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로버트 바이스너, 딘 애치슨 (2006년)
2010-03-03 00:43 2,808 이상돈



로버트 바이스너, 딘 애치슨 (2006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800쪽)

Robert Beisner, Dean Acheson (2006, Oxford Univ. Press, 800 pages, $35.00)

한국전쟁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년-1971년)은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발언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이 오판(誤判)하도록 한 장본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북진(北進)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옳았으며, 비겁한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 때문에 통일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많다.

하지만 맥아더에 대한 과대평가와 트루먼과 애치슨에 대한 과소평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한국전쟁 전후(前後)의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트루먼과 애치슨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06년에 역사학자 로버트 바이스너 교수가 펴낸 ‘딘 애치슨 : 냉전(冷戰)에서의 생애’(‘Dean Acheson : A Life in the Cold War’)은 딘 애치슨의 일생과 한국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출생과 성장

딘 애치슨은 1893년 4월 11일에 코네티컷 州(주) 미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系 아일랜드人으로, 성공회 신부였고, 어머니는 캐나다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영국을 매우 좋아해서 애치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에 애치슨은 매사추세츠의 명문 사립고등학교 그로턴에 입학했다. 애치슨은 그로턴에서 학업성적이 좋지 않아서 거의 퇴교 당할 뻔했고, 1911년에 평균 68점으로 24명의 졸업생 중 꼴찌로 졸업했다.
애치슨은 그로턴에서 상급생이던 애버렐 해리먼을 만나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예일대학에 진학한 애치슨은 공부는 등한시 하고 여러 가지 과외활동을 했다. 애치슨은 웰즐리 대학에 다니던 누이동생의 친구인 앨리스를 만나 결혼했다.

예일을 졸업한 애치슨은 잠시 일본을 여행한 후에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애치슨은 펠릭스 프랑크퍼터 교수의 강의에 매료되었다. 애치슨은 1918년에 5등으로 졸업했고, 프랑크퍼터의 소개로 루이스 브랜다이스 연방대법관의 서기로 일했다.  1921년에 애치슨은 ‘코빙턴, 벌링 및 러블리’라는 워싱턴에서 급성장하는 로펌에 취직했다. 1926년에 파트너가 된 애치슨은 민주당 정치에도 간여하게 됐다. 부친과 프랑크퍼터 교수, 그리고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영향으로 애치슨은 진보성향의 민주당을 택한 것이다. 국제법 변호사로서 명성을 떨친 애치슨은 193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재무차관과 국무차관보 시절

12년 만에 들어선 민주당 정권의 재무장관 윌리엄 우딘은 애치슨에게 차관직을 제의했고, 애치슨은 이를 수락했다. 우딘 장관이 건강상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애치슨은 사실상 장관직을 수행했다. 애치슨은 인플레이션를 인위적으로 조장해서 경기를 부양시키려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충돌했다. 화가 난 루스벨트는 애치슨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고, 애치슨이 그것을 읽기도 전에 애치슨이 사임했다고 발표해 버렸다. 애치슨의 첫번째 공직생활은 이렇게 반년 만에 끝났다. 우딘 장관도 사임했고, 애치슨은 로펌으로 돌아왔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에 따라 유럽에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미국정부가 영국에 군함을 임대해 줄 수 있는 법안을 기초해 준 인연으로 국무장관 코델 헐은 애치슨에게 국무차관보를 맡아 달라고 했고, 애치슨은 경제문제 담당 국무차관보가 되었다. 애치슨은 루스벨트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애치슨은 루스벨트가 국무부를 불신하고 그때그때 특사를 통해 외교문제를 다루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애치슨은 루스벨트의 심복인 아돌프 벌리 국무차관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재무부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을 설립하는 일에 착수했고, 애치슨은 의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44년 11월 코델 헐 장관은 루스벨트와의 대립에 지친 나머지 사임했고, 기업가 출신인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가 장관으로 취임했다.

트루먼, 애치슨을 국무차관에 임명하다

루스벨트가 사망함에 따라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부통령과 국정현안을 의논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미주리 시골 출신인 트루먼은 대외문제 밝지 못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자 트루먼은 전현직 고위직과 만나 소련과의 관계, 전후(戰後) 일본의 처리 등을 자문했다. 스팀슨 전쟁장관은 소련과 신중한 협력을 주장했고, 해리 홉킨스와 헨리 월러스는 소련과의 긴밀한 협조를 주장했다. 1945년 6월, 스테티니우스 국무장관이 사임하자 트루먼은 상원의원을 지낸 제임스 번스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번스 장관은 소련에 대해선 홉킨스-월레스의 친소(親蘇)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트루먼에게 권했다. 트루먼은 당시 소련 주재 대사이던 애버렐 해리먼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공산체제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소련의 진면목을 잘 알게 된 해리먼은 이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트루먼에게 전했다.

