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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슬론, 가장 어두웠던 여름 (2009년) (계속)
작성일 : 2010-08-18 03:46조회 : 5,795


빌 슬론, 가장 어두웠던 여름 (200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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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사령부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해병여단을 빼가려 하자 워커 중장은 강력히 반발했다. 이에 맥아더와 앨먼드는 해병여단의 주축인 5연대를 워커의 휘하에 그대로 두고 대신에 육군 7사단 32연대를 상륙작전에 참가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러나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한국에서 실전에 참여한 해병 5연대가 가담하지 않는 한 상륙작전을 할 수 없다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이런 구상에 반대했다. 해병 1사단의 3개 연대 중 7연대는 지중해를 출발해서 뒤늦게 도착할 예정이어서 5연대가 없다면 해병 1사단은 체스티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1연대만으로 상륙작전을 해야 하는 데, 그것이 미친 짓임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인 라이트 소장을 대구에 보내서 워커에게 해병여단을 포기하라고 통보했다. 라이트 소장은 7사단 17연대를 부산에 예비대를 배치하고 9월 18일에는 3사단 65연대가 도착할 것이라고 워커를 달랬다. 워커는 실전경험이 없는 육군 연대가 해병여단을 대신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워커는 참모들과 좀더 방어하기 쉬운 전선으로 후퇴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그 방안을 택하지는 않고 단지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해병여단은 9월 7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8월 초에는 부산이 함락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해병여단이 도착하자 부산의 분위기는 고무되어 있었다. 해병여단은 휴식을 취하고 닳아 버린 군복과 군화를 교체하고 무기와 탄약을 보충했다. 본국에서 보충병력 1135명이 도착해서 해병 5연대는 비로서 3개 대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5연대는 2개 대대만 갖고 전투를 했던 것인데, 이제는 총병력 3,611명의 정상적인 연대병력이 되었다. 5연대 본부에는 비밀문서라면서 “해병이 곧 군산에 상륙한다”는 공고문을 붙여 놓았다. 하지만 연대 본부는 인천상륙을 위한 세부작전 수립에 여념이 없었다. 인천상륙의 선봉은 태플릿 중령이 이끄는 5연대 3대대가 맡기로 했는데, 3대대는 그린비치로 명명한 월미도를 장악하기로 했다. 스미스 소장은 북한군 500명이 지키고 있는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전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3대대가 12시간 동안 독자적으로 월미도를 지켜야 남쪽의 블루비치와 북쪽의 레드비치에 후속 병력이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워싱턴의 합참에서는 과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겠냐 하는 회의론이 돌았다. 리지웨이 육군참모차장은 인천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모험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했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부산 방어선에서 해병 5연대를 빼온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해군 당국자들은 인천이 상륙작전을 하기에 어려운 조건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의 악조건이야말로 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라고 반박했다.

해병여단에게 북한군이 패퇴한 후 낙동강 하류 전선에선 미 육군이 현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구 부근의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기병 1사단은 북한군의 집중적 공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대구 부근의 전세가 심상치 않자 8군 사령부는 부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워커 중장은 “대구에서 시가전이라도 한다”면서 그대로 대구에 남았다. 9월 8일에 북한군은 다시 공세를 폈고, 12일에 1기병사단 병력이 지키던 314 고지를 점령했다. 314 고지는 대구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다시 이를 탈환해야만 했다. 7기병연대 3대대는 불과 535명 병력으로 고지를 공격해서 결국은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공격에 나선 2개 중대가 고지를 점령했을 때 전투를 할 수 있는 부대원은 겨우 80명 뿐이었고, 단 한명의 장교만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지 않았다. 고지에서 이들은 북한군 시체 200구를 발견했는데 이들은 미군 M-1과 칼빈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총살된 미군 병사 시체 4구와 산채로 불태워진 미군 장교 시신이 발견됐다. 실전경험이 없던 육군 장병들은 이제 비로서 전사(戰士)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한 것이다.

9월 13일, 해병 1여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부대는 해병 1사단으로 복귀했다. 크레이그 준장은 해병 1사단 부사단장이 됐다.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해병장군이라기 보다는 대학교수 같은 인물로, 매우 종교적이었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적이 없었다. 스미스 소장은 앨먼드 소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58세이던 앨먼드는 57세인 스미스 소장을 ‘우리 아이(son)’라고 부르는 등 무례했기 때문이다.

1사단 휘하에는 3개 연대와 한국해병 1개 연대가 배속되었다. 37세의 젊은 머레이 중령이 지휘한 5연대는 이미 낙동강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텍사스 A&M대학을 나온 머레이 중령은 2차 대전 중 대대장으로 과달카날, 타라와, 그리고 사이판에서 싸웠는데, 은성무공훈장 2개와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한국전쟁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또다시 은성무공훈장 2개와 해군십자훈장, 그리고 육군수훈훈장을 받았다. 1연대장은 버지니아 출신인 체스티 풀러 대령인데, 2차 대전 중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대장으로 큰 공적을 세웠고, 1연대장으로 펠리우 전투에 참가해서 해군십자훈장 4개를 받았는데, 다른 직책을 맡고 있다가 다시 1연대장이 되어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됐다. 유럽에 있던 7연대를 이끌고 뒤늦게 인천에 상륙하게 되는 7연대의 연대장은 호머 리첸버그 대령인데, 2차 대전 중 유럽전선에서 기획장교를 지냈고, 해병 7사단의 대대장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마셜 군도 전투에 참가해서 은성무공훈장 3개와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해병 1사단에는 새로 탄생한 한국해병 1연대가 배속되었는데, 연대장은 김성은 중령이었다.


