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
2010-07-15 20:03 6,440 이상돈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해
(2009, 미 해군연구소 출판부, 39.95 달러, 323쪽)

Gail B. Shisler, For Country and Corps – The Life of General Oliver P. Smith
(2009. U.S. Naval Institute Press, $39.95, 323 pages)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작전으로 인천 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를 많이 뽑는다. 인천 상륙작전을 시행에 옮기고 서울을 탈환한 부대는 미 해병 1사단이다. 혹한 속에서 중공군 9병단 소속 8-10개 사단과 싸우면서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장진호 전투를 치른 부대도 미 해병 1사단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1893-1977)의 일대기이다. 저자 게일 스미스는 스미스 장군의 외손녀이다.

저자는 스미스 장군의 작은 딸의 딸인데, 아버지가 제2차 대전 중 조종사로 참전하던 중 전사한 탓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같이 살아서 외조부인 스미스 장군과 보낸 세월이 많았다. 저자는 외조부 덕분에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학시절에 한국전쟁에 대한 졸업논문을 쓸 때 외조부의 도움을 받았다. 해병 장교와 결혼한 후 남편이 베트남에서 참전하고 있을 때에 다시 외가에 자주 드나 드는 등 외조부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그런 계기로 개인 서신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이용해서 단순한 전쟁기록이 아니라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전기를 펴냈다.

올리버 스미스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버지와 독일계 이민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빨리 사망해서 어머니는 캘리포니아의 산타 크루즈로 이사했고, 스미스는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천성이 근면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방과 후에 일을 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버클리)에 입학허가를 얻어 단돈 10달러를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대학에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부자집 정원을 가꾸게 되어 나중에  정원 가꾸기를 취미로 갖게 됐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부전공으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타이핑과 속기를 배웠다. 타이핑과 속기에 능한 그는 나중에 전투를 겪으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버클리에 다닐 때 나중에 아내가 된 에스터를 만나게 됐고, 졸업 후에는 석유회사에서 일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중  해병대가 버클리 졸업생을 상대로 장교후보생을 모집하자 그는 서슴지 않고 지원했다. 임관된 후에 연봉 1,700달러를 받을 수 있을 뿐더러, 버클리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같이 사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병 장교가 되다

스미스는 훈련을 받고 임관되어 괌에 있는 미군기지로 발령을 받았고, 괌에서 근무 중에 태평양을 건너 온 에스터와 만나 결혼했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스미스는 괌에 있었는데, 전쟁이 끝날 때 대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대위 계급장을 17년 동안 달게 될 줄은 몰랐다. 전쟁 후 해병대도 인력을 줄이는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해병대를 좋아한 스미스는 그대로 남기로 했다. 1919-21년간의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메이 아일랜드 해병훈련소에서 근무했고, 1921년에는 전함 텍사스호(USS Texas)에 파견된 해병대를 이끌었고 1924년에는 워싱턴의 해병대 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워싱턴에 근무하는 동안 그와 에스터는 처음으로 중고차를 사서 버지니아의 남북전쟁 전적지를 두루 방문했다. 1928-31년 기간 동안 스미스는 아이티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를 이끌었고, 아내와 두 딸은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경험했다. 

1931년에 스미스는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육군 보병학교에 입학해서 고급 전술을 배우게 됐다. 그곳에서 스미스는 교무부장이던 조지 마셜, 교관이던 오마르 브래들리와 조지프 스틸웰 등 나중에 미 육군을 이끌던 인물들을 만났고, 또한 나중에 가장 친한 후배가 되는 루이 풀러(별명 ‘체스티’)를 처음 만나게 됐다.  이듬해 스미스는 버지니아 주 콴티코 해병기지에 교관으로 발령을 받아서 육군 보병학교에서 배웠던 전술을 해병대의 특성에 맞도록 가르쳤다. 스미스는 프랑스 전쟁대학원에 유학 파견을 가게 되어 1934년 초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향했다. 스미스는 프랑스어를 더 배우고 학업에 열중해서 미 해병장교로선 최초로 프랑스 전쟁대학원에서 학위를 획득했다. 프랑스 전쟁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미스는 프랑스 군의 전술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프랑스 장교들은 합의하고 협의하는 데 노력을 많이 기울여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2년간의 프랑스 체류 후에 귀국한 그는 프랑스 군대의 특성과 단점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해병대 사령관에게 제출했다. 미국으로 돌아 온 스미스는 비로서 소령으로 진급했는데, 그 때야 시대착오적인 진급제도가 바뀌어졌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전야(前夜)

스미스는 다시 콴티코 해병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당시 해병대 사령관은 존 르쥰 대장이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르쥰은 해병대의 새로운 과제가 상륙작전임을 잘 알고 있었고, 태평양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콴티코 해병학교에서 스미스를 위시한 교관들은 일본과 태평양에서 전쟁을 할 것이라는 가정을 세워놓고 전략을 개발했다. 1938년에 스미스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샌디에고의 함대 해병단에 발령을 받았다. 샌디에고 기지에는 훈련을 할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해병대는 샌디에고 근처의 산타 마그리타 랜치를 새로운 기지로 구입하고자 했고, 2차 대전에 발발하자 해병대는 이 넓은 땅을 사들여서 기지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캠프 펜들턴이다.

