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빌 슬론, 가장 어두웠던 여름 (2009년)
2010-08-18 03:49 2,609 이상돈


빌 슬론, 가장 어두웠던 여름 (2009년, 시몬 앤드 슈스터, 385쪽, 27달러)

Bill Sloan, The Darkest Summer (2009, Simon & Schuster, 385 pages, $27.00)

이 책의 저자 빌 슬론은 댈라스 타임헤럴드지(紙)의 기자를 지내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서 벌어진 오키나와와 펠리우 상륙작전에 관한 책을 펴낸 바 있다. 2009년에 나온 빌 슬론의 이 책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미 군부가 얼마나 준비가 안되어 있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한국을 지킨 미군 부대는 해병대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부제(副題) ‘1950년 부산과 인천’이 잘 보여 주듯이 북한군 남침 후 부산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미군의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收復)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책은 1950년 6월 24일에 열린 장교 클럽 개업 파티에 한국군 고위장성과 미 군사지원단 장교들이 대거 참석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국군의 능력이 증진되고 있으며, 길이 좁고 논이 많은 한국에서는 탱크가 작전을 할 수 없다고 발표했던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임기를 끝내고 그 전날 본국으로 향했다. 주한 미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던 해럴드 노블은 “한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 2주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6월 24일 저녁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유일한 미군 장교는 조셉 대리고 대위였는데, 그는 38선 전방에서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25일 새벽에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서울의 외교가에선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 돌았는데도, 워싱턴은 오히려 한국군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의 오판(誤判)

당시 미국은 제2차 대전 후의 평화 무드에 젖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의회의 승인하에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미군의 규모를 축소하는데 바뻤고, 이로 인해 군부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을 치르느냐고 비대해진 군사력을 줄일 필요는 이었지만 존슨 장관은 미군의 작전능력을 심각하게 저해할 정도로 줄이고 말았다. 1950년 6월 당시의 미군 병력은 2차 대전 중 최고수준에 비해 8.5%에 불과했다. 소련의 내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進駐)를 허용한 미국의 정책분석가들은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소련의 의도도 파악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향후의 전쟁은 핵 전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재래식 전력(戰力)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50년 여름에 미국의 재래식 전력은 거의 무력한 상태에 이르렀다.

북한군의 침공에 맞서지 못한 한국군이 패퇴하고 한국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대구로 향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일본 도쿄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연대 규모의 전투부대를 먼저 한국에 보내고 이어서 2개 사단을 파병할 것을 본국에 건의했다.

1950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부유한 변호사이며 1948년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을 지원한 루이스 존슨을 새로 탄생한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전에는 각료급인 전쟁부(Department of War)와 해군부(Department of Navy)가 있었는데 이를 합쳐서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로 합치고 장관에 존슨을 임명한 트루먼의 조치에 대해 군부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트루먼과 존슨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통합해서 하나의 군으로 만드는 데 몰입해 있었다. 제1차 대전에 포병 대위로 참전했던 트루먼은 장군과 제독을 거들먹 거리는 존재 정도로 백안시했다. 의회는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해서 미군 장비는 제2차 대전 때 쓰고 남은 것 뿐이라서 한국에 급히 파병할 연대 병력과 장비를 차출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맥아더는 3,000명 정도의 연대병력을 즉시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나흘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까지 내려온 상태라서 그 정도 병력으로 막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당시 한국에 파병하기 쉬운 부대는 일본에 주둔해 있던 육군 24 보병사단과 25 보병사단, 그리고 1 기병사단이었다. (1 기병사단도 실제는 보병사단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서 점령통치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3개 사단에는 실전경험이 있는 초급장교와 준사관이 많지 않았다.

비운(悲運)의 스미스 부대

6월 30일 밤 9시에 일본 큐슈에 주둔해 있던 24사단 21연대의 1대대장이던 찰스 스미스 중령은 한국에 급파될 부대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시달받았다. 7월 1일, 스미스 중령은 440명으로 구성된 부대원을 이끌고 가까운 공항으로 향했다.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스미스 중령에게 ”북한군을 부산으로부터 가급적 먼 곳에서 차단할 것”을 당부했다. ‘스미스 별동부대’(Smith Task Force)로 명명된 무장도 취약한 이 440명은 죽음의 덫을 향해 떠난 셈이었다. 이 정도 병력으로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맥아더의 오만이었다.

