어린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이후 다른 남자를 만난것은 헌애왕후나 헌정왕후나 마찬가지인데 헌애왕후 아니 천추태후는 불륜녀라 기록되어 있고 헌정왕후는 버드나무 가지 아래서 아이를 낳다가 죽은 비운의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수수께끼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지 않은가. 4. 폄하, 또 폄하 조선조에 만들어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근본적으로 고려실록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허나 억불숭유정책을 편 조선시대고 고려사를 만든 사람들이 유학자들이니 철저히 유교적 관점에서 역사서를 써 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여인의 정절과 절개를 강조하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인데 어린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할지라도 훗날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난 여인을 - 그것도 태후를 - 좋게 평가할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근본적으로 천추태후는 이미 7대실록에서부터 강조의 정변을 합리화 하기위해 그리고 현종이 자신의 어머니를 옹호하기 위해 목종과 천추태후는 깎아내렸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불행히도 고려실록 역시 임진왜란때 유실되어 우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로 고려시대를 들여다볼수 있을뿐 고려 당대에 쓰여진 실록의 진상은 알길이 없다. 허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천추태후는 이미 자신을 몰아낸 강조와 그 주변 세력에 의해, 그리고 헌정왕후의 아들 현종에 의해 이미 한번 격하되고,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또 한번 격하된. 그렇게 두 번, 세 번 폄하된 인물이란 것이다. 5. 역사왜곡 논란 우리가 ‘ 역사왜곡 ’이란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역시 역사왜곡 하면 제일먼저 머리에 떠올려지는게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이기 때문일것이다. 하지만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의 역사나 역사속의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나 재평가는 그러한 역사왜곡과는 다른 문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속설을 다들 한두번쯤은 들어봤을것이다. 가령 신대륙이란 표현도 따지고보면 웃기는 이야기다. 아니, 언제 바닷속에 있던 대륙이 어느날 갑자기 위로 솟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메리카는 신대륙이고, 유럽은 구대륙인가 ?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까진 그 존재를 몰랐던것 뿐인데, 신대륙 운운하는거야말로 철저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고 표현임을 증명하는것이다. 또한 춘추필법 역시 따지고보면 중국을 높이고 이민족들을 낮추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역사관임을 생각해본다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결코 호사가들의 말장난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것은 그런 측면도 있으니 그런점도 고려해서 역사를 이해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 글로써 남겨진 모든 역사서가 거짓이고 부정해버리라는 소리가 아니다. 문화예술이나 체육활동도 기본기가 중요하듯이 우선은 문서로 남겨진 역사서를 습득하고 이해한뒤, 그와같은 역사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나 책을 쓴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글로 남겨진 사서 이면의 이야기도 한번은 유추해석해 볼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무조건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니 그 자체를 전부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하튼 소위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가서 어떤 사극이든 역사소설이든 결국 창작이란 점에서 그러한 논란에서 자유로울수 없는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따져보자. 미국의 그 수많은 서부영화 역시 사실은 자신들이 멀쩡히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인디언들을 쫏아내고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은것이면서, 영화에서는 늘 인디언을 악당으로 그리고 보안관을 정의의 사나이로 그린다. 소위 서부개척이야말로 알고보면 멀쩡히 살고있는 인디언들을 쫏아낸 굴러온돌이 박힌돌을 빼낸 형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수많은 서부영화야말로 따지고보면 역사왜곡이라 말할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일본의 수많은 영화,만화,드라마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전통윤리인 사무라이 문화를 칭송한다. 하지만 사무라이 정신중 하나인 ‘ 강한자가 약한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는 논리야말로 실상 일본의 조선 지배나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을 만들어주었던 전형적인 일본 자신들의 편의대로 만들어진 논리고 정신이다. 