유럽에서 전운(戰雲)이 감돌자 해병대도 예비역을 소집해서 2만 명이던 병력이 25,000명으로 증가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 해병대 총병력은 486,000명이었다.) 1941년 5월, 스미스는 해병 6여단 소속으로 전함 풀러호(USS Fuler)에 승선해서 아이슬랜드로 향했다.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기임대법(Lend-Lease Act)에 의거해서 해병대를 아이슬랜드에 파견한 것이다. 스미스가 떠나자 샌디에고에 혼자 남겨진 에스터는 두 딸이 공부하고 있는 버클리로 이사해서 전쟁기간 동안 딸들과 함께 살았다. 아이슬랜드에 머무는 동안 스미스는 대령으로 진급했고, 1942년에 육군 병력이 아이슬랜드에 도착하자 해병대원들은 본국으로 돌아왔다. 스미스는 워싱턴의 해병대 본부의 기획정책처로 발령을 받았다. 이즈음 큰 딸 도로시는 버클리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와, 작은 딸 버지니아는 웨스트포인트 사관생도와 사귀게 되어 결국은 결혼하는데, 육군 항공장교가 된 버지니아의 남편 찰스 베네딕트는 1944년 12월 남부 중국 상공에서 B-29를 몰고 폭격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사망했다. 이 책의 저자 게일의 아버지는 딸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태평양 전쟁

해병대 본부에 발령을 받았지만 스미스는 태평양에서 싸우고 싶어했다. 해병 1사단장을 지내다가 해병대 사령관이 된 밴그라프 소장은 스미스를 해병 1사단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서 스미스는 해병 1사단과 인연을 맺게 됐다. 스미스가 해병 1사단에 부임하기 전에 해병 1사단은 태평양의 과달카날에서 상륙해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그 섬을 장악했다. 과달카날 상륙전에서 해병 1사단은 1,242명 전사, 2,655명 부상, 그리고 5,601명이 말라리아 등 질병으로 인해 후송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다.

과달카날 전투를 치루고 호주에서 휴식을 취하던 해병 1사단의 신임 사단장 윌리엄 루퍼터스 소장은 스미스를 5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스미스는 얼마 후엔 준장으로 승진되어 부사단장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51세였다. 필리핀과 괌을 탈환하고 종국적으로 일본 본토에 침공하기 위한 태평양 작전은 맥아더가 총지휘를 했지만 실제 전투는 할지 제독이 이끄는 태평양 함대와 해병대의 몫이었다. 과달카날을 점령한 미군은 다음 목표로 펠리우 섬으로 정해 놓았다. 1944년 9월 12일, 868척으로 구성된 해군 전단과 해병대는 펠리우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첫 3일간 함포사격과 공중포격을 한 후에 해병 1사단이 상륙했는데, 밀림 동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해병 1사단장 루퍼터스 소장은 나흘이면 작전을 완수할 수 있다면서 참모들과 함께 함정과 해안에 머물러 있었고, 부사단장인 스미스가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나흘이면 충분하다던 작전은 몇 주일이 걸렸고, 해병 1사단은 큰 손실을 입었다. 당시 루퍼터스 사단장의 행동은 문제로 생각됐는데, 루퍼터스는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해서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해병 1사단은  펠리우에서 1,252명이 전사하고 5,27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나중에 투입된 육군 81사단은 3,278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맥아더가 생각을 바꾸어서 민다니오 섬을 건너뛰고 레이테 섬으로 진격하기로 해서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펠리우 상륙작전은 그다지 의미가 없게 되었다. 스미스는 어떠한 전투이든 최악에 대비해야 하며, 현장을 잘 모르는 지휘관은 부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이 때에 얻은 교훈은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 1사단이 승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과달카날과 펠리우에서 전투를 치룬 해병 1사단은 전력이 약화되어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스미스는 1사단에 머물고 싶었지만 호놀룰루에 있는 10군의 참모부로 발령이 났다. 10군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1945년 4-6월 간 치러진 오키나와 작전에는 육군 병력 외에도 해병 1사단과 새로 구성된 해병 6사단이 참가했는데, 두 차레에 걸친 상륙전 경험이 있는 해병 1사단이 주된 역할을 했다. 전투가 끝나 갈 무렵에 10군 사령관이던 사이먼 보크너 육군중장이 일본군 포격에 맞아 전사했다. 전투가 종식된 후 스미스는 콴티코에 있는 해병학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귀국 길에 올랐고, 얼마 후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어서 전쟁이 끝 났다.