스미스 별동부대에는 52포병대대 병력 108명과 105미리 곡사포가 추가되어 총병력은 548명이 되었다. 스미스 부대는 그들의 존재가 한국군의 사기를 북돋아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스미스 별동부대가 오산에 도착했을 때 후퇴해오던 한국군은 피난민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시에 입대한 육군 사병들은 보이스카웃 야영을 하는 기분으로 왔다가 심각한 상황을 보고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7월 5일 아침,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의 T-34 탱크와 마주쳤는데, 스미스 부대가 갖고 있던 바주카 포와 75미리 무반동총은 북한군 탱크의 장갑을 뚫지 못했다. 열포탄 6발을 갖고 있었던 단 한 문(門)의 105미리 곡사포만이 북한국 탱크 두대에 화염에 퍼부어서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 밀듯이 밀려오는 북한군 탱크와 보병에 대해 스미스 부대는 중과부적이었고, 스미스 중령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 날 하루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155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후퇴 도중에 또 많은 병사가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서 후방으로 무사하게 귀환한 대원은 190명에 불과했다. 스미스 부대는 무모한 전투를 하다가 괴멸된 부대로 이름을 남기게 됐지만, 제2차 대전 때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스미스 중령이 이끈 이 부대는 사실은 용감히 싸웠다. 그들이 패배한 책임은 무모한 명령을 내린 워싱턴과 도쿄에 있다 할 것이다.

후방으로 후퇴한 스미스 부대원들은 조치원에 진주한 21사단 소속 3대대와 합류했다. 7월 10일, 3대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3대대 L중대는 이틀간의 전투에서 101명이 전사하거나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나중에 처형된 시체로 발견됐다. 7월 12일, 월튼 워커 장군이 도쿄에서 한국에 도착해서 8군(8th Army)을 지휘하기 위한 사령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워커가 지휘해야 할 부대는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한가지 위안은 7월 9일부터 미 공군의 B-29 폭격기가 평양 등 군사목표에 대해 공습을 했고, 순양함 쥬노호(號)와 구축함 4척이 해안의 북한 군사시설에 대해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존폐위기에 처했던 미 해병대

트루먼 행정부의 국방예산 삭감과 군 개편논의로 인해 미 육군은 한국에서의 긴급한 사태에 대응할 수 없었다. 제2차 대전시 태평양에서 영웅적으로 싸운 해병대는 상황이 더 나빴다. 1950년 6월 시점에서 볼 때 해병대는 해체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해병대는 두개 사단이 남아있었지만 병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해병대를 “의전기능을 주로 하는 소규모 비전투 단위’로 남기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었고, 해병대 사령부는 이런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해병대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 그는 합참에 해병대 사령관이 참석하지 못하게 했고, “해군이 자체적으로 육군을 갖는 것은 넌센스”라고 공언했다. 트루먼은 해병을 해군에 흡수시켜 해군의 경찰병력으로 남기고자 했다. 제2차 대전 중 유럽전선을 지휘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도 육군과 똑 같이 지상군과 항공병력을 갖춘 해병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해병대는 2차 대전 중 유럽 전선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도 해병대에 대한 인식과 애정이 없었다.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던 클리포트 케이츠 대장이나 해병 1사단장이던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런 발상에 경악했지만, 워싱턴의 정치적 분위기를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워싱턴의 해병대 사령부의 참모이던 브라이트 갓볼드 중령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해병대가 다시 생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자신도 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병대 사령관 케이츠 대장도 한국 전쟁이 해병대에 대한 정치적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反轉)시킬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케이츠 대장은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파병에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세(戰勢)를 극적으로 역전 시킬 방안을 생각하던 맥아더 장군은 전쟁 초기부터 인천에 상륙해서 적의 후방을 차단하려는 구상을 했다. 맥아더는 태평양 함대 해병부대장이던 르뭬엘 세퍼드 소장에게 이 아이디어를 문의했는데, 역사적 유물(遺物)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상륙작전을 다시 하게 되면 해병대의 존재가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한 세퍼드 소장은 맥아더의 제안을 반겼다.

상륙작전은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지만 해병대 사령부는 이에 앞서 해병 1사단이 한국에 가는 것으로 상정하고 전국 기지에 산재해 있던 해병대 병력을 1사단 본부가 있는 샌디에고 부근의 캠프 펜들턴으로 불러 들였다. 해병 현역 장병들은 전역이 1년 연기되었고, 제2차 대전 당시 태평양 도서(島嶼)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역전(歷戰)의 예비역 장병들이 현역으로 다시 소집되었다. 2차 대전 때 전설적 영웅으로 부각됐던 체스티 풀러 대령이 이끄는 1사단 1연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해병대 기지 캠프 르준에서 결집해서 파나마 운하를 거쳐 샌디에고를 거쳐 한국을 향하게 됐다.