상륙 전야(前夜)

9월 13일에 한국 연안에는 7개국 군함 260척이 인천상륙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9월 1일-14일간 해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 중위는 한국군 몇 명을 대동하고 영흥도에 상륙해서 한국인 자원자들을 모아서 인천 지역의 북한군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매우 위험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클라크 중위는 14일 자정에 비어 협수로(Flying Fish Channel)를 표시하는 점화등을 작은 섬에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5연대 3대대는 어둠 속에서 이 점화등을 보고 월미도에 상륙할 수 있었다. 클라크 중위는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은 다음과 같이 계획되었다. 9월 15일 오전 6시 30분까지 태플릿 중령이 이끄는 5연대 3대대가 월미도의 그린비치에 상륙하고, 오후 5시 30분 5연대 1대대와 2대대가 월미도 북동쪽 레드비치에 상륙하고 뒤어서 한국 해병연대가 상륙하며,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1연대는 남쪽의 블루비치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해병 1연대와 육군 7사단 17연대와 32연대는 9월 18일에 상륙하도록 되었다. 이런 작전계획에 대해 태평양에서 싸운 적이 있는 지휘관들은 우려를 표시했다. 무엇보다 레드비치와 블루비치의 앞에는 16피트 높이의 폭넓은 해안방벽이 있어서 진입이 쉽지 않아 보였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5연대 1대대 B중대장 펜튼 대위도 그런 걱정을 했다. 그는 레드비치가 타라와 섬을 연상시킨다고 우려했다. 펜튼 대위가 이끄는 중대와 함께 낙동강 전투를 취재를 했던 라이프지의 던컨 기자는 펜튼 대위와 가까워졌다. 던컨 기자는 전투에 지친 펜튼 중대장의 사진을 몇장 찍어서 본사에 보냈는데, 라이프지는 이 사진을 크게 실어 보도했다. 계속되는 전투로 수염이 나고 수척해 진  펜튼의 모습은 한국에서 미군이 치르고 있는 힘든 전투의 상징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펜튼 대위의 부친은 프랜시스 펜튼 해병준장이었는데, 그는 하나 남은 자기 아들이 한국에서 중대를 이끌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당시 미군 규칙에 의하면, 펜튼의 형이 오키나와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하나 남은 아들인 펜튼 대위는 전선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해병대 사령부는 펜튼에게 귀국명령을 내렸다.
 
크레이그 준장은 펜튼 대위를 불러서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중대를 맡길 때가 됐다”면서 본국귀환 명령이 내려졌다고 알렸다. 펜튼 대위는 “장군님, 제가 떠나서는 안됩니다. 저는 다음 작전에 있어야 합니다. 저는 대원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고 애원했다. 크레이그 준장이 “나는 사령부 명령을 어길 수 없다네” 하자, 펜튼은 “한두주일만 여유를 주십시요. 저는 주의하겠습니다. 저는 B중대와 함께 서울을 점령할 것입니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고 말했다. 크레이그 준장과 펜튼 대위는 서로 마주 보았다. 크레이그 준장은 한숨을 쉬면서, “좋아, 이게 마지막 작전이야. 그런 다음 본국에 가는거야, 알았나?” 펜튼은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고 말했다. 크레이그 준장은 나중에 “나는 정말 우리 둘이 후회하게 되지를 않기를 빌면서 손가락으로 십자(cross)를 그었다.”고 회고했다.

1950년 9월 15일

월미도는 9월 13-14일 양일간 집중적으로 포격을 받았다. 9월 15일 새벽이 다가오기 전에 미 순양함 톨레도호(號)와 로체스터호, 영국 순양함 케냐호와 자미이카호는 또다시 월미도에 포격을 했고, 미 구축함 7척도 이에 가담했다. 세척의 상륙로켓함은 5인치 로켓 수천발을 월미도에 퍼부었고, 이어서 호위항모 시실리호와 배동스트레이트호에서 발진한 해병 항공단 코르세어 편대와 밸리 포지호(號) 등 세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해군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했다. 그러는 동안 상륙부대를 실은 19척의 함정은 좁은 비어 협수로(Flying Fish Channel)을 항해해서 인천을 향했다. 새벽 5시 50분 5연대 3대대 병력과 9대의 퍼싱탱크는 보병상륙주정(LCVP) 17척과 장비상륙주정(LSU)에 옮겨 탔다.

6시 33분에서 35분 사이에 월미도 그린비치에 상륙한 3대대원들은 예상과 달리 별다른 저항에 봉착하지 않았다. 6시 55분에 이들은 첫 목표인 라디오 고지(Radio Hill)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라디오 고지는 해군의 포격과 항공기 폭격으로 초토화되어 있었고 남아있던 북한군들은 순순히 항복했다. 해병은 저항하는 북한군을 제압하고 오전 8시 30분에 월미도를 장악했다. 해병은 부상 17명이란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해병은 118구의 북한군 시체를 확인했고 136명을 포로로 잡았고, 150-200명의 북한군을 동굴 참호를 막고 덮어버렸다. 

인천 앞바다의 해군 상륙함정에선 저녁 만조 시간을 기다려 상륙하게 될 5연대 1대대와 2대대, 그리고 1연대는 긴장된 반나절을 보냈다. 월미도 점령은 인천 상륙작전에 있어서 아주 작은 일부이며 레드비치와 블루비치 앞에는 북한군의 참호가 버티고 있었다. 해병은 자신들이 참호에서 기다리는 적과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해병 장교와 부사관들은 아무리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많이 해도 적의 벙커를 파괴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상륙함정의 후갑판에서 개신교와 천주교 종교의식이 열리자 해병들이 몰려들어서 해군 수병들은 배가 뒤로 기울까 걱정을 했다. 해병들은 정오에 당분간은 할 수 없는 더운 식사를 하고 레이션을 보급받았다. 레드비치와 블루비치 앞에는 높은 해안방벽이 있어서 해병들은 사다리를 가져가야만 했다.

오후 4시 30분, 5연대 소속 해병들은 상륙주정에 탑승을 완료하고 호송구축함 호레이스 바스호(號)의 뒤를 따라 레드비치로 향했다. 상륙정이 해안을 향해 가는 동안 상륙로켓함은 6,500발의 5인치 로켓을 해안 너머로 퍼부었고, 호레이스 바스호의 5인치 함포도 불을 뿜었다. 보병상륙주정들이 먼저 해안에 도착했고 이어서 중장비를 실은 탱크상륙함(LST)이 뒤를 이었다. 몇마일 남쪽 블루비치에 상륙한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1연대는 수륙양용트랙터 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서서히 진전해 나갔다.