2차 대전 후 기로에 선 해병대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대대적인 감군(減軍)이 이루어 졌는데, 이 와중에 해병대는 존립을 위협받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장관을 역임했고, 아들이 해병 대령이어서 해군과 해병에 애정이 많았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1차 대전 당시 육군장교로 유럽 전선에 참전했기 때문인지 해군과 해병대를 백안시 했다. 2차 대전 후 미 군부는 조지 마셜, 오마르 브래들리,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더글라스 맥아더 등 육군 수뇌부가 장악했다. 이들은 해병 항공대를 새로 탄생할 공군에 편입시키고 해병대 전투부대는 작전 영역을 태평양 도서에 국한시키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콴티코 해병학교에 근무하던 몇몇 해병 장교들은 그룹을 만들어서 해병대 존립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자료를 만들어 워싱턴 정가에 알리는 일을 했다. 스미스는 해병대의 가치를 누구보다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지휘체계 하에 있는 장교들이 사적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해병대의 존립은 보장됐고, 트루먼 대통령은 클리프턴 케이츠 중장을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했고, 사령관 자리를 두고 케이츠와 경쟁했던 레무엘 세퍼드 중장에게는 4년 후에 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해병대 사령관이 된 게이츠 대장은 스미스에게 부사령관이 되도록 부탁했고, 스미스는 소장으로 진급되어 부사령관이 임명됐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병 1사단의 부사단장이었던 세퍼드는 콴티코의 해병학교장으로 발령이 나서 스미스와 미묘한 관계가 되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나중에 스미스는 결국 해병대 사령관이 되지 못하고 퇴역하게 된다.) 부사령관 임기 2년을 채운 스미스는 사단장이 되기를 원했고, 1950년 4월에 케이츠 사령관은 스미스를 해병 1사단장에 임명했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의 캠프 펜들턴에 본부를 두고 있는 1사단에 7월 31일자로 부임하게 되어 있었고, 스미스는 아내 에스터와 함께 모처럼의 휴가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6월 25일,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함에 따라 그런 작은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해병 1사단, 한국으로 향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트루먼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부 산하의 8군(8th Army)에게 한국으로 출동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8군은 전투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8군은 한국에서 잘 훈련된 북한군을 맞아 고전했다. 케이츠 해병대 사령관은 한국에 해병 부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고, 해병 1사단 5연대에 항공부대와 지원부대가 추가된 6,000명 규모의 해병 1여단은 7월 12일에 샌디에고 항구를 떠났다.

스미스는 7월 25일에 샌디에고에 도착했다. 그가 캠프 펜들턴에 도착했을 때 연대 병력이 차출된 1사단은 대부분 전역을 기다리는 장병 3,386명이 전부였다. 스미스는 해병 1사단 자체가 8월 15일까지 한국을 향해 출병하도록 합참과 맥아더 사령부가 합의를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캠프 펜들턴에 도착한 스미스는 두주일 만에 전투태세를 갖춘 사단 병력을 만들어서 한국으로 출병해야만 했다. 해병대는 예비군을 소집하고 전역 예정자들에 대한 전역을 연기하고 전국의 해병기지 운영요원의 절반을 차출해서 1사단으로 보냈다.

이렇게 급하게 모은 사단 병력이었지만 많은 장병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싸웠던 참전용사였다. 캘리포니아 사막에 위치한 해병대 장비보관소에 있던 탱크, 장갑차, 트럭 등이 건조한 기후 덕분에 온전했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해병대 1개 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5연대는 부사단장 크레이그 준장이 이끌고 1여단으로 이미 한국에 들어가 있었다. 스미스가 이끄는 사단 본대가 한국에 도착하면 1여단은 사단으로 합류하게 돼 있었다. 1여단의 주축이던 5연대 연대장은 레이 머레이 중령이었고, 1연대장은 스미스와 잘 알던 루이스 풀러 대령이었고, 7연대장은 호머 리첸버그 대령이었고, 군수참모는 스미스가 신임하던 알파 바우저 대령이었다. 1사단은 샌디에고를 떠나서 일본의 코베 항(港)으로 향했고, 스미스는 8월 18일 항공기 편으로 코베로 향했다.

인천 상륙작전

8월 22일에 일본에 도착한 스미스는 오랜 친구인 제임스 도일 해군중장을 공항에서 만났고, 도일 중장은 도쿄에 정박 중이던 기함(旗艦) 매킨리호(號)로 스미스를 안내했다. 매킨리호에는 바우저 대령이 와 있었고, 거기서 스미스는 1사단이 9월 15일에 인천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도일 중장과 바우저 대령은 몇 가지 문제를 걱정했다. 1사단 병력과 장비는 9월 1-3일에야 코베에 도착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준비하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인천에 접근하는 수로(水路)는 좁아서 많은 상륙함정이 항해하기 어렵고, 인천은 조수(潮水) 간만(干滿)의 차이가 커서 상륙이 오후 늦게 이루어 져야 하기 때문에 교두보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 등이었다.

스미스는 맥아더 사령부의 태도에 실망했다. 스미스와 휘하 부대장들은 맥아더가 1사단을 10군단 휘하에 두고 맥아더 사령부의 에드먼드 앨먼드 육군소장이 10군단을 지휘하도록 한 데 대해 분노했다. 스미스는 8군 휘하에서 낙동강 방어전을 하고 있는 1여단을 사단 지휘로 복구시키는 시급했지만, 맥아더 사령부는 거기에 냉담해서 1여단은 9월 5-6일에야 사단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의 D 데이는 9월 15일로 잡혔고, 스미스와 도일 중장은 상륙작전을 짜는데 몰두했다. 반면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에 상륙해도 적의 저항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펠리우에서의 실전을 겪은 스미스는 저항을 예상하고 현실적인 작전을 준비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5연대는 숨 쉴 여유도 갖지 못하고 9월 13일에 부산을 출발해서 9월 15일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9월 15일 아침 만조 때 5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했고, 그날 오후 늦게 만조를 이용해서 5연대 본대는 인천 북쪽에, 그리고 1연대는 남쪽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맥아더는 상륙전에 따르는 어려움이나 전사상자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맥아더는 6-25 남침 3개월이 되는 9월 25일에 서울을 수복하는데 만 관심이 있었다. 스미스는 훗날 인천상륙작전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었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해군과 해병대 덕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서울 수복 작전