해병 1사단 중 가장 전투태세가 잘 되어 있던 부대는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이 지휘하는 5연대였다. 해병대 사령부는 5연대를 주축으로 한국에 파병할 여단 규모의 부대를 창설하기로 했다. 5연대에 1개 포병대대와 1개 탱크 대대, 1개 항공단 및 지원부대가 추가되어 병력 6,500명 규모의 제1 해병여단(First Provisional Marine Brigade)이 구성됐다. 여단장에는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이 임명됐는데, 크레이그 준장 뿐 아니라 지휘관 대부분이 태평양 전쟁에서 싸웠던 참전용사였다. 해병여단은 자체적으로 항공단을 갖고 있어서 효과적인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해병은 또한 많은 장비를 확보하고 있어서 한국으로 병력을 보낼 때 트럭 등 수송수단과 군수지원품을 충분히 보낼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 육군은 많은 장비를 그대로 버리고 귀국했는데, 해병 보급장교들은 육군이 버린 장비에 적당히 해병대 표시를 찍어서 캘리포니아의 사막지대에 위치한 해병 병참기지에 보관했다. 건조한 지역에 보관한 트럭 등 중장비는 상태가 온전했기 때문에 해병은 육군 보다 훨씬 많은 장비를 갖게 된 것이다. 워싱턴의 해병대 본부에서 근무하던 갓볼드 중령 등 여려명의 장교들도 곧 한국으로 파병될 해병 1사단에 합류했다. 해병 1사단은 20,000명 병력으로 증강되었고, 탱크 60대와 병력 5000명 규모의 해병 제1항공단이 가담하게 됐다.

고전하는 미 육군

총 병력 50,000명에 달하는 미 육군 4개 사단(24보병사단, 25보병사단, 1기병사단, 7보병사단)이 한국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지만 7월의 두번째 주일까지 한국에서 실전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6,000명 정도였다. 24 보병사단의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7월 3일에 한국에 도착해서 즉시 최전방으로 달려갔다. 딘 소장은 대전 북쪽에 방어선을 치고자 했고, 산하 34연대의 두개 대대를 평택에 보냈다. 그러나 평택에 배치된 육군 사병들은 북한군의 탱크와 보병의 규모를 보고 압도되어 버렸다. 지휘관들이 발사명령을 내려도 겁에 질린 병사들은 총을 잡지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34연대장이던 로버트 마틴 대령은 바주카 포를 들고 북한군 탱크에 맞서다가 장열하게 전사했고, 지휘관을 잃어버린 34연대는 후퇴하고 말았다. 그날 천안이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탱크에서 야포(野砲)에 이르는 모든 무기와 장비에서 미 육군의 그것은 북한군의 그것에 비해 열세였다. 한국군은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처음 며칠동안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후퇴한 한국군 8개 사단은 잔존 병력을 수습해서 새로 부대를 구성해야만 했다. 미 공군과 해군, 그리고 호주 공군의 항공기가 제공권을 장악하고 남한에 내려온 북한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한가지 위안이었다.

7월 12일, 샌디에고 부두에서는 해병 1사단 병력이 해군 수송선에 올라타고 있었다. 한편 맥아더는 본국에 있던 2사단을 한국에 보내 줄 것을 합참에 요구했다. 7월 18일, 워커 중장은 대전을 방문해서 딘 소장을 만나서 25사단과 1기병사단이 곧 도착한다면서 24사단이 대전을 사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워커 중장은 딘 소장에게 24사단이 대전을 최소한 48시간 동안 지켜 줄 것을 부탁했다. 워커는 지원병력이 곧 도착한다고 딘을 안심시켰다. 워커는 금강과 대전을 잇는 전선이 무너지면 낙동강까지 북한군을 막을 방법이 없으며, 낙동강 전선이 뜷리면 부산을 잃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원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딘 소장은 앞서 전투로 큰 손실을 입은 휘하의 3개 연대로 버티어야만 했다. 21연대는 1,433명의 전사상자를, 34연대는 2,002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19연대도 전체 부대원의 3/4이 전사상자가 된 실정이었다. 