근본적으로 역사는 인간이 쓰고 만드는것이며, 인간은 감정과 주관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씩은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하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게 역사다. 그러나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인물이나 역사속의 사건을 재조명하거나 재평가하는것은 우리가 늘상 분개하는 일본의 역사왜곡 논란 같은것들과는 분명 다른 성격과차원의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나란 애석하게도 조선시대에 대해선 왕조실록과 수많은 서책,사료가 남겨져있어 그 시절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 되지만 고려시대라던가 혹은 그 이전의 고대사는 여러차례 전란속에 수많은 사서들이 불에타 없어져 그 시절을 알수있는 사료가 빈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고려사의 기록만으론 그 시절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드라마로 써내려가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선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쓰는수밖에 없다. 6. 천추태후가 잔다르크 ? 앞에서 이미 길게 설명한바와 같이 고려사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다. 그러나 고려는 여인의 재가가 가능한 시대였으며 무엇보다 스무살도 채 되지않아 과부가 된 여인이 나중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것을 불륜이라 말할순 없는것이다. 지금의 잣대에서 생각해볼땐 아무런 문제될것이 없는일 아닌가. 마치 충신은 불사이군인 것 처럼 열녀는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윤리관을 강요했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기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를 불륜이라 매도했던 것이다. 오히려 고려 성종조야말로 유교 : 불교 혹은 고구려계 : 신라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가능성이 높은 시대며, 따라서 천추태후 역시 그와같은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측면에서의 조명은 분명 의미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 천추태후 ’의 경우 오버가 지나치다. 심지어 천추태후가 직접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거란과의 전쟁에서 일선에서 뛰지 않는가 ? 한술더떠 천추태후 PD는 천추태후를 한국판 ‘ 잔다르크 ’로 묘사하겠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이지 역사왜곡이란 지적을 피하기 힘들것 같다. 하지만 네티즌들이여 ! 아는가 ? 사실 잔다르크야말로 나폴레옹과 그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필요이상 왜곡,과장된 인물이란것을. 알고보면 잔다르크야말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하고 프랑스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철저한 과장의 산물이다. 실상 잔다르크는 프랑스인도 아니었으며, 백년전쟁에서 활약상도 미미한 것이었다. 좀 가혹하게 말하면 - 아니, 이게 더 사실에 가깝다 - 철없는 10대 소녀 하나가 어느날 갑자기 뭣도 모르고 날뛰다가 영국군에 붙잡혀 화형을 당한 그런 인물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잔다르크를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영웅쯤으로 알았다. 심지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관순 열사조차 잔다르크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몸소 3.1운동때 아오내장터 만세사건을 주도했다고 했던가. 천추태후를 잔다르크처럼 묘사하면 대형 사기극이라고 ? 사실 알고보면 잔다르크야말로 프랑스가 아무것도 아닌 철딱서니 없었던 10대 소녀 하나를 - 어찌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여자아이였는지도 모른다 -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묘사 전세계를 농락한 초대형 사기극이었다. 어릴때부터 역사드라마를 보다보면 참 창피하단 생각이 들었다. 실제 역사시간도 중국만을 섬겨온 굴욕의 조선왕조도 수치스러웠고, 삼국시대의 지도를 펼쳐보면 차라리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그런 아쉬움도 가져보았지만, 그보다 더 사람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던건 사극들이었다. 늘 나오는것은 당파싸움 아니면 형제간,골육간에도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거듭하는 권력다툼. 양반은 늘상 힘없는 백성이나 노비들을 괴롭히고. 그것이 TV 드라마에 나오는 우리의 역사였다. 특히 여자입장에서 보는 사극은 늘 굴욕이었다. 사극속의 여자는 늘 후궁들의 암투 아니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지 못해 안달난 모습. 그게 아니면 임금의 사랑을 받지못해 밤마다 허벅지 찌르며 눈물흘리는 모습. 소설가 이문열의 말처럼 여성들은 현실정치에 몸담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한번 권력을 잡게되면 겉잡을수 없게되는 것인지...사극에서 보는 여성들은 언제나 나 자신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게 TV 드라마란게 생기고 지난 수십년간 사극에서 보여줘온 우리네 역사고 사극에서 보여준 과거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헐리웃 영화는 사실은 멀쩡한 인디언 몰아내고 자기네들이 미대륙을 차지한 강탈의 역사임에도 서부영화에서 백인들을 늘상 영웅으로 그리고, 일본의 그 수많은 만화,영화,드라마들도 자신들의 사무라이 문화를 한껏 미화하는데. 