              국무차관보이던 애치슨은 주일(駐日) 대사를 지내다가 국무차관이 된 조지프 그루와 사이가 안 좋았고, 새로 임명된 번스 장관도 좋아 하지 않았다. 포츠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애치슨은 사표를 제출하고 부인과 함께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번스 장관은 애치슨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당신을 국무차관으로 원한다”면서 사표를 되돌려 주었다. 8월 16일 트루먼은 그루 국무차관을 해임하고 애치슨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준비없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방황을 거듭했다. 애치슨이 차관이 됨에 따라 그루 전(前) 차관의 인맥이던 ‘일본 사단’(‘Japan Crowd’)이 국무부에서 물러났고 대신에 애치슨 인맥(흔히 ‘China Hands’라고 불렀다)이 등장했다. 이런 변화가 있는데다 트루먼과 번스 장관이 호흡을 맞추지 못해서 애치슨과 국무부 관료들은 헛돌고 있었다. 국무부가 전후(戰後) 상황에 대해 지침을 주지 못하자 미국이 진주한 지역은 현지 사령관이 알아서 관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은 러시우스 클레이 대장이, 일본은 맥아더 장군이, 그리고 한국은 하지 장군이 각자 알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번스 장관은 차관인 애치슨을 젖히고 일을 처리했고, 이에 실망한 애치슨은 1946년 4월 번스 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던 중 번스 장관이 백악관에 보고하지 않고 소련과 핵 문제를 논의한 사건이 발생해서 트루먼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트루먼 보다 경력이 출중한 번스가 대통령을 무시했던 것이다.
소련에 대한 정책을 두고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농무장관과 부통령을 지내고 당시에는 상무장관이던 헨리 월러스는 소련에 대해 강경책을 쓸수록 소련은 더욱 강경해 질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애치슨을 비난했다. 번스 장관은 애치슨과 월러스 중 한 사람을 내보내야 한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다. 1946년 9월, 예상을 뒤엎고 트루먼은 월러스를 파면했다. 이로써 번스의 영향력도 약해졌고, 트루먼이 애치슨을 신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번스 장관은 국제회의 때문에 워싱턴을 자주 비웠고, 그 사이에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외교를 가르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트루먼과 애치슨’이란 명(名)콤비가 탄생했다. 애치슨이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국무장관으로 기록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트루먼은 소련 주재 대사이던 애버렐 해리먼으로부터 소련이 야기하는 위험을 듣고 있었다. 반면 애치슨은 소련에 대한 경제원조와 최혜국 대우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스탈린이 서방을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함에 따라 1947년 초부터 애치슨은 확고한 냉전론자(cold war warrior)로 변신했다. 훗날 애치슨은 스탈린이 냉전(冷戰)을 시작했고, 자기는 거기에 대응해야 했다고 술회했다.
다시는 핵무기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애치슨은 핵에 관해서는 소련과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도 그런 입장이었지만, 제임스 포레스탈 해군장관은 핵 기술은 미국의 재산이고 소련은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고 반대했다. 스팀슨과 애치슨은 종국적으로 모든 핵무기를 국제기구에 이관해서 소련의 핵무장을 막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로스 알라모스 핵 연구시설에 침투한 소련 간첩들이 미국의 원자폭탄 기술을 이미 소련에 유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46년 2월 모스코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참사관이던 조지 케냔은 국무부에 보낸 장문(長文)의 전문(電文)에서 소련이 야기하는 위협을 경고했다. 그 해 3월, 트루먼은 미국을 방문 중인 윈스턴 처칠을 만났다. 미주리 주(州) 풀턴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처칠은 유명한 ‘철(鐵)의 장막’ 연설을 했다. 언론인 월터 리프만은 이 연설을 맹비난했다.
            애치슨에 닥친 첫 시련은 터키였다. 소련이 터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에 대해 연고권을 주장하고 나온 것인데, 터키가 이에 굴복하면 소련군이 터키 영토로  진주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터키는 전쟁의 위험성을 감수할 정도로 미국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터키를 방어할 의지가 확고함을 깨달은 소련은 후퇴했다. 터키 사건을 계기로 애치슨은 미국 외교를 냉전의 틀 속에서 이끌어 갔다.
            1947년 초, 트루먼은 제2차 대전의 영웅인 조지 마셜 장군을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3월 12일 트루먼은 하원에서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그리스에 대한 2억 5천만 달러의 경제원조가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이 천명된 것인데, 이를 실제로 마련한 사람은 애치슨이었다. 애치슨은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 해 7월에는 유럽의 재건을 돕기 위한 ‘마셜 플랜’이 발표되었다. ‘마셜 플랜’도 애치슨의 작품이었다. 애치슨은 의회와 여론을 상대로 마셜 플랜의 당위성을 홍보했다. 애치슨은 1947년 6월에 국무차관직을 사임했지만, 그 후에도 ‘마셜 플랜을 위한 시민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마셜 플랜’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 의회는 ‘마셜 플랜’을 실현하기 위한 ‘유럽 부흥법’을 통과시켰고, 트루만은 1948년 4월에 이에 서명했다.