레드비치에 상륙한 5연대 1대대의 선봉에 선 A중대는 고지 벙커에서 숨어 사격하는 북한군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병들은 좁은 해안방벽을 은폐시설로 삼아 응사했으나 뒤이어 상륙한 해병들이 밀려 옴에 따라 곤란한 상태에 빠졌다. 이 때 A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소위가 “나를 따르라!”면서 사다리를 올라갔다. (로페즈 소위가 방벽을 올라 넘어가는 순간을 찍은 유명한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의 상징이다.) 로페즈 소위는 가까운 벙커로 단신 달려가서 수류탄을 던져 파괴했다. 이어서 옆 벙커를 향해 수류탄 던지기 위해 핀을 빼는 순간 가슴과 어깨에 적탄을 맞으면서 뒤로 넘어졌다. 그런 순간 핀이 빠진 수류탄이 손에서 빠져 나와 뒤 따라오는 소대원들을 향해 굴러가자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수류탄을 끌어 안고 산화(散華)했다. 그의 희생으로 많은 소대원들이 생명을 구했다. 소대원들은 두명의 대원을 더 잃은 후에야 수류탄을 집중적으로 던쳐서 벙커의 자동화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로페즈 소위에게는 한국전쟁 처음으로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스페인에서 이민 와서 플로리다 탬파에 정작한 부모에서 태어난 로페즈 소위는 탬파 지역에선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로페즈 소위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된 A 중대장 존 스티븐스 대위는 부중대장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스티븐스 대위는 앞에 보이는 묘지 고지(Cemetery Hill)을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뮤첼 소위가 이끄는 1소대는 고지의 남측을 올라가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가 오후 5시 55분이었다. 한편 1대대 C 중대와 D 중대는 관측 고지(Observatory Hill)을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때 해안에 주저앉아 있는 해군 탱크상륙함이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응사하는 과정에서 해병대원들이 아군의 포탄에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했다. 관측 고지는 전투경험이 많은 펜튼 대위가 이끄는 B 중대가 어둠을 이용해서 공격해서 장악했으니 그 때가 오후 8시였다.

블루비치에 상륙한 1연대는 레드비치에 상륙한 5연대에 비해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어둠이 깔리자 3대대 H중대 1소대는 94 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 스완슨 소위는 중상을 입었다. 이 즈음 크레이그 준장이 월미도에 도착해서 전방 사령부를 차렸고, 5연대 3대대는 전진해서 레드비치에 상륙한 5연대 1대대 및 2대대와 합류했다. 16일 아침이 되자 인천을 지키던 나머지 북한군은 후퇴해 버렸고, 해병은 상륙 24시간만에 인천 전체를 장악했다. 한국 해병 연대는 16일 아침부터 인천시내에 남아 있는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로서 불가능해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맥아더의 장담이 들어 맞았다. 고무된 맥아더는 서울을 5일만에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번부터 맥아더는 틀리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 D데이 하룻동안 해병은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의 피해를 입었다.


서울로 가는 길

인천상륙작전은 어려운 조건을 극복한 성공한 탁월한 작전으로 평가된다. 많은 전쟁역사가들은 인천상륙을 맥아더 생애의 최고의 업적으로 본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데는 김일성의 오만과 안일한 판단도 큰 역할을 했다. 김일성과 북한군 수뇌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만한 병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공군(中共軍) 수뇌부는 서해에서의 미 해군력 증강 추세를 김일성에게 경고했고, 마오쩌뚱 본인도 김일성에게 인천이 취약하다고 경고했지만 김일성을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인천 앞 수로에 기뢰를 부설하거나 낙동강 전선에 가있는 부대를 인천으로 배치하거나 하지 않았다. 9월 4일과 11일 두차례에 거쳐 중공군 사절단은 김일성을 만나 인천 방어를 강력히 권했으나 김일성은 듣지 않았다.

이제 인천을 장악한 미 해병은 서울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5일만에 서울을 탈환한다고 장담했지만 만일에 김일성이 10,000-15,000명 정도의 정예부대를 추가로 서울 방어에 투입했더라면 서울 탈환은 몇주일이 걸렸을 것이다. 김일성은 인천을 다시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울 지역에 있는 북한군 부대에게 인천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북한군은 미 해병의 진군을 막을 수 있는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고 단위 부대별로 산발적으로 무모하게 저항을 했다. 9월 16일에 북한군 탱크 6대가 무모하게 인천을 향하다가 해병 코르세어기와 퍼싱 탱크에 의해 모두 파괴된 것도 그런 현상이었다. 이 때 코르세어기 한대가 추락해서 조종사 윌리엄 심슨 대위가 사망해서 서울 수복작전의 첫 전사가 됐다.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머레이 중령이 이끄는 5연대는 서울을 향한 좌측으로, 풀러 대령이 이끄는 1연대는 우측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이 때 비로소 한국인 주민들이 길에 나와서 해병들에게 “생큐, 생큐”를 연발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5연대는 방향을 북으로 틀어서 김포 공항을 장악하고자 했고, 1연대는 영등포를 통해 한강을 건너가고자 했다.

해병 2개 연대가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순간에도 워커 장군이 이끄는 8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맥아더는 워커가 반격을 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워커는 워커대로 불만을 터뜨렸다. 워커는 “저들은 얼마 안되는 풋내기 적군을 치느냐고 적군의 90%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 보다 더 많은 포탄을 퍼부었단 말이야!”고 화를 냈다.