해병 1사단이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정예부대를 급히 파견해서 1사단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해병 1사단은 미 육군과 공군의 지원이 없이 서울에서 시가전을 치러야 했고, 때문에 전사상자가 속출했다. 아무런 저항없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던 맥아더와 앨먼드의 예측은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해병 1사단의 활약에 감탄한 타임지 종군기자들이 기사를 써 보냈고, 타임지는 9월 25일자 표지에 스미스를 내 보냈다. 전투 중인 사단의 지휘관을 타임지가 커버로 내 보낸 것은 이례적이었는데, 타임지 기사는 스미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10군단 사령관이던 앨먼드 소장은 스미스를 시기해서 그 후에 계속 스미스와 해병 1사단을 괴롭혔고, 태평양함대 해병사령관이던 세퍼드 중장은 혹시 스미스가 자기를 밀어내고 해병대 사령관이 될까 생각해서 스미스를 은근히 모함하게 됐다. 

서울 진격은 오직 해병 1사단만의 작전이었다. 상륙 5일만에 풀러 대령이 이끄는 1연대는 영등포 지역을, 머레이 중령이 이끄는 5연대는 김포 공항을 접수했다. 해병대를 지원한다는 육군 7사단은 인천에 상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는 머레이 중령을 최전선에서 만나서 한강 도강(渡江) 작전을 의논했다. 9월 20일, 캠프 펜들턴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7연대가 드디어 인천에 상륙했다.

맥아더는 하루라도 빨리 서울을 탈환해서 자기의 공적으로 삼고 싶었다. 스미스는 인구와 건물이 많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주변을 포위해서 들어가는 전술이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맥아더 사령부는 막무가내였다.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9월 25-28일간 해병 1사단은 711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큰 손실을 입었다. 반면 인천 상륙에서 서울 탈환까지 미 육군 7사단 전체가 입은 전사상자는 552명이 불과했다. 맥아더의 공명심 때문에 해병은 큰 손실을 입은 셈이다.

무능하고 무모한 맥아더 사령부

인천 상륙 작전에서 생겨난 스미스와 앨먼드 간의 불화는 이후 장진호 전투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앨먼드는 정치적 인물로서 부하장병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에도 무모한 지시를 남발해서 전투를 어렵게 만들었다. 앨먼드는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다. 앨먼드는 제2차 대전 중 흑인 장병으로 구성된 사단을 맡는다는 명분으로 준장으로 진급했는데, 실전 경험이 없이 사단장이 된 앨먼드가 이끈 사단은 참패를 거듭했다. 앨먼드는 자기가 이끈 사단의 실패를 열등한 흑인 장병의 탓으로 돌려서 책임을 면했다. 한국 전쟁 중에도 10군단 소속의 육군에선 흑인 등 소수 인종 장병은 취사 등 지원부대에 배속됐다. 반면 스미스가 지휘하는 해병 1사단에는 흑인과 백인이 전투 비전투 부서에 함께 섞여서 근무했다. 스미스는 당시 설립된 지 6개월 밖에 안된 한국 해병대를 미 해병처럼 생각했다.

인천 상륙작전 후에 맥아더의 명성을 더 할 수 없이 높아졌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도 연합군을 계속 8군과 10군단으로 분리해서 운영하기로 했다. 8군 사령관이던 워커 중장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맥아더는 10군단을 자신이 총애하는 앨먼드의 지휘에 두기를 원했다. 맥아더는 그렇게 함으로써 육군이 주도하는 본국 합참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대해 38선 돌파 승인을 요청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군과 중공군이 개입할 조짐이 없으며 압록강에는 한국군 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여 승인했다. 훗날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이렇게 포괄적인 권한을 준 것을 후회했다. 한편 맥아더는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했고, 이에 해병 1사단은 인천항에서 다시 해군 상륙전단에 승선했다. 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해서 험준한 산길을 따라 북상해서 장진호 지역을 거쳐 평양을 통해 북진하는 8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진호 전투

맥아더의 이 같은 전술에 대해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 대장 등 본국 지휘부도 우려를 많이 했다. 병력을 분산시키고 지휘권을 분리하는 것은 작전의 기본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해병 1사단은 10월 20일에 원산에 상륙했다. 스미스는 앨먼드가 내린 작전지시가 또 다시 병력을 분산시키는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됐다. 준비없이 파병된 육군과 달리 캘리포니아의 병참기지에서 충분한 장비를 갖고 한국에 온 해병 1사단은 월동장비와 동계 전투복을 갖고 있었다. 스미스는 북상하는 부대에게 월동장비와 동계 복장을 지급해서 혹한에 대비했다. 11월 1일, 10군단에 배속된 한국 육군 연대는 중공군 2개 연대 병력을 보고 그대로 도망가고 말았다. 스미스와 참모들은 중공군이 부근에 와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도 1사단이 이미 포위되어 있음은 나중에 알게 됐다.

