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이안 부르마, 암스테르담에서의 살인 (2007년)
2010-06-11 13:43 3,839 이상돈



이안 부루마, 암스테르담에서의 살인
(2006년, 2007년 펭귄 북스, 15달러, 278쪽)

Ian Buruma, Murder in Amsterdam
(2006, 2007 Penguin Books, $15.00. 278 pages)

2004년 11월 2일 이른 아침, 암스테르담의 거리에서 영화감독이며 무슬림 비판자이던 테오 반 코흐(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의 증손자)가 모로코 태생의 화란인에게 무참하게 피살 당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갖기 보다는 사건의 중요성을 애써 축소해 버리는 길을 택했다. 네델란드의 평론가이며 저술가이고 바드 칼리지의 교수인 이안 부르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부루마는 문제를 분석하고 있지만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고 독자들이 생각을 하도록 하고 있다.

1957년 생인 테오 반 고흐는 영화 감독이면서 민감한 사회문제에 대한 직설적 언급으로 이름이 난 논객이었다. 그는 특히 유태인을 비하하는 언급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소말리아 태생의 아얀 히르시 알리를 알게 된 후로는 그녀에 매료되어서 무슬림 여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슬림 여성이 겪는 학대와 예속을 다룬 ‘굴종’(‘Submission’)이란 10분 분량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TV에 방송된 후에 고흐와 알리는 살해위협을 받았다. 2004년 11월 2일 아침, 당시 26세이던 모하메드 부에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고흐에 총격을 가해 쓰러트리고 고흐가 길 옆으로 기어가자 다시 몇 발을 더 쏘고 난 후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서 고흐의 목을 거의 잘라냈고, 그런 다음 가슴에 칼을 꽂고 또 다른 작은 칼을 꺼내서 메모지를 고흐의 몸에 꽂았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은 충격적인 이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부에리는 경찰과 총격전 끝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저자는 테오 반 고흐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고흐는 방송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고흐는 무슬림을 ‘양과 x하는 놈들’(‘goat fucker’)라고 부르는 등 거친 표현으로 인기를 끌었다. 고흐가 백주에 무참하게 살해되자 암스테르담 시장은 정보국이 필요한 정보를 암스테르담 경찰에 주지 않았다면서 중앙정부를 비난했다. 고흐와 아얀 알리는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불필요하게 무슬림을 자극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고흐의 팬 클럽인 ‘테오의 친구들’은 공포를 조성했다는 비판을 들었지만, 정작 고흐를 죽게 한 이슬람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은 외국인을 받아드리는 데 있어 매우 관용적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종교탄압을 피해 유태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대거 유입되었는데,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이들은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주 노동자들이 암스테르담에 대거 유입되었다. 1999년 통계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인구의 45%가 외국 출신인데, 외국인의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이란 태생으로 1989년에 네덜란드로 망명해 와서 형법 교수가 된 아프신 엘리안, 그리고 소말리아 태생으로 이디오피아와 케냐를 거쳐 1992년에 네덜란드로 망명해 와서 여성운동가로 변신한 아얀 알리는 이슬람을 비판해서 이슬람권(圈)을 분노하게 했다. 네델란드에선 이들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이 공연히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다. 문제는 이슬람이 이제 유럽의 종교가 돼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들은 유럽의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종교와 관습을 고수할 뿐더러 자신들에 비판적인 유럽인들을 적대적으로 보게 되었다.

2002년 5월 6일, 이슬람과 외국인 이민자들을 비판해서 파란을 일으킨 우익 성향의 논객이자 정치인인 핌 포르티윈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네덜란드는 큰 충격에 빠졌는데, 얼마 후에 데오 반 고흐가 또 암살된 것이다. 두 경우 살인범들은 확신을 갖고 살해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인종적 정치적 문화적 다양성을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란인들에게 포르트윈과 고흐의 피살은 큰 충격이었다.

제2차 대전 중 네덜란드는 유태인을 보호하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유로, 화란인들은 유태인을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그런 태도는 바뀌었다. 화란인들에게 반유태 정서가 퍼진 것이다. 테오 반 고흐는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방송에서 했고, 그런 발언으로 인해 유명해 졌다. 그는 예수를 ‘나자렛에서 온 썩은 생선’이라고 불러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피소되기도 했다. 그런 고흐가 알리를 알게 되자 무슬림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코, 터키 등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무슬림들은 백인들이 하기 싫어 하는 저급한 노동을 하며 자신들만의 거주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 내에 외국인 출신 무슬림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무슬림 남성들은 생계를 위해서 일하고 부인들은 집안에서만 살고 있고, 이들은 위성 TV를 통해 아랍어 방송을 보고 지낸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2세 무슬림들은 두개의 문화에서 갈등을 겪는데, 그런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본주의 이슬람 교리에 빠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얀 알리가 과격 이슬람의 위험성을 말하고 다녀서 유명해 지자 우익정당인 자유민주인민당은 그녀를 영입했고, 알리는 2003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돼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슬람을 비판한 탓에 알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알리가 이동을 하면 네덜란드 경찰이 호위를 해야만 했다. 고흐가 피살된 후에 알리는 군대 막사와 안가를 옮겨 가면서 살아야만 했다. 핌 포트윈, 반 고흐, 그리고 알리는 자신들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사회적 분란을 조성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다.

고흐는 영화 ‘굴종’을 제작해서 알자리자 통신에 팔고자 했는데,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고흐는 ‘굴종’에 아랍 여인의 벗은 몸에 코란을 적어 놓은 영상을 포함시켜서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은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유럽은 복지국가임을 자랑해 왔고, 또 자유로운 출입국을 보장해 왔다. 그런 면에서 네덜란드는 가장 진취적이었다. 네덜란드는 매춘, 안락사, 동성애, 마리화나 흡연 등을 자유화하는 사회적 및 문화적 다양성에서 선두를 달려왔다. 코스모폴리탄이 되어 버린 네덜란드에선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타부로 되어있다. 화란인들이 국기를 흔드는 경우는 월드컵이나 유로컵 같은 축구시합을 할 때 뿐이다.

2005년 여름에 열린 재판에서 고흐 살해범 부에리은 변호사의 도움을 거절하고 자신은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를 모욕하는 사람의 죽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재판부는 부에리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2006년 4월, 아얀 알리는 살고 있던 헤이그의 집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알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주민들이 알리 때문에 자신들도 위험을 느낀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과 싸우기 보다는 그 세력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알리가 네덜란드를 떠난 후에 네덜란드 정부는 이민자들을 보다 엄격하게 심리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가 자랑으로 생각하던 자유와 관용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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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