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지 않는 보수, 구매력 없는 보수. 2008-08-06 760 인문학도 2005년이었던가, L모 국회의원의 홍보 카피라이팅을 했던 적이 있다. 정규직(?)은 아니었고 일종의 계약직이었는데, 어떤 프로젝트에 한하여 한시적으로 참가하는 형태로 일을 했었다. 당시 L모 의원은 '참신한' 무엇을 보좌관들에게 요구했었고, 그러한 결과로 생긴 TF에서 당시 의원실 인턴을 하던 선배의 권유로 카피라이팅을 담당하게 되었다. 팀이 구성되고 몇 번의 아이디어 회의를 거친 뒤에 처음으로 PT를 했었는데, 의외로 보좌관들 반응이 싸늘했었다. 왜 그런가 나중에 이유를 물었더니, L모 의원의 공적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아서랜다. 그래서 붙잡고서 한참 설명을 했다. 무슨 법안을 넣었고 무슨 사업을 유치했다 이런 것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하지 못한다, 일단은 겉보기에 이뻐야 손이 간다, 그리고 이미지로 밀어붙여야지 구체적인 업적 늘어놓기로 가면 오히려 거부감만 유발한다, 하지만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최종안은 보좌관들이 원하던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결정됐다. 나중에 L의원이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떨어질 것을 직감한 것은 그런 경험 때문이었다. 실제로 L의원은 낙마했고, 이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 자체를 포기했다. 현대는 이미지 싸움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논술교육을 기반으로 자라난 지금의 세대는 주어진 자료들을 꼼꼼하게 검토하거나 분석하는 일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는 일에도 적용되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상품화를 시도하는지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살 때 자신이 어떤 기능을 필요로 하고 어떤 용도에 쓸 지를 고려하고 산다기보다는, 이것이 어떠한 컨셉을 채택하고 있으며 어떠한 유행의 흐름을 타고 있고, 또 어떠한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느냐에 의해 구매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핸드폰을 일종의 전자기기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션 악세사리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까지 여기는 셈이다. 이것은 지식산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오늘날의 서적은 지식 축적을 꾀하는 이들에게 팔려나가지 않는다. 도서에 대해 구매를 행사하는 주된 계층은 흥미롭게도 20대 여성이나 3~40대 직장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책을 구매하는 주된 이유는 어떠한 테마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여가 시간을 이용한 자기 가꿈의 수단으로 전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한 20대 여성이 푸코나 데리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을 산다고 했을 때, 그 목적은 해체주의를 공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지적 허영을 충족시킬 여가 활동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 푸코의 서적을 번역한,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글인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 난해한 책보다는, 푸코나 데리다 등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풀어 쓴 다이제스트 성격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심지어 이런 책들은 실제로 푸코나 데리다의 사상 체계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도 않고, 제목에서조차도 해체론적 성격을 담아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신 이러한 책들을 소개하는 일간지 등이 푸코니 데리다니 도시문명의 해체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여서 이들의 소비 행위를 지적 활동으로 정당화시켜주는 방식을 택하긴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비단 출판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중에는 이미 무수한 형태의 '시민강좌'가 여가 시간을 '지적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무수한 구매자들에게 온갖 향기를 풍기면서 개설되어 있다. 과거 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주부 강좌가 확대 재생산된 형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인데, 이들은 주로 현대 프랑스 철학과 관련된 몇몇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내걸고서 이것을 한국 현대사회에 적용시킨다는 뉘앙스의 간판을 단 채 시민들을 유혹한다. 일례로 ㅅ단체에서 개설하는 강좌 중의 일부는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된 유목주의의 개념을 빌린 '노마디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실제 들뢰즈가 이야기한 유목주의의 관점과는 맞지 않는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강좌를 '소비하는' 시민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 강좌를 듣고 나면 어쩐지 들뢰즈를 '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고, 이러한 착각은 지적 허영심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ㅅ단체가 해당 강좌에 사용하고 있는 교재는 ㅅ단체에 소속된 이들이 세미나를 하면서 발제한 내용들을 그저 모아놓은 정도의 서적에 불과하지만, 이런 책들은 무려 2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려나간다. 물론 일반인들이 읽기 좋게 여백을 충분히 활용하는 편집 방식에, 표지는 따뜻한 핑크색 바탕에 어쩐지 있어 보이는 형이상학적인 무늬들을 담아놓는 등 소비자를 위한 충분한 배려(?)들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미 진보 진영은 이러한 지점에서 자신들의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에 엄청난 노하우를 축적해오고 있다. 