딘 소장은 사단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같이 싸우면서 사단을 지휘하기로 했다. 그는 큰 피해를 입은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 7월 20일 정오 경, 딘 소장은 전방의 34연대장을 만났는데 그 때 이미 주위의 24사단 병력이 북한군 공격으로 와해됐음을 알게 됐다. 딘 소장은 급하게 후퇴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사병들과 후퇴하던 중 그날 밤 실종되어 연락이 끊겼다. 딘 소장은 3년이 지나서 그 때 북한군의 포로가 됐음이 알려졌다. 딘 소장이 최선을 다한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상황파악을 하지 못해 24사단을 사실상 전멸시킨 치욕적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이 있다.

7월 22일이 되자 제1 기병사단과 25 보병사단 병력이 전방에 도착해서 전멸상태에 이른 24사단을 대체하게 됐다. 그러나 1기병사단과 25보병사단도 훈련이 부족하고 실전경험이 없음은 24사단과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북한군과의 전투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퇴해서 영동과 상주를 적에 내주었다. 상주를 적에게 쉽게 내준 책임은 주로 25사단 24연대(‘듀스퍼’라고 불린다. ‘deuce four’)에 있었다. 24연대는 장교는 백인이고 사병은 전원 흑인인 흑인부대였다. 흑인병사들은 당초부터 전의(戰意)가 없었고 전방에서 총소리가 나자 참호속에 숨어 버렸고, 장교들이 사격명령을 하자 집단으로 무기를 버리고 후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25사단 지휘관들은 24연대 병사들의 이탈을 막기위해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중에도 후퇴를 거부하고 기관총을 지키면서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윌리엄 톰슨 일병이 흑인 병사의 체면을 세웠다. 톰슨 일병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참은 군대에서 인종 분리를 철폐하기로 했다.

‘소방여단’이 도작하다

7월 31일에 미군은 낙동강과 진주와 마산을 잇는 전선(戰線)으로 후퇴하게 됐다. 미군은 이 전선을 두고 북한군 정예 10개 사단을 막아내야만 했다. 한편 산디에고를 출발한 제1해병여단은 8월 1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는 이제 한국은 끝났다는 비관적 전망과 흉흉한 루머가 무성했다. 항구에서 이들을 반갑게 맞은 20명의 해병대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초 대사 등 서울에 있던 미 대사관원들을 호위해서 부산에 내려온 대사관 경비병력이었다.

해병여단은 항공단 병력을 포함해서 총 6,534명에 불과해서 이미 한국에 들어온 미 육군병력에 비하면 소규모였다. 그러나 해병은 실전경험이 있는 전투부대였고,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갖고 있었다. 해병들은 태평양을 건너 오면서 좁은 함정 갑판 위에서 새로 보급된 신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무엇보다 해병에게는 해병정신이 있었다. 이제 전세(戰勢)를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해병대의 분발 뿐이었다. 해병여단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소방여단’(Fire Brigade)인 셈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해병여단장 크레이그 준장은 육군이 지배하는 전쟁이라는 데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8월 2일 밤, 해병여단에게 창원으로 향하라는 명령이 8군 사령부에서 떨어졌다. 8월 3일 오후 두시경 해병여단은 창원-마산 전선에 도착했다. 라이프지(誌)의 기자이자 사진가인 데이비드 던컨이 해병여단에 임베드(imbed) 되어 종군취재를 했다. (던컨이 낙동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찍은 사진은 한국전쟁을 상징하게 된다.) 크레이그 준장은 창원에 진주한 부대에 대해 높은 지대를 장악해서 경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낙동강을 뒤로 두고 서쪽에서 밀려 오는 북한군을 막는 가장 힘든 전투를 해병여단이 하게 된 것이다.

일본 고베의 미군 기지에는 해병 33항공단 소속 2개 편대가,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는 호위 구축함 2척에 60대의 해병 코르세어 전투기가 지상에서 싸울 해병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해병여단은 또한 경정찰기 4대와 신형 시코르스키 헬기 4대를 갖고 있었다. 육군과 달리 해병에게는 근접항공지원에 능숙한 코르세어기(機)와 ‘메뚜기’라고 불리던 경(輕)정찰기, 그리고 지휘관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헬기가 있어서 해병의 전투력에 크게 이바지했다. 