            국무장관이 되다

            친소(親蘇) 성향의 헨리 월러스(1933-40년간 농무장관, 1941-44년간 부통령, 1945-46년간 상무장관)가 민주당을 탈당해서 진보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섬에 따라 트루먼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손쉽게 지명됐다. 공화당은 1944년에 후보로 나섰던 토머스 듀이 뉴욕 주지사를 지명했다. 애치슨은 진보성향의 민주당원들에게 트루먼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트루먼의 인기는 높지 않아서 재선 전망은 불투명했지만 결국 트루먼이 승리했다. 당시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지(紙)가 토머스 듀이의 승리를 전하는 신문을 서둘러 찍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장관을 새로 임명해야만 했다. 조지 마셜 국무장관이 오랜 공직생활로 건강이 나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서 반덴버그 공화당 상원의원이 양당 협조차원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애치슨은 당시 주영(駐英) 대사이던 애버렐 해리먼이 국무장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  트루먼은 애치슨을 불러서 국무장관을 맡아 달라고 했다. 트루먼은 애치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보다 국무장관 일을 잘 할 사람은 20명은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그들을 모른단 말이야. 나는 당신을 알거든.”

            상원 청문회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애치슨에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상원은 애치슨을 83대 6으로 인준했다. 새 국무장관에 대해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장대한 몸집과 고급 옷에 대한 집착이 신문에 가십거리로 올랐다. 귀족적 성향과 그로턴, 예일대, 하버드 로스쿨로 이어지는 출신학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애치슨의 국무부

        애치슨과 트루먼이 서로 높은 신뢰를 갖고 있었고, 애치슨은 국무부가 대외정책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치슨 장관 시절 국무부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애치슨은 트루먼이 대외관계에 관한 결정을 할 경우에 자신이 간여하지 않으면 불안해 했다. 트루먼이 웨이크 아일랜드로 맥아더를 만나러 혼자 갔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국무장관으로서 조지 마셜은 명령을 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애치슨은 아래로부터 의견을 물어 오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개방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정책 입안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과 인종에 대해선 전통적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가 장관을 하는 동안에 흑인과 여성은 국무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애치슨의 주된 관심은 항상 유럽이었다. 애치슨은 중남미에도 관심이 없었다.
1950년 초부터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간첩혐의를 받고 있었던 국무부 고위관리 앨저 히스 문제로 애치슨을 공격하자 애치슨의 영향력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공산권에 대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주창한 조지 케냔과 애치슨과의 관계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지만, 애치슨은 케냔을 존중했었다. 미국이 소련에 대하여 필요 이상 강경한 대립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 케냔은 국무부에서 사임했다. 애치슨은 케냔이 떠난 자리를 폴 니츠를 정책실장으로 임명해서 메웠다.  니츠는 소련이 세계를 제패(制覇)할 야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가안보회의 68호 보고서(NSC-68)’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조지 마셜에 의해 국무부에 발탁되어 온 딘 러스크는 유엔담당 차관보이었는데, 1950년 3월에 부차관보로 직급을 낮추어서 국무부에서 기피 보직이었던 아시아국(局)을 맡았다. 애치슨은 러스크를 좋아 했지만 국무부에서 러스크의 역할은 크지 못했다. 1951년 말, 러스크는 국무부를 사임하고 록펠러 재단의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1947년에 국가안보법(The National Security Act)이 제정되어서 전시(戰時)에 활동했던 대외첩보국(OSS)가 중앙정보국(CIA)로 바뀌었고, 국가안보회의(The National Security Council)가 새로 탄생했다. 애치슨은 두 기관을 모두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애치슨은 당시 국방장관이던 루이스 존슨과 사이가 나빴다. 존슨 장관은 합동참모본부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니츠는 ‘68호 보고서’를 만들 때에 존슨 장관을 젖히고 합참과 직접 협의를 했다. 

