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을 성실히 읽는 것도 토론의 기본입니다. 2008-07-15 1052 인문학도 보수와 진보를 양분하여 선과 악의 대립 관계로 파악하는 건 오히려 이상돈 교수님이 지양하시는 바라고 읽힙니다. 물론 이상돈 교수님이 대한민국 좌파/우파 구분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계신 대북 정책의 도덕적 등가성의 문제, 즉 대한민국 헌법에서 이미 한반도 내의 합법적인 정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을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정하는 좌파의 대북 접근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계신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를 선이냐 악이냐의 문제로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건 비약의 여지가 많습니다. 사견입니다만, 아마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선생님이 종종 언급하시는 레이건 정권의 사례, 즉 구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지칭하면서 미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각인시켰다는 사례 때문에 선악의 대립구도로 파악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보수가 견지할 수 있는 핵심가치, 즉 '도덕'이나 '윤리'와 같이 보수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가치들을 효과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레이건 정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효과적인 보수 정권이 될 수 있었는지를 말하기 위한 사례 제시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레이건 정권이 구 소련을 '악'이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소련과의 모든 합리적인 대화나 교류를 거부했던 것도 아닙니다. 즉 레이건 정권의 '악마의 제국'에 대한 발언이란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 논리로 작용했다기보다는 대내적으로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고 미국과 우방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봐야 하겠죠. 사실 저는 대북문제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기준에 따른다면) 좌파 쪽에 속한다고 봐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의 주장이 좌파와 대화 불가능한 배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좌파 내에서도 종북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높으니까요.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갈라서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도 민노당의 핵심 세력인 NL계열의 종북주의적 성향에 대한 PD계열의 비판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햇볕정책'의 기본 기조인 정경분리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경제적 변혁을 통해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전략 차원에서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즉 북한 내부의 중산층 세력을 키우고 현재 노동당의 간부에 해당하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자본가'로 유도함으로써 북한의 사상적 경직성을 약화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도를 넘어서서 북한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보수우파의 비판에 동조하는 쪽입니다. 지난 10년간의 햇볕정책은 분명 이러한 함정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말씀하신 경제 관념에 대한 지적도 그렇습니다. 소위 '중산층'이라고 자칭하는 정치적 회색지대의 양면적 태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던 겁니다. 즉 겉으로는 일부 부유층의 소비 행태를 손가락질하면서 정작 속으로는 자신들 역시 그러한 부유층이 되어서 똑같은 행태를 소비를 하고 싶어하는 의식의 이중구조 말이죠. 서구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영국의 경우에는 자신의 계층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뭉쳐서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노동자든 농민이든 자신의 계층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계층을 '부정'하고 상위 계층으로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무척 강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각각의 계층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의 미성숙도 원인이 되겠습니다만, 단순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외치며 상류층에게만 도의적인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뉴스를 보면서 재벌들의 소비를 사치라고 손가락질 하면서도, 정작 거리에 나서면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며 자기 자식에게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교훈이랍시고 이야기하는 대한민국 중산층의 허위 의식은 충분히 지적될만한 사항이고, 이에 대한 비판은 한국 내에서는 오히려 보수우파보다 진보좌파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바 있습니다. 이 점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보수우파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일부 파렴치한 상류계층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 역시 다분히 비약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상대방과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서 상대방의 주장을 재단해버리면 토론을 위한 기본적인 접점 자체가 마련되기 어렵습니다. "보수는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한다"는 선입견부터 일단 탈각하신 뒤에 선생님의 글들을 차근차근히 읽어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