8월 5일, 영국 순양함 두척은 인천의 군사시설을 포격했고, 미 해군 항모 시실리호(號)에서 발진한 해병 항공기도 인천 지역을 폭격했다. 동해에서는 미 순양함 두척이 영덕의 북한군 진지를 포격했고, 한국 해군 함정은 영덕에 잠입하려던 북한군을 태운 북한 함정을 격침시키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8월 5일 늦게 해병은 드디어 북한군이 차지하고 있는 진동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진동리 – 고성 전투

8월 6일, 태플릿 중령이 이끄는 해병 5연대 3대대는 진동리를 행해 진격했다. 부산까지의 거리가 40마일 밖에 안되는 이 지역에는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육군 25사단 27연대(‘울프하운드’’라고 불린다. ‘Wolfhound’)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지키고 있었는데, 이곳이 뚫리면 부산이 그대로 함락되기 때문에 북한군은 집요한 공격을 가했다. 8월 7일 새벽 1시 30분, 마이켈리스 대령은 태플릿 중령에게 북한군 공세로 342 고지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긴급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캐힐 중위가 이끄는 3대대 G중대 1소대가 육군 1개 중대가 지키고 있는 342 고지를 향해 급히 출발했다. 북한군은 342 고지를 향해 집요하게 포격과 사격을 해서 고지를 오르던 해병은 많은 희생을 치렀다. 다음 날 해병 코르세어기가 적이 숨어 있는 곳을 저공비행으로 공격한 후에 육군과 해병은 342 고지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태플릿 중령은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는 255 고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55 고지를 맹폭(猛爆)한 후에 피건 대위가 이끄는 3대대 H중대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255 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캐힐 중위와 피건 대위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지만, 그날 전투 중 D중대는 소대장 3명 중 2명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8월 7-8일간 전투로 미군은 처음으로 북한군에 패배를 안겨 주었다.

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북한군이 집결해 있는 고성을 공격해서 적군을 사천까지 밀어 낼 계획이었다. 고성을 향하던 해병은 뜻밖의 큰 전과를 올리게 됐다. 해병 정찰기가 해병의 포격을 피해 고성에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던 북한군 83 기계화 여단의 행렬을 발견한 것이다. 해병 33항공단 소속 코르세어 편대가 즉각 발진해서 북한군 행렬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미 해병은 이 날의 전과를 ‘고성 칠면조 사냥’(‘Kosong Turkey Shoot’)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의 공격으로 북한군 차량 118대가 파괴되고 거기에 탑승했던 병력 다수가 살상돼서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은 최대의 피해을 입었다. 이날 파괴된 차량은 대부분 미제 포드 엔진을 부착된 소련제였으니 2차 대전 중 미국이 소련에 지원한 군수물자가 한국에서 미군을 공격하는 데 쓰인 것이다.


장촌리 전투

8월 12일, 해병 5연대 1대대는 고성으로부터 12마일 떨어진 장촌리에 도착했다. 장촌리를 지나는 길 양쪽에는 500피트 높이의 고지가, 가운데는 폭 500야드에 달하는 논이 있었고 앞에는 역시 고지가 있었다. 선두에 선 정찰중대 중대장 휴튼 대위는 매복 지형임을 판단하고 경계를 하게 됐다. 해병 정찰기도 아무런 징후를 발견하지 못하자 휴튼 대위는 B중대 1소대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진전하도록 했다. 바로 그 순간 북한군 두 명이 숲에서 뛰어 나와서 마을을 향해 달아나자 해병대원들이 사격을 했다. 전방에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은 집중사격을 시작했고, 휴튼과 부대원들은 길 옆의 도랑으로 피신해서 치열한 교전을 했다. 토빈 대위가 이끄는 B중대가 탱크 두대를 대동하고 도착해서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엇다. 

해병 항공단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 83 기계화 여단의 잔존병력이 장촌리 계곡의 높은 지역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만일 해병이 안일하게 진군했더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 반면 진동리에서 다른 방향으로 5마일 가량 진군했던 미 육군 25사단 5연대 전투팀은 북한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25사단장 킨 소장은 크레이그 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크레이그 준장은 5연대 3대대로 하여금 육군을 구하도록 명령했다. 3대대장 태플릿 중령과 사단 작전장교 스튜어트 중령은 헬기편으로 육군 교전지역으로 날라가서 현지 지휘관을 만나려고 했지만 이미 육군은 지휘체계가 무너진 후였다. 이들은 후퇴하는 트럭 행렬을 보고 이를 세우고 자신들을 밝힌 후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트럭에는 흑인 병사들이 가득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는 당했다, 가야 한다”고 했다. 태플릿 중령이 가로 막으면서 “내려서 싸워야 한다”고 하자, 한 흑인 병사가 트럭위에서 기관총을 겨누면서, “야, 백인 놈, 저리 비켜, 우리는 부산으로 간다”고 위협했다. 스튜어트 중령이 태플릿 중령에게 “어차피 아무 용도도 없는 애들이니, 보내주라”고 했다. 그날 흑인병사들과 같이 있었던 육군 25사단 555 야전포병대대는 전멸했고, 곡사포 12문과 차량 100대를 북한군에 넘겨 주었다. 태플릿 중령은 H중대로 하여금 육군을 섬멸하고 능선으로 돌아간 북한군을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육군은 도망가고 해병은 적을 추적한 것이다. 상황 보고를 받은 크레이그 소장은 육군의 지리멸멸에 한심해 했다.