            대소(對蘇) 정책 

          1949년 들어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는 독일이었다. 애치슨은 독일을 중립국가로 유럽의 중심부에 두는 방안을 좋아 하지 않았다. 독일이 소련의 영향력에 굴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미국 영국 및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서독을 서방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치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탄생에 처음부터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을 대표해서 북대서양조약에 서명했다. 이제 애치슨은 소련 때문에 동서 대립은 불가피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애치슨은 마셜 플랜, NATO, 그리고 상호방위조약으로 서유럽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병력은 감축돼 있었고, 핵 전력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소련은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중국 본토는 공산당 수중으로 넘어갔다.

          아시아

        트루먼 대통령은 아시아에 대해 지식이 없었다. 국무부는 전후에 공백상태가 되어 버린 아시아 문제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일본 문제는 맥아더 장군에게 위임했고, 조지 마셜은 중국 내전을 협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는 육군의 소관이었다. 국무부는 영국에게 캐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라고 부탁했고,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를 다시 장악하려는 프랑스에 대해선 불만의 뜻을 전했다.
        국방부와 마찬가지로 국무부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를 좋아 하지 않았다. 애치슨은 장제스를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치슨이 마오쩌둥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국제법 법률가답게 애치슨은 어떠한 정부든 중국 대륙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정부를 미국이 승인해야 한다고 믿었다. 애치슨은 아시아에서 미국이 다시 전쟁을 하게 될 가능성은 생각에 두지를 않았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이러한 태도로 인해 국무부가 아시아 정책에서 실패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차이나 로비’라고 부르는 친(親)장제스 로비가 의원들을 공략했고, 상당수의 공화당 의원들이 이에 동조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비 축소를 지지했고, 각군의 지휘부는 제한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애치슨은 소련의 위협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트루먼은 애치슨의 이런 충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치슨 자신도 중공이 장제스 정부가 둥지를 튼 대만을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이 대만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공화당의 보수파 의원들은 반발했다. 미국이 중공 정부를 승인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애치슨은 “중공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중공을 승인하기는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지 마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중국 문제에 대해 애치슨은 애착이 없었다.

        한국 방위 문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에 대해 언급을 했다. 애치슨은 미국의 의무에는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은 아시아 본토를 방위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치슨은 “알류선 열도에서 일본, 그리고 류큐 열도와 필리핀에 이르는 방위선 안의 본질적 부분(‘essential parts)은 미국이 방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애치슨은 “이 방위선 밖은 자위(自衛)와 유엔에 의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일본에 대해서 미국은 직접적 책임이 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정도가 덜하다”고 했다. 한 기자가 “만일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미국이 방위할 것인가?” 하고 질문하자, 애치슨은 “그 점은 국방부에 문의하라”고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이 연설은 북한과 소련에 대해 잘못된 시그널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연설이 있은 당시에 이를 문제 삼은 언론은 없었다. 월터 리프만과 제임스 레스턴도 모두 훌륭한 연설이라고 칭찬했다. 다만 1월 20일, 장면(張勉) 주미 한국대사는 이 연설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고 국무부에 질의를 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 담당관은 한국정부 수립에 유엔이 중추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한국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답했다.

        대만과 한국에 희망적인 사건은 1950년 3월, 아시아통(通)인 딘 러스크가 아시아 담당 부차관보로 임명된 일이다. 차관보급이었던 러스크는 직급을 강등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시아국(局)을 맡겠다고 자원했던 것이다. 러스크는 대만이 미국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거의 유일한 국무부 고위관료였다. 