9월 16-17일 밤, 해병 1연대와 5연대는 북한군이 반격해 올 것이란 정보를 얻고 긴장하고 있었다. 펜튼 대위가 지휘하는 5연대 1대대 B중대는 인천으로 돌아오던 북한 해군수병 3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들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9월 17일 오전, 김포 공항을 향하던 5연대는 북한군 탱크 6대와 보병 250명이 한가하게 인천으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퍼싱 탱크와 로켓포로 파괴해 버렸다. 김일성은 일선 지휘관에게 인천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들은 한가하게 인천을 향하다가 최후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향하는 길에는 파괴된 북한군 탱크의 잔재가 즐비했고, 맥아더는 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기자들을 불러와서 사진을 촬영했다. 이 때문에 진군이 늦어졌고, 해병들은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김포 공항으로 향하던 5연대 3대대는 뜻밖에 큰 전과를 올렸다. 1대대와 2대대, 그리고 한국 해병대대가 북한군의 저항을 받아서 지연되는 동안에 3대대가 북한군 진영의 후방으로 너무 빨리 전진한 것이다. 3대대장 태플릿 중령은 G중대장 로버트 본 대위와 대원 몇 명만 대동하고 파괴된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바로 아래에서 북한군 약 150명이 해병 2대대가 오는 길에서 자동소총을 걸어두고 매복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태플릿 중령과 본 대위, 그리고 불과 몇 명의 대원들은 M-1과 자동소총 1정만으로 북한군 대부분을 사살해 버렸다. 한편 해병 1연대는 소사를 지나갈 때 북한군 18사단의 강력한 공격을 당했지만우수한 화력으로 북한군을 제압했다. 9월 17일 오후 4시까지 하룻동안 1연대는 2마일 이상을 전진했는데, 전사 1명, 부상 27명이란 피해를 입으면서 북한군 250명을 사살하거나 부상하게 했고 70명을 포로로 잡았다.

8월 18일 새벽 3시에 북한군은 김포 공항 남측에 포진한 해병 5연대를 공격했으나 해병대원들은 치열한 근접전을 벌인 끝에 진지를 지켰다. 동이 터올 무렵 펜튼 대위의 중대는 매복기습하는 북한군을 미리 파악하고 유인해서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오전 10시, 5연대는 김포 공항과 부근 마을을 장악했다고 보고했다. 김포 공항을 장악함으로써 해병 코르세어기는 김포공항에서 출격할 수 있게 됐다.

8월 18일에도 1연대는 소사 부근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에 퍼싱 탱크 2대가 파괴되었고, 공병대가 투입되어 지뢰를 제거해야만 했다. 이날 인천 항구에 미 육군 17사단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17사단은 수원을 거쳐 진군해서 북으로 올라 오는 북한군을 차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7사단에는 일본에서 3주간 기본훈련만 받은 한국군 신병이 많아서 전투력은 미지수였다.

8월 19일에도 영등포를 향하던 1연대는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했다. 북한군 1개 연대가 영등포에 포진하고 있어서 1연대는 희생을 무릅쓰고 영등포를 돌파해야만 했다. 8월 20일 새벽 4시 북한군 대대병력이 탱크 부대를 앞세우고 1연대를 공격했다. 1연대에 대한 북한군의 대담한 이 공격은 2대대 F중대에 배속된 19살 밖에 안된 로켓포 사수 월터 모니건 일병의 대담하고 정확한 사격에 의해 저지될 수 있었다. 모니건 일병 팀은 9월 17일에 이미 북한군 탱크 5대를 3.5미리 로켓과 75미리 무반동총으로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20일 어둠이 깔린 새벽에 모니건 일병은 “적 탱크가 온다. 300야드 전방이다”고 소리치는 분대장 치크 병장의 외침을 듣고 깨어났다. 로켓을 집어든 모니건과 다른 두명의 병사는 언덕을 내려갔다. 북한군 탱크가 100야드 앞에 보이자 모니건은 물 탱크 뒤에 숨어서 로켓을 장전했다. 그 순간 다른 병사가 던진 수류탄이 북한군 탄약 트럭에 명중해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틈에 모니건은 세번째 탱크를 정확하게 조준해서 로켓을 발사해서 폭파시켰다. 북한군이 응사해 오는 동안에 퍼킨스 일병이 다시 로켓을 장전했고, 모니건은 두번째 탱크에 발사해서 명중시켰다. 모니건은 퍼킨스에게 “빨리 장전해. 마지막 한대도 잡자!”고 외쳤다. 로켓포를 올려서 조준하는 순간 모니건은 북한군의 기관총 여러발을 맞고 쓰러졌다. 치크와 퍼킨스는 피를 흘리는 모니건을 물 탱크 뒤로 끌어왔으나 이 용감한 병사는 곧 숨을 거두었다. 모니건 일병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모니건 일병이 전사한 후에 해병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서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 날 오전 1연대는 영등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80 고지와 85 고지를 공격해서 치열한 교전 끝에 장악했다. 85 고지를 공격한 2소대장 존 길드 소위는 북한군 2명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정상에 거의 다다른 순간에 중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소대를 지휘하다가 출혈과다로 사망했다. 두개의 고지를 잃어버린 북한군은 도망가버렸고, 1연대 장병들은 눈앞에 한강과 한강 너머 서울을 바라 볼 수 있었다.

9월 22일, 드디어 해병 7연대가 인천에 도착해서 5연대를 지원하게 됐다. 해병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 외곽의 고지대에 포진하고 있는 북한군 78독립연대와 35여단 소속 정예부대와 일전을 해야만 했다.


‘처참한 해방’