매년 수많은 대학생들, 직장인들, 혹은 기타 젊은 세대들이 이들의 지식 상품을 소비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는 1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들의 서적 구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계속 발맞추어 복잡다단한 철학적인 테마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쓴 다이제스트형 서적들을 확대 재생산해낸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 강좌들이 이러한 서적들의 소비를 일정 수준 보장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인 토대가 쌓이면, 실제 지식 사회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킬만한 '함량 있는' 서적들이 출판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적들이 나오면, 이전에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지식 상품을 소비했던 이들이 이러한 서적을 구매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지를 인터넷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국방부 불온서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해당 서적들의 판매량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토대가 십분 위력을 발휘했던 덕분이다. 보수우파 일부에서는 진보 진영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한다고 비난하는 듯하지만 - 좌파라는 규정도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사실 자본주의에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적응해내고 있는 것이 현재 진보진영의 실상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고,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품에 대한 구매력을 확보하는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진보 진영에 대하여 친북 좌파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식의 이념 공격은 오늘날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미 상당수의 소비자들은 소위 '좌파'가 내놓은 지식 상품들을 다수 구매한 바 있으므로. 세계 어느 나라나 그러하겠지만, 특히 한국의 소비자들은 '무시'당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일부 가수들의 표절 시비나 병역 비리에 대해서 그다지도 강경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딴따라'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받아들이기 떄문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그것이 지식 계층에 의한 행위라고 해도,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소비자 대중은 격렬하게 대응한다. <디워> 사태 때 진중권이 당했던 봉변(?)을 생각해보라. 진보진영은 이러한 소비자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것이 그네들의 지식 산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이유다. 이것은 일종의 '해병대 체험 캠프'와도 비슷한 것인데, 불과 2주짜리에다가 일반인들의 수준에 맞게 강도를 낮춘 훈련을 받고서 해병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캠프의 막바지에는 해병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하는 여러가지 유형적/무형적 성과물들을 참가자에게 부과한다. 즉 (약간 아니꼽기는 하겠지만) 이 소비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인데, 이는 진보진영이 내놓는 수많은 지식 산업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 달 짜리 시민강좌를 듣고서 푸코나 데리다를 이해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언젠가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인들의 국가'를 이루고도 남았을 것이다. 상품을 만들어내는 강사들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시민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추켜세운다'. 이들에게 '이제는 푸코를 좀 알겠다'는 식의 착각에 빠지도록 강좌를 꾸밈으로써 지속적인 구매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진영은 어떠한가? 아직까지도 보수우파의 권위 있는 논객들은 '우중(愚衆)'이라는 개념을 설파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보수 진영의 저작물들을 소화해 주어야 할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스스로 내치는 격이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이 일반적이고 보니,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보수가 무엇인지, 보수의 이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 서적도, 혹은 이러한 서적을 소개해주거나 '강독'해 줄 강좌의 존재도 과소하다. 여기에다가 시민들이 접근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든 과격한 발언들을 각종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내놓고 있으니 보수에 대한 구매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수를 '구매'하는 것이 시민들의 지적 (허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네들의 자존감에 만족을 주는 효과를 낳아야 비로소 구매력을 가지는 것일 텐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보니 결국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동일시되어버리는 고립화 현상이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다. 지식도 여기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념의 문제가 가장 큰 화두였던 80년대에는 이념 논쟁이 자본의 논리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종식된 지금, 좌파 논쟁이나 색깔론이 가지는 내용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논리 자체가 일단 자본의 논리를 압도하지를 못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소비를 위해서 움직이지 이념을 위해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젊은 세대들에게 구매력을 행사하고, 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사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의 기존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에 비해 크게 뒤져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