8월 13일 새벽에 북한군은 장촌리 계곡에 정지해 있는 해병 5연대 1대대 B중대를 향해 다시 총공격을 해 왔고, 중대장 토빈 대위와 부중대장 펜튼 중위가 이끄는 B중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런 중에 8군 사령부는 밀양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을 전선을 지키고 싸우고 있었지만 북한군은 미 육군이 지키던 전선을 돌파해서 낙동강을 건넜기 때문에 밀양에서 마지막 방어를 하기로 한 것이다. 펜튼 중위는 토빈 대위에게 “우리는 놈들을 꺾어 버렸는데 왜 후퇴를 하나”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낙동강 전투

밀양으로 후퇴한 해병은 이제 밀양을 잃어버리면 대구와 부산을 동시에 잃어버릴 것이며, 오직 자신들만이 밀양을 지킬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이미 큰 손실을 입은 육군은 전의(戰意)를 상실해 버렸다. 8월 15일, 대구에 피난와 있던 한국정부는 대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부산으로 옮겼고,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대구 서쪽을 지키던 1기병사단은 북한군과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마산-창원 전선에선 해병을 적에 타격을 주었지만 육군이 패퇴하는 바람에 해병도 철수해야 했다. 동부 해안지역을 방어하던 한국군 3사단은 북한군에게 포항을 내주고 미 공군과 해군의 엄호 속에서 간신히 남쪽으로 후퇴했다. 북한군은 밀양을 점거해서 미군과 한국군을 반으로 쪼개서 후방에서 공격한 후 부산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대구와 부산을 잇는 복선(複線) 철로가 밀양을 지나기 때문에 밀양을 잃어 버리면 대구는 고립되는 것이다.

밀양에 도착한 해병은 강물 속에서 목욕을 하고 군복을 빠는 등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해병여단은 육군 24사단 및 9보병연대와 함께 밀양을 노리고 결집한 북한군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전사상자를 낸 육군은 지쳐 있었다. 8월 17일 오전 8시에 공격이 시작됐다. 그날은 낙동강 전투에서 가장 처절했던 날이었다. 능선 위에 자리잡은 북한군을 공격하는 주축을 담당한 해병 1대대 D 중대와 E중대는 부대원의 2/3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어서 A중대와 B중대가 지원에 나서야 했다. D중대 1소대장 싱카 중위는 부상을 당하고도 부대를 지휘하다가 다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B중대장 토빈 대위도 중상을 입어서 펜튼 중위가 중대 지휘를 맡아야 했고, B중대 1소대장 슈라이버 중위도 부상을 입고 부대를 지휘했다.

펜튼 중위는 전진해 오는 북한군 탱크 4대를 발견하고 직접 75미리 무반동총을 발사해서 2대를 격파시켰다. 세번째 탱크는 해병대 M-26 탱크가 격파했고 네번째 탱크는 해병 항공기가 격파시켰다. 무적(無敵)을 자랑하던 북한군 탱크가 여지없이 파괴된 순간이었다. 8월 18일 밤 2시30분에 북한군은 1대대를 향해 또다시 공격을 해왔다. 1대대 A중대는 적의 집중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지만 긴급히 출격한 해병 항공기의 근접공격과 지원포격에 힘입어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8월 18일 아침이 되자 북한군의 공세는 잦아 들었고 태플릿 중령이 이끄는 3대대가 공격에 나서 북한군이 지키던 오봉리 능선을 확보했다. 인근의 육군 9보병연대도 반격에 성공해서 19일 아침에 미군은 낙동강 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시체 1,200구와 많은 장비를 남기고 낙동강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이틀 간 전투에서 해병은 전사 66명, 부상 278명, 실종 1명이란 손실을 입었다.