도쿄에 자리잡은 맥아더 사령부는 전선에서 중공군과 조우(遭遇)했다는 정보를 무시하고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11월 1일, 중공군은 평안도로 북상한 8군의 우측에 포진한 한국군 사단을 공격해서 궤멸시켰고, 이어서 미 8기병사단을 공격했다. 8기병사단은 막대한 전사상자를 내었고, 부대원의 절반이 포로로 사로 잡히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11월 2일, 함흥에서 북상하던 해병 7연대는 수동리에서 중공군 사단 병력과 조우해서 5일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패퇴시켰다. 이런 전황을 보고 받고도 맥아더 사령부는 1사단에게 계속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개마고원에 진입한 해병 1사단에게는 혹독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계곡을 따라 진입한 1사단은 보급로가 길었다. 스미스는 앨먼드의 지시를 위반하면서 진격속도를 조절해서 병력을 가급적 모았고, 장진호 남단에 위치한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11월 15일에 스미스는 흥남 앞에 계류 중인 해군 지휘관들이 스미스를 만나서 10군단의 작전이 무모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때 스미스는 해병대 사령관 앞으로 전황을 걱정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스미스가 걱정한 바는 얼마 후 모두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흥남에 자리잡은 10군단 사령부에서 앨먼드 소장은 냉장고와 샤워시설을 갖춘 대형 밴을 세워 놓고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해병 장병들은 그런 앨먼드를 비웃었다. 앨먼드는 해병 1사단이 육군 7사단 연대병력을 추가로 장진호 지역에 파견해서 해병 1사단과 함께 압록강으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다.

11월 24일, 워커가 지휘하는 8군은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또 다시 패퇴하게 되었다. 8군의 후퇴는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되었다. 그러자 10군단 사령부는 해병 1사단에게 서쪽으로 진격해서 8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8군은 이미 패퇴했고 8군이 있는 곳까지는 산길로 멀어서 그 명령은 의미가 없는 지시였다. 스미스와 그의 참모들은 10군단의 작전명령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8군을 궤멸시킨 중공군은 해병 1사단을 궤멸하기 위해 포위망을 조여 오고 있었다.

중공군의 대공세

장진호 지역에 투입된 중공군은 샹하이에서 주둔해 있던 3야전군과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4야전군으로, 2차 대전과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막강한 전투부대였다. 11월 말, 중국 공산당은 “미 해병 1사단이 궤멸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선전방송을 했다. 당시 리첸버그 대령이 이끄는 해병 7연대는 장진호 서쪽 끝 유담리에 있었고 머레이 중령이 이끄는 1연대는 그 뒤에 포진하고 있었고, 풀러 대령이 이끄는 1연대는 하갈우리에서 고토리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포진하고 있었다. 유담리와 하갈우리 중간에 위치한 독통 패스는 유담리에 이르는 길 중에 가장 높은 고지인데,  7연대 폭스 중대가 지키게 됐다.

11월 27일, 해병 7연대는 서쪽으로 중공군을 향해 공격을 해서 높은 지역을 약간 확보했다. 그날 밤 9시, 영하 화씨 20도 추위 속에 중공군은 총공격을 가해왔다. 1240 고지에선 해병 1개 중대가 중공군 대대 병력의 공격을 받았다. 독통 패스를 지키던 폭스 중대는 중공군의 치열한 포위공격을 밤새 받았다. 그러나 해병은 자신들이 지키던 고지를 사수했다. 하지만 장진호 동쪽에 도착한 미 육군 31연대 병력은 전투도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31연대의 지휘관인 매클린 대령은 중공군의 전력을 만만히 보고 경계를 태만히 했을 뿐더러 갖고 있던 포병 전력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도 몰랐다. 31연대는 부대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부대간의 통신도 여의치 않았다.

11월 28일 아침,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해병은 고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지만 밤 사이에 육군 31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육군 31연대 병력은 단위 부대별로 흩어져 있어서 서로 연락도 되지 않은 채 물밀 듯 닥쳐오는 중공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11월 27일 밤 내내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해병은 부대간의 상황을 서로 연락하여 알고 있었고, 함흥에 있던 사단본부는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10군단 사령부와 육군 7사단은 31연대와 통신망이 끊어져도 이를 복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11월 28일 오전 10시, 스미스는 사단 본부참모들과 함께 헬기 편으로 함흥을 출발해서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스미스는 사단본부를 적의 포위망 속인 하갈우리에 두고 최전선에서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군수참모 브라우저 대령은 사단장이 최전선에서 지휘한다는 사실 자체가 해병 장병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주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육군의 패배, 해병의 승리