9월 19일이 되자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오랜 전투에 지치고 보급품과 탄약이 부족한 북한군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워커에게 인천에 상륙하는 즉시 공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했지만 8군은 공격에 주저하고 있었다. 8군 병력은 오랜 전투로 지쳐 있었고, 105미리 곡사포 포탄이 부족하는 등 탄약도 충분하지 못했다. 낙동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주정(舟艇)과 장비가 부족했다. 8군은 그간 방어전투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 모드로 전환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미군 정보당국은 당시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을 10만 명 규모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안일하게 공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한군 실제 병력은 미군 정보당국의 추산한 것의 절반 규모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8군 내에서도 대전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조지 페플로 대령이 지휘하는 2사단 38연대는 8월 말에 24사단 34연대가 지키던 지역을 인계받았다. 38연대는 대대장과 중대장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소대장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었고, 따라서 장병들이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9월 16일 밤, 페플로 대령은 특공대를 조직해서 낙동강을 수영으로 건너가서 동향을 살펴보도록 했다. 이들은 북한군이 강둑에 놓은 고무보트 몇대와 30명을 태울 수 있는 주정을 탈취해 왔다. 도강(渡江) 장비를 갖추게 되자 18일에 2사단 본부는 도강공격을 승인했다. 38연대 2대대 소속 2개 중대는 도강 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해서 낙동강 서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 북한군 1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미군이 드디어 낙동강을 건너는 작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9월 19일, 8군 소속 부대들은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군 3사단은 빼았겼던 포항을 탈환했고, 한국군 1사단은 북한군 1사단과 13사단 사이를 뚫고 13마일을 진입하는 성공했다. 9월 20일이 되자 24사단 전체가 낙동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이 확보되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공격은 1기병사단 7연대 3대대장 린치 중령이 이끄는 일명 린치 별동부대에 의해 이루어 졌다. 1기병사단의 3대대를 주축으로 2개 탱크 소대와 공병중대, 박격포 소대와 포병지대, 그리고 공군 지원편대로 구성된 린치 별동부대는 21일 아침에 공격을 시작해서 6일 동안 120마일을 진군해서 인천에 상륙해서 수원을 거쳐 남하하는 7사단과 오산에서 합류했다. 린치 별동부대는 북한군의 배후를 공격해서 북한군 600-700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고 탱크 13대를 파괴했다.

해병의 서울 진격은 쉽지 않았다. 김일성은 병력 20,000명을 추가로 보내서 서울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 중에는 중무장한 정예부대 78독립연대와 25연대가 있었다. 9월 22일 아침 해병은 공격을 시작했다. 25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해병이 한국에 발을 들여 놓은 후 가장 많은 전사상자를 냈다. 사흘 간의 전투가 끝난 후 5연대 소속의 원래 소대장 18명 중 한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맥아더와 앨먼드는 서울을 9월 25일까지 탈환하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남침한 후 3개월 만에 서울을 회복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서울 진격에 앞장섰던 5연대 3대대장 태플릿 중령은 “현실적인 군사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약속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태플릿 중령에게는 휘하 장병들의 안전이 더욱 중요했다.

해병 5연대와 1연대 외에도 육군 7사단 32연대, 187공수여단 전투팀, 그리고 한국해병 1대대가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북한군은 도로에 지뢰를 부설하고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빌딩 위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탱크와 자주포를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해병 연대에 배속된 의무병들은 한국에 온 후 가장 빠쁘고 처참한 사흘을 보냈다.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려다가 적탄에 희생되는 의무병이 속출했다. 서울 시내로 향하는 모든 주요한 도로에는 북한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있었고, 해병은 이것을 폭파시켜야만 했다. 서울 시내로 향하는 능선을 장악하기 위해 해병을 많은 희생자를 내야만 했다.

9월 25일 밤이 되자 서울의 40% 정도를 미군이 장악하게 되엇다. 뒤늦게 상륙한 해병 7연대는 서울 북쪽으로 진군해서 5연대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25일 저녁 8시, 해병 1사단 본부에는 앨먼드 소장이 보낸 지시가 도착했다. 앨먼드 소장은 “북한군 병사들이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하고 있으니 지금 적군을 공격해서 최대한 파괴하라”는 내용이었다. C 레이션으로 저녁 식사를 하던 스미스 소장은 이 메시지를 읽다가 기가 막혀서 목이 막힐 뻔했다. 사단 작전참모 바우저 중령은 “앨먼드 소장이 말하는 ‘도망가는 적군’이란 시가전을 피해 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민간인들”이라고 말했다. 바우저 중령은 그 순간에도 태플릿 중령이 3대대는 북한군 탱크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분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이 앨먼드 소장의 지시를 머레이 대령과 풀러 대령에게 전해주자 이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미스 소장은 풀러와 머레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공격을 조심스럽게 진행하기를 바란다. 너무 앞서가지 말고, 천천히 하고, 야간에도 확인할 수 있는 주된 도로를 따라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풀러 대령은 해병대 전체에서 가장 공격적인 야전지휘관이었지만, 앨먼드의 지시는 그가 32년간의 해병장교로서 배운 논리와 상식에 벗어나는 것이었다. 풀러 대령은 북한군의 저항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민간인 희생이 늘어날 것을 걱정했다.

북한군 탱크의 공격을 물리친 태플릿 중령의 3대대는 콜린스 병장을 조장으로 한 정찰조를 마포 주변으로 내보내서 1연대 정찰조와 합류하도록 했다. 그러나 콜린스 병장은 토머스 릿지 중령이 지휘하는 해병 1연대 3대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북한군 25여단 탱크 부대와 보병대대에 마주쳤다. 북한군들이 사격을 시작했고, 콜린스 병장은 따라오던 부대원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콜린스는 태플릿 중령에게 상황을 보고 하면서 부대원들이 철수할 수 있도록 엄호사격을 했다.

그 순간 북한군 탱크와 미 해병의 155미리 곡사포와 불을 뿜었다. 릿지 중령의 부대는 탄약이 떨어질 상황에 이르자 해병 11포병연대 소속의 곡사포가 갖고 있던 모든 포탄을 퍼부었다. 그날 미 해병이 쏟아부은 포탄은 1,000발이 넘었고 중기관총 총탄은 30,000발을 넘어서 과달카날에서 세운 기록을 깨어 버렸다. 이런 집중 포격으로 인해 북한군 부대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북한군 진영에 갖혀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됐던 콜린스 병장은 파괴된 민간 가옥에 숨어서 교전을 피한 후 한국 민간인 옷으로 변신하고 부대로 무사하게 귀환했다.

9월 26일에도 북한군은 태플릿 중령의 부대 등 미군 3개 부대를 공격했다. 남산으로 향하던 육군 32연대 2대대 F중대와 G중대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서 처음에는 후퇴를 한 후 다시 반격했다. 북한군은 시체 400구를 남기고 도망갔다. 한 기자가 1연대장 풀러 대령에게 전날 앨먼드 소장이 말한 “도망가는 적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도망가는 적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저기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있는 적군 수백명 뿐이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고 말했다. 앨먼드 소장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던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 날 앨런드 소장의 10군단 사령부는 “10군단 소속 부대는 서울을 장악했다. 9월 25일 14시를 기해 적의 서울 방어선은 와해됐고, 적은 서울 북쪽으로 도망갔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그러나 기자들은 그런 발표를 믿지 않았다. AP 통신 기자는 “서을이 해방됐다면 서울 안에 남아있는 적군은 그것을 모르는 모양이다”고 송고했고, 타임지 기자는 “아직도 마포대로에선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썼다. 서울을 장악하기 위해서 해병은 이틀 동안 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북쪽으로 진군한 5연대는 9월 28일이 돼서야 남쪽에서 밀고 올라간 1연대와 만날 수 있었다.