      애치슨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北進)통일을 하겠다고 자주 공언한 데 대해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당시 CIA는 38선 북쪽의 북한군의 동향은 한국군의 공격적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 애치슨은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치슨 뿐 아니라 워싱턴 정가(政街) 전체가 만일에 전쟁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소련과 유럽을 놓고 벌이는 세계대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공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은 소련과 중공에 너무나 노출돼 있어 미국이 방위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애치슨은 이승만 정부의 무능력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국무부 관료들은 이승만 정부가 장제스 정부의 전철(前轍)을 밟을 것으로 걱정했다. 1950년 6월에 되자 CIA는 북한이 군대를 38선 북쪽에 근접 배치해 놓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CIA는 김일성이 소규모 게릴라를 침투시키는 외에 대규모 공격을 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1950년 6월 19일, 대통령 특사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존 포스터 덜레스는 38선 전방(前方)을 살펴 보았다.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고 달랬다. 그러나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해 4월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할 것 같지 않다”면서 남침(南侵)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남침을 주장했고, 스탈린은 이를 승인했고, 마오쩌뚱은 이에 동의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한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는 워싱턴 시간으로 6월 24일 토요일 오후 3시였다. 6월 말의 워싱턴은 매우 무더웠다. 그 날 애치슨은 더위를 피해 메릴랜드의 헤어우드 저택에서 쉬고 있었다. 주한 미국 대사 무초와 한국에 있던 UP 통신 기자가 긴급한 소식을 워싱턴에 전했다. 두개의 긴급한 메시지는 워싱턴 시간 저녁 8시 30분에 도착했다. 국무부는 무초 대사에게 “자세한 상황보고를 하라”고 지시했고, 무초 대사는 “전면적 공격으로 보인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국무부에 급히 달려 온 딘 러스크는 밤 10시에 잠 들고 있던 애치슨을 깨워서 이 소식을 알렸다. 애치슨은 미주리의 인디펜덴스에 가 있던 트루먼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미주리 현지 시각으로 밤 9시 20분에 트루먼은 애치슨의 전화를 받았다. 국무부 담당관은 그날 밤 3시에 트리기브 리 유엔사무총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워싱턴 시간으로 6월 25일 이른 아침, 애치슨은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으며 북한군이 서울을 향해 빨리 내려 오고 있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미주리에서 전화를 받은 트루만은 애치슨에게 “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해”라고 말했다. 방금 한국에서 돌아 온 덜레스는 “소련과 부딪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미군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워싱턴으로 곧 돌아오도록 요청했다. 미주리에서 전용 비행기에 오르면서 트루먼은 핵심 보좌관들에게 저녁 식사 때 모이라고 지시했다. 그날 저녁 블레어 하우스에서 열린 만찬에는 애치슨, 러스크, 존슨 국방장관,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3군 총장 등이 참석했다.
저녁을 겸한 긴급한 회의를 마치고 트루먼은 도쿄에 있던 맥아더에게 무기와 탄약을 긴급하게 한국군에게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회의에선 미국이 지상군을 보내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당연하게 받아 드리고 있었다. 오직 존슨 국방장관만 지상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6월 26일, 트루먼은 만일에 한국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다른 나라가 또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 주미 한국대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데리고 가서 트루먼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날 저녁에 전시(戰時) 각료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때 트루먼과 애치슨, 그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미 지상군을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6월 28일, 한국 현지를 갔다 온 맥아더의 참모는 침략군을 38선 북쪽으로 몰아 내기 위해선 병력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해 왔다. 의회에서는 공화당의 보수파 리더인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이 애치슨을 경질하고 아시아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인물을 국무장관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은 애버렐 해리먼을 찾았고, 해리먼은 12시간 만에 워싱턴에 도착해서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했다. 트루먼은 소련이 북한의 침공을 기획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란과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소련이 갖고 있는 의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정보당국에 지시했다. 국무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병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말레이와 인도차이나에서 각기 전쟁을 하느냐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영국은 해군 함정을 파견해 주겠다고 응답했다.

        6월 29일, 호주 캐나다 그리고 네델란드가 군사력을 지원하겠다고 국무부에 알려왔다. 트루먼은 미국은 단지 침략군을 침공 이전으로 격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오후에 블레어 하우스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트루먼은 중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군사력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트루먼은 38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공습을 허가했지만, 만주에 대한 공습은 불허한다고 밝혔다. 대만의 장제스 정부가 병력 33,000명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자 트루먼은 이를 받아드리려 했다. 애치슨은 장제스 군대의 참전은 중공을 자극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트루먼을 만류했다.