합참과 맥아더, 육군과 해병 사이의 갈등

1950년 8월 말, 도쿄만(灣)에 정박 중이던 맥킨리호(號)에선 미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기획장교들이 모여서 은밀한 회의를 했다. 이들은 맥아더가 제시한 인천상륙작전을 검토했다. 맥아더는 해병 1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해서 섬멸하고자 했다. 맥아더의 이러한 전술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는 이런 구상을 합참과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에 대해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반대했다. 콜린스 대장은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좁고, 인천은 간만(干滿)의 차이가 커서 처음에 부대가 상륙한 후 반나절이 지나야 후속 부대가 상륙할 수 있으며, 또한 해안에 설치된 높은 방벽으로 인해 상륙군은 사다리를 필요로 하고 북한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경우 북한군이 인천시민들은 인간방패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70,000명 규모 병력을 군산에 상륙시킬 것을 제안했다.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터 셔먼 제독과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인천이 상륙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군산에 상륙하는 데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콜린스 참모총장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천상륙을 밀고 나갔고, 함참은 맥아더를 제어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독단으로 자신의 참모장인 네드 앨먼드 소장을 상륙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콜린스 대장은 “무어라고!”하며 소리쳤다고 한다. 앨먼드는 무능하다고 소문이 난 경량급 장성이었고 상륙작전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장성들은 앨먼드가 맥아더에 아부를 해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상륙작전을 기획했던 갓볼드 소장은 “앨먼드는 막연히 낙관적이며, - - 현실을 보지 못해서 - - 주변의 많은 장교들은 그를 싫어 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맥아더를 싫어했던 워커 중장과 앨먼드 소장과의 관계는 끔찍할 정도였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지 마셜에게 국방장관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군 지휘관들은 존슨 장관의 해임을 반겼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는 함참을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한다고 워싱턴에 일방적으로 통보해 버렸다. 

1950년 7월과 8월의 한국에서의 상황은 미군 역사에 있어서 최악으로 기록될 만 하다. 고위 지휘관들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지에 대해 알지 못했고 잘못된 판단을 해서 부대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 때 처럼 전투경험이 없는 단위 부대장들이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한 적이 미군 역사에 없엇다.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군사력을 무리하게 감축한 트루먼 대통령이라고 할 것이다.

딘 소장 후임으로 육군 24사단장이 된 존 처치 소장 등 육군 고위 지휘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유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서툴렀다. 반면 해병은 2차 대전 중 일본군을 상대로 태평양 도서(島嶼)에서 싸웠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해병장교와 부사관들은 북한군이 일본군 처럼 끈질기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실전경험이 없었던 육군 초급장교들은 한국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1949년에 임관한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의 60%가 한국전쟁에서 소대장으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비해 해병여단을 이끈 크레이그 준장의 지도력은 돋보였다. 과달카날과 이오지마에서 싸운 당시 54세의 크레이그 준장은 입증된 것이 아니면 하지 않는 전통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당시 처음 보급된 시고르스키 헬기를 자주 타고 전선을 방문했다. 장군도 사병과 똑 같은 식사를 한다는 해병의 전통을 지킨 그는 사병들 사이에서 신뢰가 높았다.


2차 낙동강 전투

해병여단이 오봉리 능선을 장악하고 북한군을 낙동강 건너편으로 쫓아내자 워커 중장은 해병에 감사를 표했다. 크레이그 준장은 헬기로 8군 사령부를 방문해서 전쟁 발발 후 한국을 처음 찾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콜린스 대장도 해병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8월 21일, 해병여단은 마산 부근에서 야영을 하면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던 해병들 사이에선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소문에 돌았다. 해병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상륙전에 참가할 것으로 생각하고 언제 어디에 상륙할 것인가에 대해 말을 나누었고, 인천에 상륙해서 서을을 해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해병들은 그들의 원래 소속인 해병 1사단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돼 있었다.

해병여단은 해병 1사단으로 복귀해서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부 경상도 전선은 다시 위태로와져서 해병여단은 ‘소방여단’ 역할을 또다시 해야만 했다. 8월 31일 오후, 육군 1보병사단 한 중대장은 부대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무자들이 웅성거리더니 그날 일당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지자 한국인 노무자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날 밤 북한군 1개 사단은 2사단을 향해 총공격을 했고 2사단 방어선 중간을 돌파해서 오봉리 능선과 영산을 장악하고 다시 밀양을 향해 들이닥쳤다. 해병여단이 피를 흘려 지켜낸 밀양이 또다시 위협받게 된 것이다.