왜 우리에겐 영웅사극이 없는가 ?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뿌듯하게 여길수 있는 그런 영웅사극 하나쯤 만들면 안 되는가 ?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인물이 없으면 자신이 인물이 되라고도 하셨다. 정 영웅이 없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하면 안 되는가 ? 프랑스는 일개 철딱서니 없는 계집아이에 불과했던 잔다르크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냈다. 그래, 좋다. 그런식으로라면 우리도 역사속의 한많고 사연많았던 숨겨진 여성 하나를 끌어내 영웅으로 만들지 못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 7. 수출하면 나라망신 ? 천추태후 홈페이지에 보니 어떤 네티즌이 이런 게시물을 올린게 보였다. 혹시 수출할거냐고. 제발 수출하지 말라고. 이런 역사왜곡(?) 드라마를 수출한다면 그건 진짜 나라망신이라고. 글쎄, 뭐가 진짜 나라망신인가. 사실 한류가 지금은 쇠퇴기에 접어들어 우리나라 드라마가 제대로 팔릴지, 더욱이 천추태후처럼 생소한 역사속의 인물을 묘사한 사극이 팔리기나 할지 그 자체가 의문이기도 하지만. 과연 천추태후가 수출하면 나라망신인 사극인가 ? 중국이 징기스칸 드라마를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아니, 어떻게 징기스칸이 중국의 역사일수가 있나 ? 실상 몽골의 역사가 되어야 이치에 맞는게 징기스칸 아닌가 ? 헌데도 중국은 뻔뻔스럽게 징기스칸을 자국의 드라마로 만들어버렸다. 몽골의 역사를 드라마에서 자기네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미국 헐리웃 서부영화가 어떤 영화들인지야 이미 앞에서 수차례 언급했으니 구태여 또 언급할 필요 없을것 같고, 일본은 또 어떤가. 일본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던 한 우리나라 여배우가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일본 극우의 시각을 담은 영화라 출연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었던게 한 몇 년전 일이다. 일본 극우영화란 ? 두말할것도 없이 대동아전쟁이라던가 남경 대학살. 그렇게 자기네가 남의나라를 침략한 역사를 지네들 관점에서 한없이 미화한 역사왜곡 영화들이다. 헌데 일본은 낯짝도 두껍게 그런 영화를 지금도 수도없이 만들어내고 심지어 수출까지 한다. 심지어 헐리웃에 자본을 대 헐리웃을 통해 자국 역사를 미화한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도 한다. 그에비해. 솔직히 천추태후가 미화되어 피해보는 나라가 누가 있나 ? 중국이 피해를 보나 ? 일본이 피해를 보나 ? 몽골이 피해를 보나 ? 아니면 베트남이나 태국,미얀마,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 기타 등등 대체 어느나라가 피해를 보나 ? 사실 난 천추태후 수출에 대해선 오히려 다른 시각의 걱정을 한다. 일단 한류가 쇠퇴기란 점에서 우리나라 드라마 수출이 예전처럼 상종가를 달리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생소한 인물인 천추태후, 그것도 80회에 달하는 장편 드라마가 제대로 팔리기나 할지. 주몽도 죽쑨판에 과연 천추태후가 팔릴까 오히려 그걸 걱정한다. 프랑스는 철없는 10대소녀 잔다르크를 한없이 미화 전 세계를 기만했다. 또 미국이나 일본이 자기나라 역사를 미화한 사기영화, 사기 드라마는 좀 많은가. 유럽의 강대국들은 또 얼마나 많은 역사 사기를 쳤나. 그런것들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천추태후는 애교수준이다. 설사 천추태후가 수출된다 하더라도 기껏 한국 드라마 빠돌이가 된 한류팬들만 좀 속여먹을 뿐이다. 오히려 정작 나라망신은 ‘ 조강지처클럽 ’이니 ‘ 내 남자의 여자 ’같은 막장 드라마 만들어놓고 그걸 수출해놓고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그런 방송사, 그런 제작사가 진짜 나라망신인지도 모르고 으스대는 돌머리들이다. 8. 만약, 김치양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면 ? ‘ 슬픈궁예 ’란 책을 써낸 역사학자가 있다. 요지는 왕건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폐위되고 역사엔 폭군으로 묘사된 궁예에 대한 옹호로.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관점에서 475년간 이어간 왕조 고려를 창시한 태조왕건. 그 왕건이 폐위시킨 궁예였기에 폭군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픈 운명을 이야기한 책이다. 왕건에 의해 폐위된 너무나 짧았던 왕조 후고구려 혹은 태봉. 그리고 폭군으로 묘사된 궁예. 그래서 ‘ 슬픈 궁예 ’라면 나는 천추태후야말로 ‘ 슬픈 천추태후 ’라 말하고 싶다. 아니, 구체적으로 따지고보면 천추태후의 삶은 궁예의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애닳다. 10대의 어린나이에 경종의 세 번째비가 되어 애정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아들 목종을 낳았다. 그러나 경종이 제위 6년만에 승하함으로 인해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된 천추태후. 17세의 과부다. 요즘같으면 여고생 나이일때다. 친구들과 떡볶이, 순대 사먹으며 수다떨 나이고,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오빠 콘서트 쫏아다닐 나이에 17세 황보수는 핏덩이 아이를 품에 안은채 과부가 되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남자를 알아갈 나이가 되었을때 만난것이 김치양이다. 다시한번 묻겠다. 이래도 천추태후를 불륜녀라 할 수 있는가 ? 거듭말하지만 10대 어린나이에 경종의 비가 되었다가 얼마안가 과부가 되었고, 그리고 그 뒤에 새로운 남자를 만난것은 헌애왕후도 헌정왕후도 마찬가지다. 