        6월 30일, 전날 한국 현지를 보고 온 맥아더는 추가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트루먼은 장제스의 군대는 훈련과 장비 면에서 이승만의 군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애치슨의 권고를 받아드려서 장제스의 파병제의를 거부하기로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일본에 있는 미군 병력을 차출해서 한국에 보내도록 했다. 맥아더는 그날 밤으로 파병 준비를 시켰다.
7월 1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한반도 해상을 봉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트루먼은 한국 문제를 신속하게 유엔에 회부한 애치슨의 결정을 칭찬하면서, 애치슨에게 “당신은 최고의 국무장관”이라고 치하했다. 트루먼은 애치슨의 권고를 받아드려 존슨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지 마셜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한국전쟁

      맥아더 휘하의 본대 병력이 부산에 도착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부산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맥아더가 소련 국경과 가까운 나진을 폭격하자 워싱턴은 확전을 우려했다.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가능성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심각하게 우려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소련이 서유럽에 대해 전면전쟁을 시작하면 한국에 파견된 미군 병력을 감축하고 유럽의 전쟁에 대비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있었다. CIA는 알바니아와 항거리가 소련을 대리해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와는 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오히려 미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 스탈린은 미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서 한국 태생 소련인이 북한군에 입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맥아더의 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 대한 지원을 끊고 그 대신 중공군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이와 동시에 북한군 마크를 단 미그기(機)에 중공군복을 입은 소련군 조종사를 탑승시켜 압록강 상공에 참전시켰다. 스탈린은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공군이 참전해야 한다고 마오쩌뚱에게 압력을 가했다. 

      애치슨은 유럽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우방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했다. 유엔을 내세운 단일한 지휘체계 하에 영국, 캐나다, 덴마크, 네델란드, 그리스, 터키 등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나라들이 군대를 파견했다.
한국전쟁은 전선(戰線)이 쉽게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또 내려온 이상한 전쟁이었다. 애치슨은 전쟁 초기에 탁월한 판단을 해서 공산세력에 대응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애치슨은 몇 가지 실수를 범했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38선 남측을 수복한다는 원래의 목표를 잊어 버리고 맥아더에게 북진(北進)을 허용했다. 애치슨은 트루먼과 조지 마셜 국방장관을 움직여서 마오쩌뚱을 자극하는 맥아더의 무모한 군사적 행동을 억제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만일에 맥아더가 평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좁고 방어하기 용이한 전선(戰線)에 머물고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더라면 중공군 개입은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당시에 트루먼이 북진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면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포기했다는 비난 여론에 시달렸을 것이다.

          10월19일, 맥아더의 군대는 평양을 장악했다. 국무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내다 보았다. 그러나 중공군은 결국 개입했고, 미군은 치욕적인 후퇴를 해야만 했다. 훗날 자서전에서 애치슨은 조지 마셜 국방장관과 합동참모본부가 평양-원산 라인을 전선으로 고착하도록 트루먼에게 권하고 트루먼이 그것을 따랐더라면 미국은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미군 역사에 오점(汚點)으로 남은 이 치욕적인 후퇴에 대해 맥아더, 트루먼, 애치슨, 마셜, 그리고 합동참모본부 모두가 책임이 있다. 당시에 맥아더를 억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조지 마셜 국방장관 뿐이었다. 애치슨은 마셜에게 의견을 전할 수 있었지만 강력하게 권고할 수는 없었다. 마셜은 그만큼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마셜은 맥아더에 대해서 침묵했다. 맥아더가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사실은 워싱턴 관가(官街)에선 상식이었는데, 정작 맥아더를 통제해야 할 시점에 유일하게 맥아더를 통제할 수 있었던 마셜은 침묵한 것이다. 제2차 대전 중 미군을 총지휘했고, 종전 후에 국무장관을 지내다가 얼마 쉬지도 못하고 또다시 국방장관을 맡아야 했던 마셜은 심신이 피로해 있었다.

          추운 겨울에 미군이 패퇴하자 미국 내 여론은 분열했다. 한국에서 즉시 철군하자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애치슨을 파면하고 맥아더로 하여금 만주를 공격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8군 사령관에 부임하자 미군은 비로서 패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국방부와 합참 내부에선 맥아더를 해임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맥아더 파면

        1951년 4월 10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파면했다. 맥아더 파면에는 애치슨과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맥아더가 파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맥아더 귀국 행사가 전역에서 열렸다. 맥아더는 의회에서 “노병을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을 전해 들은 트루먼은 “빌어먹을 헛소리”라고 역정을 냈다. 맥아더를 파면했을 때 여론조사는 3대1로 트루먼에게 불리했지만, 한 달이 지나자 그 비율은 2대1로 줄어 들었다. 의회에선 ‘맥아더 청문회’가 열렸지만, 맥아더의 진술 보다는 국방부와 합참, 그리고 애치슨의 진술이 진실로 결국 밝혀졌다.

