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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촛불을 들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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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이 모 프로그램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어이없는 발언을 했다. 박왕자 씨 피격 사건에 대해서는 촛불을 들지 않는 시위대는 정치적으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금강산 사건 발발 초창기부터 몇몇 보수 논객이나 일부 언론에서 제기했던 것이므로 내용 자체가 놀라울 것은 없다. 다만 내가 놀라운 것은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올해 5월, 쇠고기 문제로 터져나온 촛불집회는 대한민국의 대의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민의 투표로 수립된 정부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않고 쇠고기 졸속 협상에 나섰던 것이 그 시초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결국은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사안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어야 할 여당은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우기에 바빴고, 이 와중에 또다른 대의민주주의 기관인 국회는 상당기간동안 개원조차 하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문을 열고 쇠고기 협상에 관련된 국정조사를 진행중이지만, 이 역시 정부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여야 간의 정쟁에 휘말려서 국민의 '알 권리'를 제대로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애초에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도입된 것은 모든 국민이 모든 국정 운영에 대해서 참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진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쇠고기 협상이나 독도 문제와 같은 사안들이 터질 때마다 국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설 수는 없는 것이므로, 투표를 통해서 국민의 대표자를 선발하고 이 대표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들을 전담하여 처리하도록 일종의 '분업화'를 시도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애초에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뛰쳐나올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쇠고기 협상이 졸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전에 국민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서 차근차근히 진행되었더라면 촛불 정국으로 인해 상당기간 국력을 낭비하는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박왕자 씨 피살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방식이 적용될 것이다. 현 상황에서는 일단 정부가 외교 루트 등을 통해서 진실을 규명하고 북한의 비인도적인 행태를 비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상적인 수순이다. 그리고 국회는 입법부로서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해 감시하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이 잘 처리된다면 굳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사안에 대해서 국민들이 거리의 정치를 주장하며 나서는 것은 쓸데없는 체력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국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공중파 방송에서 '박왕자 씨 문제에 대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니 이 어찌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현재 정부나 국회가 박왕자 씨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국회의원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배운 염치인지 '나서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변질된 것'이라며 국민을 협박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웃지 못할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물론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할 지 모른다. 효순/미선 사건 당시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번에 들지 않는다면 배후에 뭔가 정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당시 효순/미선 사건에서 촛불이 타올랐던 것은, SOFA 협정으로 인해 해당 사건의 피의자인 미군 병사들을 제대로 사법처리조차 할 수 없는 정부의 무기력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일 당시에 정부가 해당 사안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면 애초에 촛불 자체를 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대처한다면 굳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과거 효순/미선 사건 때처럼 무능하고 안일한 대처로 일관한다면 시민들은 또다시 촛불을 들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 시점으로서는 아직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번 공성진 의원의 발언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의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인 듯하여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다. 색깔 뒤집어 씌우기와 정치적 공세에 눈이 멀어서 대의민주주의의 꽃인 국회의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회의원의 입에서 자기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의 책무를 방기하는 발언이 나온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만일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제대로 된 소양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번 문제에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백번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 의원은 촛불시위에 색깔을 입히는 일에 몰두하여 자신의 직분까지 잠시 망각하고 말았던 것인가 보다.
이것이 차라리 어느 한 두 의원의 실수 내지는 잘못된 생각이라면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현재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생각이라면 그야말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국회의원마저 대의민주주의를 우습게 아는 현 상황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가. 원칙 없는 정부, 원칙 없는 정당이 이제는 나라의 근간까지 흔들려고 하는 것인지, 자꾸만 섵부른 패시미즘을 품게 만드는 작금의 상황에 그저 쓴 웃음만 나올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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