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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퍼슨과 레이건, 로버트 리와 스톤월 잭슨
2010-07-23 19:41 2,148 이상돈

제퍼슨과 레이건, 그리고 로버트 리와 스톤월 잭슨

                    이상돈 (2010년 7월 23일)

미국 대통령 중에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나에게 묻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토머스 제퍼슨과 로널드 레이건을 뽑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오늘날의 민주당의 뿌리인 공화파를 만든 대통령이고, 로널드 레이건은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보수주의 공화당을 일으킨 대통령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주권(州權)을 중요하게 내세운 대통령이었음을 생각하면 “워싱턴이 문제”라는 레이건주의는 제퍼슨주의와 통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남북전쟁을 생각하면, 도대체 이런 전쟁을 일으킨 남부와 북부의 정치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시작했고, 일단 시작했으니 사생결단을 하고 이겨야만 했고,,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버지니아가 바로 그 한복판이었습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의 후손들도 남북전쟁의 폭풍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손녀가 남군의 지휘관 로버트 리(Robert Lee)의 부인이었고, 토머스 제퍼슨의 손자는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남부연합 대통령의 각료를 지냈고, 또 다른 손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생도로 뉴마켓 전투에 참가해서 전사했습니다.

블루리지 마운틴 서쪽의 계곡에 자리 잡은 렉싱턴(Lexington)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와 워싱턴 앤드 리 대학(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이 있는데, 로버트 리는 남북전쟁 후 워싱턴 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그 후에 대학 명칭을 워싱턴 앤드 리 대학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워싱턴’은 물론 조지 워싱턴을 의미합니다.) 로버트 리와 그의 가족은 이 대학의 채플 지하 묘에 묻혀 있고, 그를 전쟁 중 태우고  다녔던 애마(愛馬) 트레벨러(Traveler)도 그 채플 뒷쪽 정원에 묻혀 있습니다.

남북 전쟁시 남군의 영웅은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장군인데, 그가 챈슬러빌 전투에서 남군의 잘못된 포격에 부상당해서 죽지 않았더라면 게티스버그 전투의 양상이 달랐을 것입니다. 스톤월 잭슨이 하퍼스 페리 전투와 매나사 전투에서 북군을 패퇴시키고 로버트 리에게 워싱턴으로 진격하겠다고 허락을 요구했을 때 로버트 리가 그것을 허용했더라면 백악관이 점거되고 링컨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남북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입니다.

렉싱턴에는 스톤월 잭슨이 남북 전쟁에 출정하기 전에 2년 동안 살았던 집이 역사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후 멕시코 전쟁에 참가해서 명성을 얻은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자연과학과 전술을 가르쳤는데, 그는 특히 포술을 잘 가르쳤습니다. 남북전쟁이 나자 버지니아 주 정부의 부름을 받고 버지니아 군 소령으로 참전해서 초기에 북군, 즉 양키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이름이 토머스인데, '스톤월'이란 명칭은 그가 지휘하는 군은 암벽 같아서 뚫을 수가 없다는 의미로 매나사 전투 후에는 아예 그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프레데릭스부르그 전투에서도 승리한 그는 챈슬러 빌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마차 앰뷸런스에 실려서 후방의 농장 가옥에서 사망했는데, 마침 리치몬드를 방문 중에 그 소식을 들은 아내와 6개월 된 딸이 도착해서 스톤월 잭슨은 사랑하는 아내(당시 32세)와 딸을 보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시신은 고향인 렉싱턴으로 옮겨져서 묻혔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 잭슨의 장례식은 큰 사건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마 남군의 희망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잭슨이 남북 전쟁 중 타고 다닌 애마 소렐(Sorrel)은 잭슨이 사망한 후에 후 잭슨의 부인(잭슨은 첫 부인이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에 다시 결혼 했는데, 두 번째 부인은 노스캐롤라이나의 부유한 집안의 딸로 잭슨이 사망한 후 재혼하지 않고 80세 넘도록 살았습니다.)을 따라서 20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죽은 후에 박제가 되어서 버지니아 군사학교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말 같습니다.) 몸집은 작은데, 대포 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산과 들, 계곡을 용맹스럽게 잘 달렸다고 합니다. 잭슨이 입었던 군복, 말 안장 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기동성과 기습공격을 강조한 잭슨의 전술(戰術)은 오늘날 미군의 교범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렉싱턴을 점거한 북군은 보복으로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불 태워 버렸습니다. 당시 북부군은 점령지마다 불을 질렀는데, 그것은 전쟁 초기에 스톤월 잭슨에게 당한 수모에 대한 복수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생으론 조지 마셜 장군이 유명하고, 캠퍼스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사한 동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습니다.

남부는 100년 넘도록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을 찍지 않았는데, 레이건 시대에 들어서 공화당을 찍기 시작했고, 아예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민주당원들이 늘더니, 이제 남부는 공화당의 아성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금융과 제조업의 본산으로 공화당의 아성이었던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등 북동부는 민주당의 아성이 되었으니,, 역사는 그렇게 변화하는 것인가 봅니다.

사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대변했던 것은 흑인 노예가 아니라 북동부의 금융과 산업 자본가들의 이익이었는데, 남북 전쟁 초기에 스톤월 잭슨의 군대에 북군이 패퇴를 계속하자 노예해방을 선언해서 명분을 만든 것이지요. 정작 스톤월 잭슨은 부인과 함께 일요일 오후에 교회에서 흑인 노예들에게 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서 렉싱턴의 혹인 노예들은 잭슨 부부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조지 워싱턴도 유언으로 자신의 노예를 팔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버지니아 출신의 대통령들도 노예제는 언젠가는 폐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스톤월 잭슨은 자신의 조국인 버지니아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참여해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간단하게 썼습니다.

4대강이 경부고속도로를 본받은 것이라고? 
교수님 잘게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