          서울을 다시 탈환한 유엔군은 38선을 놓고 중공군과 대치했다. 맥아더가 사라짐에 따라 미국은 휴전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곧 끝날 것으로 알았던 휴전협상은 지연되었다. 포로귀환 문제가 특히 어려웠다. 미군과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10만 6천명 중 3만1천명만이 귀환하기를 원했다. 북한군 포로와 중공군 포로의 2/3가 북한과 중공으로의 귀환을 거부한 것이다. 1952년 6월, 미 공군은 폭격기 500대를 동원해서 만주에 전기를 공급하던 압록강의 수풍 댐 등 많은 시설을 폭파해서 중공을 압박했다.

        트루먼 행정부에겐 이제 이승만 대통령이 골치덩이로 떠올랐다. 통일을 원하는 이승만은 휴전협상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이승만 정부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미국의 원조로 지탱되고 있었다. 1952년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재선을 도모하기위해 이승만은 국회의원 수십 명을 투옥했다. 트루먼은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어서, “독재는 미국민의 고귀한 희생을 우습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무부와 국방부는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 장군과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게 필요하면 이승만을 갈아치우고 정권을 군에 넘겨 주라고 지시해 놓았다. 7월 3일, 드디어 국회가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이승만은 위기에서 벗어 났다.

        서유럽과 일본

1950년 말, 트루먼은 육군참모총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고 콜럼비아 대학 총장을 지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NATO군(軍)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애치슨은 다시 유럽 문제에 치중하게 됐다. 그에게는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1951년 9월, 서유럽의 재무장에 따른 비용분담을 위한 미-영-불 3국간 협의체가 구성되는 등 서유럽 안보체제는 모습을 갖추어 갔다.
트루먼은 공화당원인 존 포스터 덜레스로 하여금 전후(戰後) 일본의 처리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화당 보수파의 의견을 반영하고, 또 그들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1951년 초, 트루먼은 덜레스를 공식적으로 대통령 특사로 임명했다. 애치슨과 덜레스는 협조하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분명해 졌다. 덜레스의 노력에 힘입어 일본은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우방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이란 

애치슨은 친(親)아랍 성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親)이스라엘 성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은 동서냉전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키려고 했다. 이스라엘은 중공을 승인하고, 북한군의 남한 침공에 대해 유엔에서 침묵했다. 트루먼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태도에 분개했다. 애치슨은 이집트에 대해 이스라엘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했으나 이집트가 이를 거부하자 그런 구상은 없던 것으로 했다.
애치슨은 아랍권인 북아프리카에 대해선 관심을 두었지만, 사하라 남쪽의 검은 아프리카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중남미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애치슨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공산체제와 맞부딪칠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애치슨은 소련과 마주하고 있는 이란은 미국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애치슨은 이란에 등장한 모사데크 정권과 협의해서 두 나라 간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정권이 들어서자 덜레스 국무장관과 그의 동생 알렌 덜레스 중앙정보국장은 영국 정보부와 손잡고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켰다. 훗날 애치슨은 자기와 트루먼이라면 모사데크를 축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소련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애치슨이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강경한 입장에 대해선 그는 놀랐다. 소련과의 외교적 대화는 완전히 막혀 버렸고, 한국전쟁 휴전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나토의 군사력 증강도 애치슨이 기대한 만큼 진전되지 않았다. 1952년 2월, 미국은 처음으로 전술 핵무기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미국이 개발한 전술 핵무기가 서유럽에 배치되자 서유럽은 재래식 군사력 증강을 주저했다.
        1952년은 선거의 해였다. 통상적으로 국무장관이 선거의 쟁점이 된 적은 없었지만, 공화당은 애치슨을 주된 공격목표로 삼았다. 애치슨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애들라이 스티븐슨이 대통령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티븐슨은 트루먼에게 애치슨을 해임해야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트루먼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인 리차드 닉슨은 스티븐슨을 ‘공산주의를 포위하는데 만 급급한 비겁한 애치슨 집단의 문하생’이라고 몰아세웠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며 동유럽을 해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애치슨은 아이젠하워의 무책임한 공약에 분노했지만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트루먼 행정부가 마지막으로 취한 조치는 1952년 11월 1일에 남태평양 비키니 군도에서 행한 수소폭탄 실험이었다. 대선에서 아이젠하워는 승리해서 공화당은 20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했다. 선거 후 트루먼과 애치슨을 만난 조지 케냔은  두 사람은 골치 아픈 문제를 공화당 정권에게 넘겨 버리게 되어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술회했다.