헌데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된 천추태후는 희대의 불륜녀로 낙인찍혔고,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의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버드나무 가지 아래서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물론, 김치양과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자. 불행히도 목종이 동성애자였다. 그나마 경종이 유일하게 세상에 남긴 핏줄이 목종인데 그 목종이 동성애자인 것이다. 후사를 이을수 없는 임금이다. 한번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 만약 당신이라면 이럴때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임금인데(-.-), 불행히도 동성애자라 후사를 이을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글쎄, 만약 김치양의 아들이 왕이 되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갑자기 중국의 ‘ 삼국지연의 ’ 전문 연구가라는 이중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난다. ‘ 솔직히 천년뒤에 우리가 위나라가 통일을 했든 촉나라가 통일을 했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만약 촉나라가 통일했다면 우린 후한의 뒤를 이은 촉한을 추가로 공부하고 있었을것 ’ 마찬가지다. 설사 김치양이 왕이되어 새로운 왕조가 생겨났다할지라도, 그렇게되면 우린 80년만에 무너진 고려왕조와 새롭게 일어선 새 왕조를 기억하게 되었을것이다. 글쎄, 만약 80년만에 고려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들어섰다면 그때 역사는 80년 고려왕조를 어떻게 평가하게 되었을까. 9. 천추태후의 눈물은 아름다웠을까. 헌애왕후,헌정왕후. 똑같은 삶이였다. 10대 어린나이에 경종의 비가 되었고 경종이 일찍 승하하여 열일곱살도 채 되기전에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뒤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상대는 김치양이었고 헌정왕후의 상대는 숙부뻘인 왕욱이었다. 헌애왕후도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고, 헌정왕후도 왕욱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폐위되고 그녀는 희대의 불륜녀로 역사에 낙인찍혔다. 그러나 고려 제8대 임금 현종 - 바로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 의 어머니가 된 헌정왕후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현종을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거꾸로 헌정왕후는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천추태후의 후예가 집권을 했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또 황보수(천추태후,헌애왕후)와 황보설(헌정왕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단순히 호사가의 말장난만은 아니라는것을 생각게해보는 상황이다. 헌정왕후의 자손들은 이후 조선이 건국되는 1392년까지 390여년간 고려를 지배하게 된다.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적 윤리관의 잣대를 천추태후에게 들이대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힘겹고 지치는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영조는 66세의 나이에 15세 정순왕후를 중전으로 맞이했다. 선조도 무려 61세의 나이에 19세 여인을 새 중전으로 맞이했으며 그녀가 바로 인목대비다. 인조도 44세의 나이에 15세 계비 장렬왕후를 맞이했으며, 심지어 숙종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그 파란만장을 겪은뒤에 또다시 15세의 인원왕후를 40대의 나이에 새 중전으로 맞이했다. 국모의 자리는 한시도 비워둬선 안된다는 논리아래 임금의 나이가 40이건 50이건 60이건 간에 스무살도 채 안된 어린여자를 새 중전으로 맞이하게 한게 조선의 대소신료들이다. 참으로 희안하게도 하필이면 조선시대는 후반으로 갈수록 나이많은 임금이 딸이나 손녀뻘 되는 어린 새 중전을 맞이한 사례가 많다. 어디 임금뿐이랴. 신하들또한 집안에선 딸이나 손녀뻘 되는 희첩을 얼마나 거느렸던가. 그래놓고서 여인에겐 한결같이 수절을 강요했던 그것이 조선의 지배계층 남자들이다. 이제 다시 고려시대로 돌아가 열일곱살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된 천추태후 아니 한 여인 황보수의 눈물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요즘시대라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자가 나중에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될 일이 없다. 그것을 비난할 사람도 없다. 고려시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열녀비를 세우기까지 하며 여인의 수절과 정절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의 윤리관이 존재했던 시절이 아니란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천추태후에게 천년동안 박힌 ‘ 불륜녀 ’란 대못은 뽑아줄때도 되지 않았는가.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되어 역사의 패자가 되어 천년동안 불륜녀의 낙인이 찍힌채 살아온 그녀 천추태후, 아니 한 여인 황보수. 17세에 과부가 되고 그 이후 남자를 알만한 나이가 되어 새롭게 나타난 인연 김치양. 지금의 잣대로 생각해보면 전혀 불륜일수가 없는 관계임에도 역사는 어이없게도 천년동안 그녀를 불륜으로 낙인찍고 천년세월을 죄악의 가시덤불속에 팽개쳐놓았다. 이제 그녀의 이마에 찍힌 낙인을 지워주자.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주자. 천년의 세월동안 불륜녀로 각인된 황보수. 그녀의 눈물을 이젠 이해해 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