육군 7사단 소속 탱크 중대가 장진호 동쪽으로 31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했는데, 부사단장인 호데스 소장이 이를 따라갔다. 호데스 소장은 31연대가 400명의 전사상자를 내서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하갈우리에 주둔 중인 스미스 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하갈우리에는 1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1개 중대는 고토리를 지키고 있어서 2개 중대가 모두였다. 그러니까 육군 연대 병력이 해병 2개 중대에게 도와달라고 구조를 요청한 것이다. 28일 정오 경, 앨먼드 소장이 헬기 편으로 하갈우리로 와서 스미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앨먼드가 떠난 후에 스미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군화로 눈을 걷어 찼다고 한다. 앨먼드는 큰 피해를 입은 31연대의 페이스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에 헬기 편으로 도착했다. 앨먼드는 “중공군 병력은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이라면서, 은성 무공훈장 3개를 꺼내서 하나는 페이스 중령에 수여하고 나머지 두개는 페이스 중령이 지명하는 장병 두 명에 주라고 했다. 앨먼드가 헬기로 떠난 후 페이스 중령은 은성 무공훈장을 눈 속으로 던져버렸다고 전해 진다. 당시 앨먼드 소장의 행동은 거의 광적(狂的)인 것으로, 미 해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28일 저녁이 되자 중공군을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갈우리 동쪽을 지키던 한국군과 10군단 소속 미 육군은 중공군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하갈우리를 지키던 해병은 중공군을 패퇴시켰다. 독통 패스를 지키던 폭스 중대는 또 다시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고지를 사수했다. 그 날 밤 31연대의 페이스 중령은 후퇴하기로 결정했고, 후퇴 도중 연대장 맥클린 대령은 부상을 입고 중공군에 포로가 됐으나 이송 중 사망했다. 매클린 대령은 한국전쟁 중 전사한 미군 최고급 장교이다. 27일과 28일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에도 불구하고 해병이 선전할 수 있었던 데는 해병 항공대와 해군 함재기의 지원공격의 힘이 컸다. 해병 지상부대는 항공대와 해군 항모와 긴밀한 통신연락을 유지했고, 조종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 지원공격을 감행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10군단 사령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너무 놀라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1월 30일 오전, 육군 7사단장 바르 소장은 헬기로 하갈우리에 도착해서 육로로 도착한 부사단장 로데스 준장과 함께 스미스를 만났다. 바르 소장은 페이스 중령이 지휘하는 31연대 병력을 해병 1사단에 합류시키기로 하고, 페이스 중령에 대해 하갈우리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중공군은 하갈우리를 공격했지만, 사단본부의 참모장에서 요리사까지 총을 들고 싸워서 중공군을 격퇴시켰다. 하갈우리의 사단본부에는 부상병이 넘쳐 흘렀다. 하갈우리에 건설 중인 비행장은 공정이 겨우 40%정도만 끝나서 활주로는 2,900 피트에 불과했다.

장진호 탈출작전

12월 1일, C-47 수송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착륙해서 보급품을 내려놓고 부상병을 실었다. 수송기 다섯대가 더 착륙해서 보다 많은 보급품을 공급했고, 부상병을 후송해서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 졌다. 같은 날 오후 1시, 페이스 중령은 부대원을 이끌고 하갈우리로 향하던 중 중공군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지휘관을 상실하고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지리멸멸하고 말았다. 요행히 하갈우리에 도착한 육군 장병들은 부상을 핑계로 수송기를 타려고 하자 해군 군의관은 이들을 일일이 확인해야만 했다. 육군 병사들은 부상당한 동료들을 현지에 버려두고 하갈우리에 도착했고, 적지에 남겨진 육군 부상병들은 대부분 얼어 죽었다. 스미스는 부상한 동료를 버려두고 멀쩡한 병사들이 해병부대로 찾아 오는 육군의 모습은 군인이 아니라고 술회했다. 반면 해병은 부상당한 동료를 단 한명도 포기하지 않고 하갈우리로 후송해서 수송기에 실어서 흥남으로 보냈다. 12월 1일-5일간 3,150명의 부상한 해병, 1,137명의 부상한 육군, 그리고 25명의 부상한 영국 해병대원이 후송되었고, 전사자 시신 139구(具)도 같이 후송되었다. 해병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는 전통이 지켜 진 것이다.

독통 패스 혈전(血戰)

12월 1일, 유담리에 있던 5연대와 7연대가 하갈우리로 탈출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는 독통 패스를 사수하고 있는 폭스 중대를 구출하는 임무는 레이먼드 데이비스 중령이 이끄는 7연대 1대대가 맡았다. 7연대 1대대는 치열한 전투를 치룬 끝에 12월 2일 자정 경에 독통 패스를 지키던 폭스 중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데이비스 중령과 폭스 중대장 바버 대위는 최고의 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 받았다. 닷새 동안의 전투로 폭스 중대는 부대원 절반이 부상 또는 사망했으나 중공군은 1,000명 넘게 사망했다. 독통 패스가 확보됨에 따라 5연대와 7연대는 무사하게 하갈우리로 결집할 수 있었다.

스미스가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않았고, 부대원들이 하갈우리를 방어하지 못했다면 유담리에 진격했던 5연대와 7연대가 무사하게 후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2월 4일에 하갈우리에 5연대의 마지막 병력이 도착하자 사단 전체의 사기가 높아졌다. 이 때에 수송기 편으로 종군기자들이 하갈우리에 도착했고, 영국 기자의 질문에 대해 스미스가 “빌어먹을 후퇴라니, 우리는 단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할 뿐이야”(“Retreat hell, we a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흥남 철수

