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는 글로벌, 그러나 속으로는 지독한 로컬리즘 2008-07-20 930 인문학도 제가 여행 다녀온 사이에 국제 앰네스티의 기자회견이 있었군요. 발표 내용은 예상했던 바입니다. 사실 이번에 조사관이 파견된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제스춰였으니까요. 사실 관계에 대한 조사는 이미 5월 중순부터 런던 본부와 한국 지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진행된 상태였고, 이미 본부 차원에서 두 차례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세계 각국의 앰네스티 지부가 자국에 주재한 한국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보낸 바 있구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에서 사태 해결의 노력을 보여주지 않자 경고 차원에서 부정기 조사관을 파견한 것이지요. 부정기 조사관 파견 자체만으로 한국을 '인권 후진국' 내지는 '인권 지도국'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앰네스티의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조사관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은 그러한 입장을 구체적이고 기술적으로 부연설명한 것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입니다. 앰네스티의 기자 회견 내용에 대해 '공정성이 부족했다',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공권력은 정당하게 발동되었다' 등의 반박을 내놓고 있군요. 쇠고기 국정조사에서 야당에 의한 과잉진압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로서는 국내여론이 과열되는 것을 우려해서 내놓은 답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누기"식 대응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앰네스티의 기자회견은 '발표'라기보다는 사실상 '통보'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의 인권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고 있으니 험한 꼴 보기 전에 알아서 자숙해라, 라는 것이 속뜻인데 이것을 마치 국내 시민단체들의 성명서에 대응하듯이 대처했더군요. 현 정권이 국제사회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해프닝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현 정권은 국제 앰네스티를 인권 가지고 목소리만 드높이나 실질적인 효력은 가지지 못한 NGO 쯤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국제 앰네스티의 활동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움직이는 룰은 명시적 구속력에 한정되어 있지 않지요. 오히려 명시되지 않은,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작동되는 구속력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앰네스티가 UN산하기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과소하게 판단하고 있다면 현 정권의 외교안보라인은 즉각 경질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앰네스티와 같은 국제적인 인권단체에 의해 '인권에 문제가 있는 국가'로 낙인찍혔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국제신인도 저하를 불러온다는 기본적인 룰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일 테니까요. 물론 앰네스티가 한국의 인권 문제에 개입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과거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군사독재시절에 자행되었던 여러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해 앰네스티는 지속적으로 관여해 왔으니까요. 어쩌면 그 때 실질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 정권이 앰네스티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20년 전과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데 있겠지요. 20년 전 국제사회를 움직이던 핵심 원리는 미-소간의 냉전 체제였습니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한 미국'으로 부르짖으며 동맹국과 우방국들을 견고하게 이을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작동원리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한국의 군사독재 역시 이러한 냉전체제의 그늘 하에 머무르는 한 다소의 인권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인권문제는 제1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냉전 체제가 와해된 이후,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원리의 핵심은 인권이나 환경과 같은 탈이념적인 테제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탈이념적 테제가 정치나 경제와 긴밀하게 맞물려서 실질적인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죠. 냉전 체제가 와해된 지금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적성국가에 대응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인권'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곤란합니다. 인권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워서 경제 봉쇄나 외교적 고립과 같은 실질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리로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즉,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로 낙인찍히게 되면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의 국제질서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앰네스티의 영향력이 무서운 겁니다.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방식이 그러하듯, 때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악용(?)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인권 문제입니다. 그리고 인권 문제에 있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국제 앰네스티죠. 앰네스티의 기자회견 내용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불공정하다느니 한국의 실정을 이해 못했다느니 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국제사회의 냉소 뿐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해명'이 한국 정부 스스로를 '인권 문제에 후진적인 독재 정권'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독배(毒盃)로 역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해명 내용의 사실 관계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사용하고 있는 논리 자체가 전세계의 여러 독재정권이 내놓는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외쳤던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그것과도 유사하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글로벌 시대를 열겠다, FTA를 체결하겠다, 국제 규격에 맞추겠다 하면서 '세계화'를 강조하는 정권이 오히려 지독한 로컬리즘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즈음의 국제사회 질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다면 인권이나 환경 문제 배후에 깔린 힘의 논리를 읽어내고 이에 기민하게 대응했어야 합니다. 인권이나 환경 문제에서 한 번 '책잡히게' 되면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앰네스티는 이 문제에 있어서 지대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단체입니다. 당장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이런 단체의 공신력을 부정하는 '공식발표'를 내놓는 것은 현 정권이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현명한 정권이었다면 당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앰네스티의 지적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사태 개선에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대응하는 게 훨씬 세련된 방식이 되었을 겁니다. 앰네스티의 지적에 대해 '정당한 공권력 발동'이라고 반발하는 것은, 자국의 주민들을 총살하거나 강제수용하는 행위를 '우리식의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북한 정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수준임을 자인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도덕적 우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임과 동시에, 전세계에 '우리는 인권후진국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외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4강외교네, 747공약이네 하면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노리고 있다면, 최소한의 국제 질서에 대한 이해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네요. 바로 옆에서 북한과 중국이 인권 문제로 얼마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지를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함정에 빠진다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더군다나 북한이나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글로벌리즘을 '지향'하는 입장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되겠죠. 입으로는 글로벌리즘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80년대식 로컬리즘의 작동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합니다. 여태까지는 국내적으로만 지적되었던 문제인데, 이번 앰네스티 발표와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이제는 전세계가 알아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명박 씨가 그토록 우려했던 '국제신인도 하락'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구어내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오히려 시민단체의 존재 덕분에 앰네스티에게 '완전한 인권 후진국'으로 낙인찍히지는 않게 되었으니, 이명박 씨는 외려 자신의 퇴진을 외치는 시민단체들에게 공로패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