탱크를 앞세운 육군 7기병 사단은 28일에야 보병 7사단과 수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부대도 북한군을 섬멸하면서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왔다. 펠로프 대령이 이끄는 38연대는 고창 부근에서 북한군 2사단 방어선을 돌파하고 우회해서 200명을 사살하고 45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고창을 장악한 펠로프 대령의 부대는 9시간 동안 72마일을 남쪽으로 진격해서 전주로 진격하면서 300명 이상의 적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연료가 떨어져서 하루를 쉰 38연대는 29일에 한강 남쪽에 도달할 수 있었다. 8군이 드디어 서울에 도달한 것이다.

서울 시내에 진입한 풀러 대령의 1연대는 소련 대사관의 소련 국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걸었다. 태플릿 중령의 5연대 3대대는 중앙청과 경무대를 향해 진격했다.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최후 방어를 궤멸시킨 5연대 3대대는 광화문 대로로 진입했고, G중대는 중앙청에 도달해서 공산당 깃발을 내렸고, 해럴드 비버 중사가 성조기를 올렸다. 이들과 함께간 한국 해병 2명이 태극기를 계양했다. 9월 29일에도 해병 1연대와 7연대는 단위 부대별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날에만 여러 명의 해병이 전사했다. 서울 수복 전투 마지막 사흘 동안에만 해병은 70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8월 2일에 부산에 상륙한 후 9월 29일까지 해병은 도합 3,938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해병은 이렇게 피를 흘리고 싸웠지만 앨먼드 소장은 맥아더와 이승만의 서울 수복기념식을 어떻게 화려하게 할 것인가만 생각했다. 앨먼드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비행기로 내릴 김포공항과 중앙청에 해병 의장대를 도열시키리고 명령을 내렸다. 화가 치민 스미스 소장은 10군단 참모장에 전화를 걸어서 “아직도 전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맥아더가 앨먼드의 미친 짓을 취소해서 없었던 일이 됐다.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가 탄 비행기가 김포에 도착했고, 한 시간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이 맥아더가 내 준 개인전용기 편으로 부산을 출발해서 김포에 도착했다. 무초 미국 대사와 워커 장군, 스미스 소장과 크레이그 준장, 그리고 해군과 공군의 지휘관들이 김포에 도착했다. 풀러 대령과 머레이 대령도 전투 지휘소를 잠시 떠나서 김포에 도착했다. 최전선의 냄새가 밴 풀러 대령이 탄 지프가 김포 공항에 진입하려 하자 육군 헌병장교가 참모가 탄 차는 들어 갈 수 없다고 저지했다. 풀러 대령이 “저 새끼가 비키지 않으면 밀어 버려 !”라고 고함치자 헌병장교는 물러섰다. 리첸버그 대령이 이끄는 7연대는 이 때에도 서울 북쪽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앙청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맥아더는 “유엔군은 한국의 수도를 해방했다, 대통령 각하, 서울은 이제 수복되었다”고 말했고, 감격한 이승만은 “한국민을 대표해서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고 답했다. 


서울 수복 그 후

9월 27일에 합참은 맥아더에게 38선 북쪽으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10월 1일, 한국군 1사단은 동해안 지역에서 38선을 넘어갔고, 10월 7일에 기병1사단도 서부 전선에서 30선을 넘었다. 맥아더는 추수감사절까지 전쟁을 끝날 것이며 미군은 크리스마스까지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헛된 것임을 알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는 서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만났다. 이미 두번이나 워싱턴에서 만나자는 대통령의 초청을 멀다고 거절한 맥아더는 하와이에서 만나자는 트루먼의 제안에 대해 도쿄에서 멀다는 이유로 웨이크 섬에서 만나자고 해서 성사된 것이다. 웨이크 섬까지 날라온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맥아더는 경례를 하지 않았고 트루먼은 이를 못본체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와 만나 유엔군이 얼마나 북진할 것이며, 언제 미군 전투부대가 철수할 것이고,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  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했다. 처음으로 만난 두사람은 이런 문제를 솔직하게 논의하지 못했다. 맥아더는 평양이 1주일 내에 함락될 것이라고 장담했을 뿐이고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았다. 트루먼도 이에 관한 맥아더의 생각을 분명하게 묻지 않았다.

