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과 진정성 2008-08-08 706 인문학도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기발하고도 악랄한 방법을 썼다. 먼저 포로들을 잡으면 상당한 기간 동안 물을 비롯한 일체의 음식물을 주지 않고 이들을 감금한다. 그런 뒤 포로들이 탈진 상태에 가까워지면 한 장의 종이와 필기구를 주고서 전향서를 작성하도록 회유하는 것이다. 전향을 선언하는 포로에게는 빵과 음료를 제공하겠다, 그러나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물조차 공급받지 못한 포로들의 상당수는 전향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빵과 음료를 얻는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전향한 상당수의 포로들이 그야말로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특히 일반 사병보다는 장교 출신 포로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사관학교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정훈교육을 받았을 이들이 이다지도 극단적인 전향을 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것은 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상의 문제에 가까웠는데, 왜냐하면 전향서를 작성한 이들은 자신이 '빵과 음료' 때문에 변절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단지 알량한 빵 한 조각을 얻자고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미 전향서를 작성한 마당에 이것을 되돌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자괴감에 대한 일종의 도피처로서 '철저한 전향'을 택했던 것이다. 자기가 전향한 것은 단지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에 전향서를 작성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장교들의 경우에서 더욱 극단적인 전향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현상이다. 이는 비단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포로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전향'이라는 테제 아래 이와 같은 가치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폭압 아래에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수많은 한/일 지식인들이 전향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들이 전향을 선언하는 논리는 자신의 신념을 꺾고 일본 제국주의의 담론에 봉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우는 동양주의 담론과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전향 논리가 생성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즉 자신들이 전향을 하는 것은 코민테른의 독재를 인정하는 볼셰비즘에 대한 저항이며, 이는 소위 '동아시아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사회주의'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나아가서 코민테른의 독재를 서세동점(西勢東占)의 논리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황인종들이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동아시아 연대 평화론 - 나아가서는 대동아공영권 - 의 논리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맥락을 형성하기도 했다. 과거 골수적인 좌파임을 자처했던 인물들이 어느 순간 전향하여 '보수'임을 천명하는 것에 대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진정성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향이 먼저 이루어진 뒤에 이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논리가 발동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우파의 담론에 포섭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향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후적인 관점에서는 쉽게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선후관계의 문제를 가지고서 진정성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전향을 둘러싼 담론들을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으니 쉽게 손댈 수 있는 사안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과 불안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돌아선 지식인'들이 한 시대의 대중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던 무수한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위 '동양담론'에 매몰되어 전향을 선택했던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말로를 보라. 청년들로 하여금 '동양의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라는 구호와 함께 일본 제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도록 독려하는 격문을 남발했던 것은 다름아닌 이들 '전향자'들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시쳇말이 무게를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인지, 때로는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형식 논리가 다른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역사의 짖궂은 장난이 아니겠는가. 1차대전 당시,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 소재한 대학 총장들이 연명하여 격문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뮤즈가 침묵하고 있다'는 유명한 경구로 시작했던 이 격문은 독일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책을 버리고 전선으로 뛰어들 것을 장중한 어구로 독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격문에 고무된 수많은 대학생들이 군대에 자원했고, 이들은 단기간의 훈련 끝에 빈약한 장비를 지급받고서 벨기에 이에프르 지방에 투입되어 영국 정규군과의 전투에 돌입하였다. 대학 총장들의 결기 어린 격문과는 달리, 실전 경험이 전무했던 이들 의용군은 노련한 영국 정규군에게 그야말로 괴멸당하는 타격을 입고 만다. 지금도 독일의 랑게마르크 공동묘지에는 3만 6천구의 이름 없는 시신들을 추모하는 묘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젊은이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는 이름을 가진 기묘한 청년 하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