고별(告別)

        1953년 1월 14일, 애치슨은 마지막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들은 부쩍 피로해 진 애치슨을 보고 놀랐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애치슨 부부는 P 스트리트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트루먼과 행정부 고위관료를 초청해서 만찬을 같이 했다. 1월 15일, 애치슨은 국무장관직 사표를 트루먼에게 제출했다. 국무부 건물 뒷편 광장에서 열린 이임식에는 수천 명이 참석했고, 애치슨은 국무부 직원들에게 “미국적 가치를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 그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트루먼은 애치슨이 자신의 “훌륭한 오른손”이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애치슨은 트루먼의 가족과 퇴임한 각료와 백악관 직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오찬을 같이 했다. 수천명의 트루먼 지지자들이 애치슨의 집 주변을 에워싸고 “해리 ! 해리 !”를 외쳤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창가로 데리고 와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게 했다. 트루먼과 그의 가족은 유니언 스테이션에 기다리고 있던 특별열차를 타고 고향 미주리로 향했고, 애치슨은 열차 뒷 칸으로 올라 손을 흔드는 트루먼을 보고 손을 마주 흔들었다. 애치슨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저기 가고 있어”라고 옆에 있던 기자에게 말했다.

      애치슨은 메릴랜드 헤어우드의 저택을 돌아와서 정원을 가꾸고 강연을 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역시 메릴랜드에 농장을 갖고 있는 폴 니츠와 친구가 되어 자주 어울렸다. 애치슨은 자신의 후임자인 존 포스터 덜레스를 좋아 하지 않았다. 덜레스가 암으로 사망하자 “포스터가 땅속에 가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 전략을 세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재래식 전력증강을 하지 않는데 대해 분노했다.
 
      애치슨은 존 F. 케네디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애치슨은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가 닉슨을 이길 것이지만, 케네디는 진보성향인 윌리엄 풀브라이트나 체스터 보울스를 국무장관에 임명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애치슨을 초청해서 국무장관 인선에 대해 의논했다. 애치슨은 풀브라이트가 국무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고 딘 러스크를 장관으로 추천했다. 케네디는 애치슨에게 나토 주재 대사직을 건의했지만 애치슨은 노령(老齡)을 이유로 사양했다.

      애치슨은 케네디 행정부에 대해 곧 환멸을 느꼈다. 애치슨은 케네디 주변에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그룹이 판을 치는 것을 보고 우려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 보다는 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했고, 국무부의 사기는 전과 같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 들어서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자 조지 볼 국무차관의 요청으로 애치슨은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 전쟁에서 빠져 나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애치슨은 민주당이 너무 진보성향으로 치우치는 데 대해 우려했다.

      1968년 대선에서 애치슨은 민주당 후보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으나, 닉슨이 승리해도 닉슨이 베트남 전쟁을 영예롭게 마무리 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인 된 닉슨은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의 주선으로 백악관에서 애치슨을 만났다. 반공(反共)투사에서 실용주의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닉슨 대통령이 현직을 물러난 후 보다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된 애치슨을 만난 것이다. 닉슨은 애치슨에게 민주당의 진보파 의원들의 베트남 철군 주장을 달래 줄 것을 부탁했다.
 
      애치슨이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온 것은 아프리카의 로디지어 백인정부를 지지했던 일이었다. 그는 로디지어가 무너지면 남부 아프리카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애치슨에게 있어 세계는 결국 유럽이었어”라고 수군거렸다. 말년에 애치슨은 배리 골드워터, 스트롬 서먼드 등 보수정치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1971년 10월 13일, 메릴랜드의 자택 정원에서 몇 시간 동안 꽃나무를 손본 애치슨은 서재로 올라가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저녁 6시 경 하녀는 애치슨이 책상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가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애치슨은 이렇게 7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닉슨 대통령은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해 성조기를 반기(半旗)로 게양하라고 지시했으며, 내셔널 캐서드럴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그를 애도했다.

      학자들은 애치슨이 대통령에게 가장 공격적으로 그리고 가장 단호하게 말했던 몇 안 되는 국무장관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한다. 겸허하지만 용기가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과 그를 둘러쌌던 딘 애치슨, 조지 마셜, 애버럴 해리먼, 오마 브래들리 등 기라성(綺羅星) 같은 인물들은 대통령이 연거푸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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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