10월은 미군에게 가장 좋았던 달이었다. 미국 내에선 승전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트루먼과 맥아더가 만날 즈음 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병 1사단은 부산으로 철수한 후 상륙함정 편으로 원산을 향했다. 원산은 이미 한국군 1군이 밀고 올라가서 점령했기 때문에 상륙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맥아더는 전쟁 초기인 7월에 북한군을 패퇴시킨 후 한국을 통일시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맥아더는 38선을 통과해도 좋다는 합참의 승인을 압록강까지 북진해도 된다는 의미로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맥아더의 독단적인 전쟁수행에 대해 워싱턴의 고위 장성들은 비판적이었다. 맥아더에 내놓고 비난을 했던 장성은 매튜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도쿄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어서 미군 전사상자가 늘고 있다면서, 그런 맥아더가 ‘비정상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합참의 최고지휘관들이 조지 마셜 국방장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을 만나 회의를 해도 맥아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끝나자 리지웨이는 회의장을 떠나는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대장에게 “왜 합참은 맥아더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가?”고 따져 물었다. 반덴버그 대장은 “지시를 내리면 무엇하나. 그는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인데.”고 했다. 리지웨이가 “합참은 지시를 위반하는 지휘관을 해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군님 ?”하고 되묻자, 반덴버그 대장은 리지웨이를 물끄러미 보고 그냥 걸어갔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워싱턴 정가(政街)와 언론이 맥아더를 전지전능한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트루먼 대통령과 오마 브래드리 합참의장은 맥아더의 북진(北進)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가 북진 욕망에 불타오를 때 서울을 수복한 미 해병과 육군은 서울 북쪽에 위치를 고수하면서 그간의 전투에서 온 피로를 회복하고 있었다. 이런 틈을 타서 25,000명-30,000명에 이르는 북한군은 동쪽 해안을 통해 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미군은 당시 전투를 하지 않은 예비병력인 미 육군 7사단의 기갑병력을 동원해서 북한군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동해안 쪽으로 북상해 온 한국군 3사단이 이들을 추격했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워커가 지휘하는 8군은 서쪽으로 북진하고 앨먼드가 지휘하는 10군단은 동쪽으로 북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도무지 북진하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정확한 것이 없었다. 미군 지휘부가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까지만 북상하도록 분명하게 지시했더라면 중공군이 개입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고 유엔군은 방어하기 쉬운 평양-원산을 고수했을 것이라고 전쟁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나중에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방송은 미군과 한국군이 만주에 근접하게 되자 비로서 미국에 대해 경고하고 나섰다. 승리에 도취된 오만한 맥아더는 중국 개입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합참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장진호 전투

서울 수복의 선봉에 섰던 해병 5연대 3대대 태플릿 중령은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평양, 원산, 흥남-함흥을 점령한 우리가 왜 군사적 가치가 없는 압록강까지 올라가서 중공군을 자극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고 썼다. 태플릿 등 일선 지휘관들은 중공군이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다는 징후를 파악하고 있었다. 중립국인 인도의 주미 대사 파니카르와 인도 총리 네루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은 중간선거 운동기간 중이었고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정부 내의 공산당 간첩 폭로로 인해 맥아더를 제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울 수복 후 10군단에는 기존의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 외에도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배속되었고 추가로 미 육군 3사단이 추가될 예정으로 되어 있어서 그 규모가 10만명이 넘었다. 10군단 사령관 앨먼드 소장은 자기가 워커가 지휘하는 8군 보다 먼저 압록강에 도착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11월 1일 밤 10시, 압록강에서 50마일 떨어진 서해에서 멀지 않은 운산에 올라간 8군 산하의 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를 중공군 2개 사단이 급작히 공격했다. 11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6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고 한국군 15연대는 사실상 괴멸되어 버렸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력이 운산을 빠져 나오자 워커는 8군 전체에 대해 청천강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11월 6일에도 중공군은 미군과 영국군 27여단을 공격해서 미군과 영국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다. 이 떼 미군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끝없이 사살했지만 인해전술로 닥쳐오는 중공군에 의해 결국에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8군이 중공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자 앨먼드 소장은 8군이 경계를 소홀히 해서 그렇게 됐다고 비난했다. 최근에 공개된 미 국가정보국 비밀문서에 의하면 11월 초에 8군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중국정부의 ‘경고’였다고 한다. 만일에 미군이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여서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평양-원산-함흥 전선을 고수했더라면 전쟁을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앨먼드 소장은 10군단이 압록강에 먼저 도달한다면서 해병 1사단에게 함흥에서 북상하도록 명령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앨먼드의 참모장을 지낸 클라크 러프너 준장은 맥아더의 지시는 ‘미친 짓’이라고 했고, 당시 앨먼드의 참모이던 맥카프리 대령도 나중에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당시 10군단 사령부는 “완전히 미쳤다”고 술회했다. 운산에서 중공군의 공세 후 전선에서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이러한 침묵은 중국 정부가 미군의 향방을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앨먼드 소장은 해병 1사단에 대해 빨리 진격하라고 독촉을 했다. 하지만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5연대와 7연대에 대해 “천천히 전진하고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1사단 참모였던 갓볼드 중령은 “스미스 소장은 우리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음을 이미 느꼈다고 생각된다”고 회고했다. 11월 21일, 10군단 소속 7사단 17연대 선발대가 압록강에 드디어 도달했다. 최전선에 여간해서 가지 않던 앨먼드는 현장에 날라가서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11월 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영하 화씨 30-40도의 매서운 추위가 닥쳐온 함경도 내륙에 들어간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 장병들에게 칠면조 특식이 보급됐으나 먹기도 전에 얼어 버렸다.

11월 25일 새벽 어두울 때, 태플릿 중령이 이끄는 5연대 3대대가 공격을 받았다. 해병의 반격으로 적군은 3구의 시신을 남기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태플릿 중령은 소대 병력을 증강해서 추적을 하라고 지시했다. 추적을 나간 소대는 엄청나게 많은 적 병력과 조우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헬기를 타고 전방을 살펴본 태플릿 중령은 소대장에게 대대 방어선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태플릿 중령은 헬기에서 중공군이 파놓은 참호와 차량이 지나간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대대본부로 돌아온 태플릿은 머레리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머레이 중령은 육군 32연대가 5연대 3대대가 있는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11월 26일 아침, 5연대는 얼어 붙은 장진호 서쪽을 타고 북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유담리를 3마일 앞둔 지점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앞서 유담리에 도착한 7연대도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머레이 중령과 리첸버그 대령은 5연대와 7연대를 합동으로 지휘하면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하갈우리 방향을 향했다. 5연대와 7연대는 12월 4일에야 하갈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해병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의 하나로 뽑히는 유담리 전투이다.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좁은 계곡을 지킨 치열한 백병전 끝에 사수한 7연대 F중대장 윌리엄 바버 대위와 눈과 얼굴에 중상을 입고도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패퇴시킨 7연대 E중대 소대장 존 얀시 중위의 무공담은 ‘전설’로서 남아 있다. 5연대와 7연대는 부상자와 전사자 시신, 그리고 모든 장비를 하갈우리로 가져 올 수 있었고, 하갈우리의 활주로에서 부상 당하거나 동상을 입고 거동을 못하는 5,400명이 수송기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2월 6일, 스미스 소장은 하갈우리를 버리고 흥남쪽으로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 기자가 “후퇴하는 것이냐?”고 묻자 스미스 소장은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갈우리에서 9마일 아래에 있는 고토리에 도착하는데 꼬박 24시간이 걸렸는데, 하룻동안 해병 1사단은 600명의 전사상자를 내면서 치열한 교전을 하면서 행군을 해야만 했다. 고토리에서 더 이상 수송할 수 없게 된 전사자 시신을 묻고 부상자를 수송기 편으로 후송시킨 1사단은 흥남에 도착해서 철수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사에 기록된 장진호 전투인데, 열흘 동안 중공군 34,000명이 전사하고 30,000명이 얼어 죽었으며, 미 해병 900여 명이 전사하고 12,000명이 부상당하거나 동상을 입었다. 나쁜 기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병 항공기가 1,300회 이상 출격해서 지상의 동료들을 지원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미 육군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11월 29일, 육군 2사단과 25사단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당황한 2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 전선을 제일 처음 돌파했던 페플로 대령이 이끄는 2사단 9연대와 영국군 및 터키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2사단은 선천을 거쳐 평양을 내어주고 계속 후퇴해야만 했다.

