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친북 2008-08-03 731 인문학도 21세기에 있어서 "빨갱이"를 운운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는, 남북관계의 본질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친북'과 '진보'를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하는 보수우파 내부의 철저하지 못한 인식론 상의 한계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좌파=공산주의'이며 '공산주의=친북'이라는 등식을 상당부분 전제에 깐 채로 좌파와의 이론 투쟁에 돌입하기 때문에 번번히 깨지는 것이지요.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라고 했는데, 상대방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이 철저하지 못하니 우스꽝스러운 지경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님께서 글 첫머리 즈음에 현재 진보좌파의 근원을 주사파로 비정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만, 죄송스럽게도 이것만큼 현재 보수우파의 인식론적 한계를 잘 보여주는 지점은 없다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주사파 즉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1960년대 당시 중공과 소련의 국경 대립으로부터 비롯된 코민테른의 실패, 즉 공산주의의 내적 통일성이 흔들리는 것을 기점으로 모색된 북한 특유의 사상체계입니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네 김일성-김정일의 권력 승계구도를 공고하게 하고자 했던 김일성 자신의 권력욕이 투사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지요. '사상'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논리로 구성된 체계입니다. 북한에게는 북한의 상황이 있으니 이것은 중공이나 소련의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북한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인민상(人民像)의 구현이 필요한데, 이러한 것을 가장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는 것이 김일성이다, 따라서 북한 인민들은 김일성을 좇아서 이러한 인민상을 구현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게 그 골자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을 가장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므로 그의 능력을 가장 잘 승계한 인물로 꼽은 것이 김정일이구요. 쉽게 말해서 북한의 독재권력 체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주체사상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대한민국으로 유입된 것은 대략 1990년대 초반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실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사생아'와도 같은 것이 주체사상인데, 이를 받아들인 일부 대학생들은 이것을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선언' 정도로 이해했지요. 아니, 이해했다기보다는 '감성적으로 공명'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주체사상이 등장하게 된 기본 배경만 알고 있었더라도 이것이 민족을 기반으로 한 사상 체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잖게 간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때문에 당시 진보좌파 내에서도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이 일부가 '전위'에 나섰다는 것이고, 이러한 전위를 방치한 것이 한총련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한마디 님이 제기하신 인식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북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더더군다나 이 '주사파'라는 것은 일종의 사생아에 불과합니다. '친북' 내지는 '종북'에 대해서 과민하리만치 자기 검열을 보이는 쪽은 사실 보수우파보다는 진보좌파쪽이었기 때문이죠. 진보 계열은 이미 6~70년대 군사독재 체제와의 대결을 겪으면서 '진보=좌파=친북'이라는 등식에 혹독하리만치 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북'으로 규정되는 순간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대중으로부터도 유리된다는 것을 수차례의 피맺힌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일은 6~70년대를 거치면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심지어는 문학판에서조차도 왕왕 발생한 바 있습니다. 소위 '순수-참여논쟁'으로 정리되는 당대의 문학 이론 논쟁에서 문학의 사회참여적 기능을 부정했던 순수문학파가 참여문학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내놓았던 논리가 바로 '친북좌파'에 대한 의문부호였죠. 당연히 참여문학 쪽은 이에 대해서 극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보수우파보다도 더 강력한 자기검열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진보좌파의 '본진'이 주체사상을 받아들였으리라는 생각은 순진한 겁니다. 누가 봐도 뻔하디 뻔한 함정에 빠질 정도로 바보였다면 좌파라는 이름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사라졌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 참여문학론자들에게 색깔론을 뒤집어씌웠던 대표적인 논자가 바로 김동리와 서정주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서정주는 일제 말기에 가미카제(神風) 공격대를 찬양하는 시를 썼던 것이 알려지는 바람에 한동안 친일문학자 논쟁에 휩쌓였던 경력이 있다는 점도 재미있죠...) 문제는 아직까지도 보수우파 내에서 '진보=친북'이라는 등식에 공명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번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버리고 말았지요. 생명윤리나 보건, 환경 등의 테제에 대하여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계열의 목소리에 대해서 '친북좌파'라는 레테르를 달아버리는 바람에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되고 만 겁니다. 더군다나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거치면서 보수우파에 의해 친북단체로 몰리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알고 있는 진보좌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 이미 내부검열을 마치고 전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 보수우파가 친북 문제를 걸고 넘어지려고 하니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긴, 보수우파 입장에서는 지난 수십 년 간 너무나 간편하게 써왔던 무기가 '색깔론'이기 때문에 쉽게 놓아버리기 힘든 매력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재미있는 사실은, 90년대 당시 소위 '주사파'로 일컬어졌던 아방가르드avant-guard 좌파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현재 '전향'이라는 것을 거쳐서 뉴라이트와 같은 보수우파 계열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혀 보수우파 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놓곤 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지요. 반면 보수우파에 의해 친북이라는 의혹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진보좌파는 오히려 내부의 종북적인 경향에 대해 날을 세워가며 비판하는 경향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과거 NL과 PD계열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이 다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으로 분화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현상의 한 부분입니다. 이번 금강산 사태 때 가장 먼저 대통령의 '대북대화' 발언에 날을 세우며 비판한 것이 진보신당과 자유선진당이었다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지요. '진보=친북' vs '보수=반북'이라는 색깔 모델은 현재의 사회현상들을 설명하기에는 이미 낡은 모델이 되었다고 비판받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