12월 6일, 총 병력 10,020명이 1,000대의 장비와 함께 하갈우리를 출발했다. 1사단은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를 거쳐 중공군의 공격에 맞아 싸우면서 고토리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고토리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해병 1사단은 전사 103명, 부상 506명, 실종 7명이란 피해를 입었다. 부상당한 장병들은 고토리에서 헬기와 소형 비행기로 후송되었다. 전사자 시신 117구는 더 이상 후송할 수가 없어서 현지에서 매장해야만 했다. 스미스는 얼어 붙은 땅에 부하 장병의 시신을 묻으면서 기도했다. 1사단은 중공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수동리를 거쳐 함흥으로 향했다. 12월 10일 10시 15분, 스미스와 사단 지휘부는 헬기와 C-47로 고토리를 이륙해서 흥남으로 향했다. 12월 11일 오후 1시, 1사단 후미가 진흥리를 통과했고, 밤 9시에 흥남에 도달했다. 흥남에는 바락과 텐트가 혹한의 사지(死地)를 탈출한 해병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병 1사단이 무사히 탈출하자 흥남 철수 작전이 본격화되었고, 전세계 언론은 해병 1사단에 찬사를 퍼부었다. 해병 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을 패퇴시키고 장비의 대부분과 부상병 전원을 데리고 철수해서 세계 전쟁 역사에 한 장을 기록했다.

언론은 해병 1사단 뿐 아니라 스미스 소장 개인에 대해서도 찬사를 퍼부었다. 한 해병 장병은 언론에 “나는 스미스 소장을 지옥에라도 따라 갈 것이다. 그는 우리가 거기서 빠져 나오게 할거야.”고 말했다. 한 언론인은 스미스를 두고 “ 이 해병은 저돌적인 전사(戰士)라기 보다는 대학교수처럼 보인다. 미군 전체에서 그 보다 인간의 가슴을 움직이는 지도자는 없다.”고 썼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37,500명 전사상자를 냈는데 그 중 22,500명은 해병 지상군에 의해, 그리고 15,000명은 항공기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남은 중공군의 1/3은 동상으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중공군 9병단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해병 1사단은 총 4,418명의 전사상자를 냈는데, 전사 604명, 부상 후 사망 144명, 실종 192명을 기록했다. 7,313명은 가벼운 동상을 입었으나 나중에 회복 후 부대에 복귀했다. 해병 1사단 장병과 장비는 흥남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일 중장이 지휘하는 해군 선단에 승선해서 부산에 도착한 후 육로로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에서 쉬면서 스미스는 전사한 장병의 부모와 가족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마산에서 해병들은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본국에서 보충병 3,400명이 도착했고 장비도 보충되었다. 12월 26일,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에 도착했다. 리지웨이와 스미스는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다. 패배 심리에 젖어 있는 육군을 재정비해서 반격을 해야 하는 리지웨이는 전의에 충만한 해병 1사단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미스는 리지웨이 장군에게 다시는 앨먼드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리지웨이는 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포항 전투, 원주-춘천 전투

1951년 1월 8일, 스미스는 대구에 자리잡은 리지웨이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해병 1사단은 포항 지역에 출몰하는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 작전을 맡게 됐다. 1사단은 1951년 2월 중순까지 이 지역에 출몰하면서 미 육군과 한국군에 많은 피해를 주던 인민군 10사단 병력을 추적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2월 12일, 스미스는 14일 후 24시간 내에 부대를 충주로 이동하라는 긴급한 명령을 시달받았다. 충주 지역을 방어하던 앨먼드 소장이 지휘하는 10군단이 중공군에게 또 다시 패퇴했기 때문이다. 2월 11-12일간 중공군과 북한군은 눈보라 치는 기상에도 불구하고 총 공격을 개시해서 횡성을 장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군 3개 사단이 붕괴했고, 미 2사단의 주력 전투부대가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미 8군은 또 다시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리지웨이는 해병 1사단 외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부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2월 16일, 해병 1사단은 충주로 향했다. 해병 1사단은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9군단의 일원으로 공격의 중심에 서고, 왼편은 한국군 6사단이 그리고 오른편은 10군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원주에서 횡성에 이르는 도로는 진흙 길이었다. 9군 사령관 무어 소장이 전방 시찰차 헬기로 이동하던 중 헬기가 추락해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리지웨이는 스미스에게 9군단을 임시로 지휘하도록 했다. 9군단 참모들은 스미스가 9군단을 지휘하는 것은 반겼지만 워싱턴의 육군본부는 서둘러서 이태리에 있던 윌리엄 호지 장군을 후임자를 파견해서 스미스는 9군단을 단 열흘 간 지휘하는 데 그쳤다. 이태리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던 장군을 낯설은 한국 전쟁에 투입한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전쟁 중에도 육군은 자신들의 자리 지키기에 열중했던 것이다.

스미스는 1사단장으로 다시 복귀했고, 3-4월에 1사단은 8군과 함께 38선을 다시 돌파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4월 초에 1사단은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중공군을 몰아내고 38선을 돌파했다. 이 때 맥아더는 도교에서 날라와서 지프를 타고 해병 1사단 본부를 잠시 찾아서 스미스와 리지웨이를 만났는데,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4월 11일에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파면되었고, 리지웨이는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도쿄로 떠났고 8군 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이 임명되었다.