육군 2사단은 1차대전에 참전해서 은성훈장을 받은 카이저 소장이 사단장이었으나 카이저 소장은 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휘하의 3개 연대의 연대장 중 어느 누구도 실전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 카이저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전선을 지킬 수 없다”고 보고하자, 화가난 워커 중장은 경비행기를 타고 2사단이 지키던 전방으로 향했다. 경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2사단 9연대 병력이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워커는 조종사에게 지상으로 가까이 내려가라고 하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후퇴하는 9연대 장병들에게 “거기 멈춰, 이 새끼들아, 돌아가서 싸우란 말이야!”라고 외쳤다. 그럼에도 후퇴하는 9연대 장병들은 사령관의 말을 들은 체 하지 않았다. 워커는 비행기를 사단본부로 향하라고 했다. 사단본부에 도착한 워커는 카이저 소장에게 “네 사단은 어디있냐 ? 네가 영산을 잃으면 우리는 밀양을 잃고 부산을 잃는다는 말이야. 넌 여기서 뭐하는 거야 !”하고 고함쳤다. 카이저는 “연락장교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고 변명하자, “내가 전방을 보고 왔단 말이야, 네가 사단을 통제하지 못하면 내가 할꺼야 ! 나는 이 전투에서 질 수 없어!”하고 큰 소리쳤다. 워커가 탄 경비행기의 조종사 마이크 린치는 워커가 8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중에 “나는 8군이 파괴되도록 그대로 둘 수는 없어. 그러나 나는 8군 전체를 잃고 있단 말이야. 이 사태를 어떻게 막을지 모르겠어.”고 흐느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9월 1일과 2일은 2사단에게 치욕적인 날이었다. 2일, 2사단 부사단장 브래들리 준장은 부대가 괴멸되었음에도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9연대장 존 힐 대텽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브래들리 준장은 공병대원들에게 방어에 나서라고 하자 이의를 제기한 공병 대대장 맥히천 중령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공병 D중대장 빌러 중위에게 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힐 대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평지가 아닌 고지에 부대를 배치한 빌러 중위 덕분에 D공병중대는 북한군 공세에 전멸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힐 대령은 빌러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했지만 힘든 전투에서 살아 남은 빌러 중위는 십자무공훈장을 받았다. 9월 1-2일 전투에서 영산을 잃어 버린 2사단은 부사단장의 적극적인 독전 끝에 더 이상 후퇴하지는 않았다.

워커 중장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을 향할 준비를 하던 해병여단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2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크레이그 준장에게 그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9월 3일, 해병 5연대 1대대와 2대대는 밀양을 출발해서 영산으로 향했다. 대위로 진급된 펜튼이 5연대 1대대 B중대를 이끌었는데, 라이프지의 던컨 기자가 B중대를 종군 취재했다, 1대대와 2대대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4일 오후에 오봉리 능선을 장악했다. 폭우가 내리는 동안에도 해병 코르세어기는 북한군을 향해 근접폭격을 했다. 해병대대의 오른쪽에서 배치된 육군 23연대의 폴 프리먼 대령은 코르세어 편대의 과감한 지원폭격을 보고 육군참모차장이던 매튜 리지웨이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 왼쪽에 있는 해병부대는 해병 항공기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공지원을 마치 포병 지원처럼 이용하고 있습니다. - - 장군님, 우리도 해병과 같은 항공지원을 받든가, 아니면 보병을 해체하고 해병대로 합쳐야 할 겁니다!”

오봉리 탈환의 선봉에 섰던 1대대 B중대의 펜튼 대위는 북한군의 공세가 약해졌음을 알게 됐다. 많은 전사상자를 낸 북한군은 조용히 후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펜튼의 부대원들은 파괴된 영산을 지나서 북한군 9사단 본부가 있던 장소를 지나가게 됐다. 이틀 간의 전투에서 해병 34명이 전사하고 157명이 부상당했다. 전쟁역사가들은 만일에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 전체에서 파상(波狀)공격을 하지 않고 병력을 집중해서 한 곳을 공격했더라면 미군 방어선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본다. 여하튼 이로써 해병여단의 2차 낙동강 전투는 끝났다. 해병여단은 8월 2일에 부산에 상륙한 후에 9월 5일까지 903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이제 해병여단을 인천상륙을 위해 부산으로 향하게 됐다.

(다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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