12월 23일,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24사단 본부를 방문하고 은성무공훈장을 탄 아들을 만난 다음 영국군 사령부로 향하던 중 빙판 길에서 한국군 탄약수송 트럭과 충돌해서 사망했다. 평소에 지프를 빨리 몰아서 언젠가 그가 2차 대전 때 상관으로 모셨던 조지 패튼 장군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현실이 되고 말았다. 워커의 후임에는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되었고,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본국에 돌아 온 병사는 중상을 입었거나 전사한 장병 뿐이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까지 계속되었고, 한국은 보다 방어하기 좋은 고지를 확보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6년이 지났지만 미국의 최강부대인 해병대를 없애자는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 후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다. 맥아더는 미국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간다”고 연설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트루먼은 “빌어먹을 개소리”라고 했다. 맥아더를 해임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도는 미국 대통령 중 최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전쟁에서 맥아더가 행한 바는 영웅적인 면보다는 보다 많은 비극을 초래했다고 보는데 일치를 보이고 있다. 반면 트루먼은 미국 대통령 중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병여단장으로 절망적이었던 낙동강 전투를 이끌었던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은 1951년 1월 말에 소장으로 진급되어서 본국으로 발령이 났다. 한국을 떠나면서 크레이그는 실망했고 본국에 가서는 해병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주위에서 만료했자만 그는 5달 후 전역하고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특히 앨먼드 소장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았다. 그는 혹한의 북한으로 해병 1사단을 보낸 앨먼드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다. 또한 크레이그의 부친이 위독해서 스미스 소장은 부사단장이던 그를 본국으로 급히 보냈는데, 앨먼드는 그에게 귀환하라고 명령했고 그가 떠나고 이틀 후에 부친은 사망한 데 대해 결코 앨먼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장진호 철수 작전에 참여하기는 너무 늦었다. 샌디에고 지역으로 은퇴한 그는 1994년 12월 94세의 나이로 잠자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

크레이그 준장의 부관으로 부산에서 장진호까지 같이 했던 존 벅 중위는 소령으로 전역한 후 CIA에서 일하다가 샌디에고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그는 크레이그 준장이야 말로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기운을 냈다. 그에 대한 나의 존경을 어떻게 표현할 방도가 없다”고 회고했다.

5연대장이던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은 1968년에 소장으로 예편했다. 33년 동안 해병에 몸담고 있으면서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에서 싸웠고 한국전쟁에선 낙동강에서 인천과 서울을 거쳐 장진호에서 싸운 그는 명예훈장을 제외한 모든 탈 수 있는 훈장을 받았다. 캠프 펜들턴 기지 근처의 오션사이드에로 은퇴한 그는 2004년에 91세로 타계했다.

1연대장이던 루이스(‘체스터’는 애칭이다) 풀러 대령은 1951년에 준장으로 진급해서 크레이그 준장의 후임으로 1사단 부사단장이 됐다.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해병 2사단장과 3사단장을 역임했으나 건강상 이유로 1955년 말에 전역했다. 그는 1971년 10월에 73세로 타계했다.

해병대 본부에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해병 1사단 참모로 낙동강에서 싸웠고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브라이트 갓볼드 중령은 머레이 중령의 후임으로 5연대장을 맡았다. 1958년에 준장으로 예편한 그는 국방부 관련 일로 한국을 몇번 방문했었다. 전역한 후에도 정부, 기업 및 대학에서 많은 직책을 거친 그는 현재 텍사스 댈러스에 살고 있다.

낙동강 전투를 처음 치렀고 인천에 처음 상륙했으며, 서울에도 처음 진입해서 중앙청에 성조기를 게양했고, 장진호 지역에서도 중공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5연대 3대대의 대대장을 지낸 로버트 태플릿 중령은 장진호에서 심한 동상을 입어서 자신과 생사를 같이 했던 부대원들을 뒤로 두고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동상 후유증으로 그후 평생 다리를 절었던 그는 1960년에 전역하고 버지니아 알링턴에서 은퇴생활을 했다. 두개의 은성무공훈장 등 많은 훈장을 탄 그는 말년에 한국전쟁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다크 호스 식스’(자신의 호출명)을 냈다. 그는 “5연대 3대대에서 싸운 그들은 명예와 용기, 충직함과 충성심이 충만했다. - - 그들은 리더를 잃으면 그들 자신이 리더가 됐다.고 회고했다. 태플릿은 2004년 12월에 86세로 타계했다.

라이프지에 사진이 나와서 유명해 진 프랜시스 (‘아이크’) 펜튼 대위는 5연대 1대대 B중대장으로 낙동강에서 인천과 서울에서 싸웠다. 크레이그 준장과의 약속대로 서울이 수복된 후 발령을 받아 부대원들을 뒤로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960년에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조지아 주에서 기업 고문을 하다가 1998년 10월에 타계했다. 그의 아들도 해병대령으로 예편했고, 손자인 패트릭 펜튼 해병중위는 2009년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고 있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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