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이의 우량만화론을 회상하며
2010-02-01 654 유은선

“ 자꾸 우량만화, 우량만화 하는데 대체 뭐가 우량만화란 소리냐 ? 무슨 아이
들 공부에 도움되는 과학학습만화쯤 되어야 우량만화라는 이야기냐 ? 내가
그리는 작품들이야말로 요즘 우리 아이들의 일상을 그대로 담은 진짜 우량
만화다 !!! ”

30년전 단행본으로 발간된 어떤 만화책의 서문에서 짧은 글이지만 제법 강렬하게 당신의 우량만화론을 역설하신 분이 계시다. 바로 ‘ 꺼벙이 ’의 작가. 엊그제 작고하신 고 길창덕 선생님.

지난 반세기 넘게 한국사회에서 만화가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자면 별도의 글 한편을 다시 써야할판이니 생략하기로 하자. 이웃 일본이 지난 수십년 세월 ‘ 만화왕국 ’의 위상을 단단히 구축해놓았을 정도로 만화의 천국인 반면 우리나라에선 ‘ 아이들이나 보는 ’ 또는 저질.퇴폐란 수식어가 늘상 따라붙던. 문화예술장르중에서도 가장 천시받던 장르가 아마 만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우리나라 방송 초창기엔 어린이 방송시간대를 마땅히 채울만한 콘텐츠가 없어 그 대다수를 일본만화를 수입해 방영하곤 했던 실정이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법 점잖은 문사들이 ‘ 일본만화에 우리 어린이들 정서가 물들어간다 ’고 한마디씩 하곤 했으니 대체 그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어쨌든 7,80년대 그렇게 일본 만화영화건 국산 만화책이건 그 만화들을 보며 자란 세대도 어느덧 3,40대가 되었다. 요괴인간이니 은하철도 999니 하는 TV에서 방영하는 일본 만화영화와 함께 이제는 어린시절의 추억으로 자리잡은것이 길창덕,윤승운,신문수,이두호,이정문 같은 이름만 들어도 향수가 느껴지는 그분들의 만화였다.

특히 길창덕 선생님의 ‘ 꺼벙이 ’나 윤승운 선생님의 ‘ 꼴찌와 한심이 ’ 같은 만화들은 대개 ‘ 명랑만화 ’로 분류되었다. 글자그대로 평범한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7,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수 있었던 그 당시 아이들의 일상을 그대로 그려낸. 그게 꺼벙이고 꼴찌와 한심이였고 재동이였고 딸딸이었다.

특히 꺼벙이는 70년대 대표적인 어린이 명랑만화로 꼽는데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꺼벙이는 그 무슨 학습만화 같은데서 종종 해설따위를 담당하는 우등생이나 범생이 캐럭터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와 시험지를 숨기다가 아버지한테 걸려 회초리를 맞기도 하고, 그러다 또 때론 제법 결심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다 코피를 쏟기도 하고, 동네 꼬마아이들한테는 종종 골목대장 노릇도 하다가 또 어떨땐 덩치좀 큰 형아들한테 얻어맞고 들어와 울기도 하는. 그렇게 7,80년대를 함께 보낸 나였고 너였고 바로 우리들이었다.

- 솔직히 오히려 그당시 출간되던 이런저런 학습만화류야말로 지금화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나오는 학습만화들을 대충 날림으로 번역해 국내에서 출판한
게 아닌가 의심되는것들이 많다. 가령 그림에 버젓이 일본글씨가 나온다던가
엉뚱하게 우리나라 지명을 설명하지 않고 일본지명을 설명하는 오류가 종종
있었다. 요즘식으로 비유하면 공부의신에서 서울대가 나오지 않고 동경대가
나오는 것 같은 황당 시츄에이션이라고나 할까.

어쨋든 엊그제 한국 명랑만화계의 대부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길창덕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81세. 80년대에 종종 TV 프로그램 인터뷰에 나오실때도 생각보다 꽤 연세가 많은것에 놀라곤 했었으니 81세란 현재 나이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이제 선생님께선 당신이 만드신 꺼벙이,고집세,딸딸이,쭉쟁이등 수많은 자식(?)들과 그리고 그 아이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이 땅의 3,40대를 뒤로 하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셨다.

꺼벙이들과 함께 자란 아이들은 어느새 3,40대 집에 이제 꺼벙이나 고집세만한 아이 한둘쯤 둔 나이가 되었는데 책장 깊숙한곳에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만화책속의 꺼벙이는 아직도 천진난만한 초등학생 어린아이다. 확실히 꺼벙이는 우리처럼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낸 아이다. 하긴 그러고보니 꺼벙이땐 초등학교가 아니고 초등학교였다. 꺼벙이는 알고 있을까. 30년이 지난 지금의 아이들은 인터넷을 하고 휴대폰으로 제 여자친구와 제법 의젓하게 사랑의 메시지까지 주고 받을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꺼벙이는 그 시절에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30년후의 우리나라는 드라마나 영화,대중음악등이 동아시아인들의 사랑을 듬뿍받는 문화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유니버시아드대회(70년대)에서 우리나라 농구선수단이 장신 외국 선수에 밀려 동메달에 그친것에 애통해하던 꺼벙이는 30여년이 지난후엔 김연아란 늘씬한 서구 미녀들 부럽지 않은 국민요정이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다는것을. 그 시절 꺼벙이야 꿈도 꿀수 없었을 일일것이다.

여하튼 이제 꺼벙이를 만들어 놓으신 이는 영원히 우리곁을 떠났다. 언제까지나 우리곁에 있을것만 같은 마음속의 선생님이었고 옆집 아저씨나 삼촌처럼 친근했던 그분도 어느덧 81세를 향년으로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나신 것이다.

대체 요즘 아이들은 무엇을 즐기며 무엇으로 훗날 추억을 삼을까.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되는걸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행여 인터넷으로 벌써 성인 동영상이라도 접속하는것은 아니겠지. 제 짝궁이랑 TV 드라마에서나 볼듯한 제법 의젓한 사랑의 메시지까지 휴대폰 문자메세지로 주고받는 것을 보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 많이들 컸다. 동네 꼬마아이들이랑 축구,야구하며 놀고 예쁜 여자아이 지나가면 괜시리 심술궂게 놀리고 울리곤 하던 우리때에 비하면 참 많이 성숙했다. 그러고보니 또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 요즘아이들에겐 딱 그 아이들만한 명랑만화를 그려주는 이가 없는것 같아서. 인터넷 웹툰을 보아도 대개는 성인을 대상으로한 소재들 투성인데. 요즘 아이들에겐 정말 꺼벙이 같은 추억을 만들어줄만한 인생의 스승이 과연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