스미스는 자신도 본국으로 가게 될 것임을 알게 됐다. 1사단 후임 사단장으로 제럴드 토머스 소장이 임명되었고, 스미스는 캠프 펜들턴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21일부터 1사단은 춘천-화천 지구 작전에 투입되었다. 강력한 중공군의 공세 앞에 한국군 6사단이 궤멸되어 버려서 해병 1사단의 좌측이 중공군에 노출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좌측에 배치된 7연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4월 23일 하루동안 해병 7연대는 중공군 2,000명과 근접전투를 벌인 끝에 패퇴시켰다. 한국 해병 연대도 그날 새벽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잠시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했는데, 그 중 한 중대에선 150명의 부대원 중 40명만이 살아 남았다. 놀란 10군단 사령관 호지 소장은 후퇴를 명했고, 해병 1사단은 전 부대원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1000 야드 후퇴를 해야만 했다. 당시 1사단 참모들은 후퇴할 수 없다고 버티던 한국 해병 연대를 설득해야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4월 24일, 공중 지원이 이루어 지고 해병 1사단이 전열을 정비하자 중공군의 공격은 차단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오다

4월 25일은 1사단장으로 스미스가 보낸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한국 전쟁이 끝나면 1사단을 이끌고 캠프 펜들턴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전쟁은 지연될 것으로 보였다. 왜 스미스가 예상보다 일찍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는가에 대해 저자는 하와이에 있던 세퍼드 중장 등 해병대 내에서 스미스를 견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스미스는 10개월간 인천, 서울, 장진호, 포항, 원주-횡성, 춘천-화천 등 한국 전쟁의 전기(轉機)를 마련한 전투를 지휘한 1사단 장병들에게 짧은 이임사를 하고 춘천의 작은 비행장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산 공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서 훈장을 수여 받고 도쿄, 미드웨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알메다 해군기지에 도착해서 가족과 재회했다.

캠프 펜들턴에 부임하기까지 한달간 휴가를 얻은 스미스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스 클럽, 모교인 버클리 등에서 연설 초청을 받았고, 자연히 뉴스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의 해병대 본부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해병대 본부는 그것을 거부하고 캠프 펜들턴으로 곧장 부임하라고 했다. 군대 내의 정치적 작동에 환멸을 느낀 스미스는 다시는 한국전쟁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의 공로에 따라 스미스는 중장으로 승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스미스가 중장이 되면 해병대 사령관 후보로 거론되는데 부담을 느낀 케이츠 사령관은 그것을 거부했다.

캠프 펜들턴로 돌아 온 스미스는 한국에 파병을 앞둔 장병들을 한국 실정에 맞게 훈련시키는 데 열중했다. 그는 한국의 지형과 마을 본 따서 만든 코리아 빌리지를 캠프 펜틀턴에 만들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스미스는 가족과 함께 기지 근처에서 살면서 오랜만에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1953년 7월, 스미스는 버지니아 노포크에 위치한 대서양 함대 해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한달 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5년 9월, 스미스는 전역신청을 했고, 전역하는 날 대장으로 진급해서 에스터가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스미스가 전역 신청을 앞당겨 하게 된 이유는 케이츠 후임으로 사령관이 된 세퍼드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을 구한 진정한 영웅

전역 후에 스미스는 아내와 함께 샌프랜시스코 남쪽 끝에 자리잡은 로스 알토스에 정원이 있는 집을 사서 은퇴생활을 즐겼다. 1962년 들어 에스터의 건강이 나빠졌고, 1964년 5월 그녀는 사망했다. 스미스는 에스터가 남겨 놓은 가구를 그대로 두고 정원을 가꾸면서 먼저 세상을 뜬 아내를 생각하며 혼자 살았다. 거실에 있는 그의 가죽 소파의 뒤에는 장진호 전투 지도를 걸어 두었다. 1977년 12월 25일 밤, 스미스는 어느날과 같이 침대에 들었고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84세였다.     

스미스는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 성행하던 파티 같은사교모임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사한 부대원들의 유가족에게 정성스럽게 위문 편지를 손수 썼고, 은퇴한 후에도 전사한 부대원들의 묘소를 자주 찾았다. 그는 부대원들과 같은 복장을 해서 가죽 점퍼와 번쩍거리는 군화를 신고 다니는 다른 고급 장교들과 달랐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어서 부대원들은 그를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사병들은 그의 미들네임 이니셜 ‘P’가 ‘교수(Professor)’일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사실 그의 풍모는 군인이 아니라 교수였다. 그는 새 임지에 발령을 받으면 자신이 알던 장교를 참모로 데려오기 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장교들이 주류를 이루는 육군 보다 장교와 부사관 및 사병간에 격의가 없는 평등한 해병대를 좋아했다. 그는 정치적 연줄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고, 항상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참된 군인이었다. 스미스는 당시 탄생한 한국 해병 연대를 자신의 네 번째 연대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범 당시부터 미 해병 1사단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같이 전투에 참가한 한국 해병대는 한국 육군과 달리 매우 용맹해서 후퇴하는 적이 없었고, 스미스는 그런 한국 해병대를 매우 칭찬하고 아꼈다. 한국 전쟁 당시에 올리버 스미스가 미 해병 1사단장이었음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신(神)의 뜻(God’s Will)’이 아니었나 한다.

© 이상돈


빌 슬론, 가장 어두웠던 여름 (2009년) (계속) 
이안 부르마, 암스테르담에서의 살인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