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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두 번 째 기회 (2007년)
작성일 : 2013-03-21 20:23조회 : 2,266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두 번 째 기회 (베이직 북스, 2007년, 234쪽, 26.95달러)

Zbigniew Brzezinski, Second Chance (Basic Books, 2007, 234 pages, $26.95)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 태생으로 폴란드 외교관이던 부친을 따라 캐나다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던 중 2차 대전을 맞았다. 조국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는 것을 본 브레진스키는 전후(戰後)에 조국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에서 소련의 대외정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으나 테뉴어를 받지 못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브레진스키는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봉쇄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섭(engagement)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968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이던 휴버트 험프리를 도왔으며,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의 해빙(解氷 : 데땅트) 정책에 반대했고 민주당 진보파 맥거번 상원의원의 평화주의에도 반대했다. 그는 현실에 근거를 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동유럽의 공산체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미 카터가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서자 브레진스키는 외교정책에 대해 자문을 했고, 당선된 카터는 브레진스키를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브레진스키는 국무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폴란드 등 동유럽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카터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해인 1980년에는 브레진스키는 폴란드 자유노조를 지지하는 등 동유럽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그 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대외 정책에 대해 활발한 의견을 개진해 오고 있다. ‘세 명의 대통령과 초강대국 미국의 위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브레진스키는 냉전이 끝난 후부터 이라크 전쟁이 실패로 귀결된 시기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그리고 조지 W. 부시의 대외정책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90년경부터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는데, 역사상 한 국가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적은 없었다.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보다 협력적인 글로벌 체제를 조성하고, 대량살상무기와 테러에 의한 위협을 저감시키고, 심각한 불평등 등 인류의 조건을 개선해야 하는 의무를 띠고 있는데, 이런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느냐가 미국이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것이다. 

조지 H. W. 부시는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천명했지만, 실용적 정치와 통상적 외교를 신봉한 그는 비전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다. 부시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탁월했으나 전략적 비전은 갖고 있지 못했다. 중국 주재 대사와 CIA 국장을 지낸 부시는 오랜 친구인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를 안보보좌관에,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과 재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부시의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통령과 안보보좌관, 그리고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에 의해 ‘톱 다운’ 방식으로 결정됐다. 대통령이 대외관계에 정통했기 때문에 백악관 안보회의도 효율적으로 운영됐다.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서 촉발된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부시는 스카우크로프트와 같이 펴낸 회고록에서 동유럽 상황이 1953년, 1956년, 또는 1968년의 재판(再版)이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확신했으며, 고르바체프가 독일 통일에 대해서 프랑스와 영국을 미국으로부터 격리시키려 시도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소련과 유고연방의 붕괴와 분할에 대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부시와 베이커 장관은 소련의 분할이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오직 딕 체니 국방장관만이 소련의 분할에 찬성했다.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부시 행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에서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고, 결국 소련은 분할되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는 소련이 갖고 있던 핵 무기가 유출 될 가능성에 촉각을 세웠고, 러시아의 옐친 정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 때 미국이 러시아에 제공한 많은 돈은 도중에서 없어져 버렸고, 러시아에서 부패한 세력이 대두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부시 행정부는 유고 연방의 분할과 그에 따른 혼란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과 대책이 없었고, 소련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소극적 대응으로 인해 미국은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됐다. 1990년 8월 1일,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부시는 자신과 행정부가 동유럽에 관심을 쏟아서 중동 상황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1991년 1월 - 2월에 걸친 걸프 전쟁에서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탈환하고 이라크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민은 신속한 승리를 기뻐했지만, 후세인은 정예부대를 포함한 20만 군대를 가진 채 권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걸프 전쟁이 이렇게 미완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나중에 다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1991년에서 1992년에 이르는 기간에도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정을 촉구하고, 한국에서 핵 무기를 철수해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 안전협정을 체결하도록 하는 성과를 올렸다. 부시에게 두 번 째 임기가 있었더라면 미완으로 남겨진 이라크, 팔레스타인, 북한 등에 대하여 보다 진전된 정책을 펼 수 있었을 것이나, 1992년 선거에서 그는 패배했다. 부시는 4년 재임하는 동안 많은 업적으로 존경 속에 퇴임했으나, 그가 대외 관계에 대한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더라면 그 후의 세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로벌 리더로서 부시는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고 미국이 앞으로 나갈 길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빌 클린턴은 글로벌 비전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클린턴에게 대외정책은 국내정치의 연장이었다.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부시 대통령이 국내문제에 관심이 적은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클린턴의 외교 팀은 진보적 성향의 민주당원들이었다. 클린턴은 외교문제에 대해선 자신의 외교 팀의 토론에 참여하는 참가자였다. 클린턴은 백악관에 국가경제자문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는 국가안보위원회 보다 더 효율적으로 기능했다. 클린턴은 세계화(globalization)를 과신한 측면도 있지만, 미국이 맞고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잘 알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냉전 이후 세계의 안전을 담보해야 했다. 미국은 구 소련이 남긴 핵 무기와 핵 물질을 관리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CIA는 1993년에 북한이 이미 핵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방치했다. 미국의 이런 애매한 태도는 이란으로 하여금 핵 개발을 나서도록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르완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비극을 방치했고, 소말리아에 성급히 개입했다가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 잘 알려진 참사를 초래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슬로 협정을 맺도록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암살되고 강경파인 벤야민 네타나후가 집권하자 유명무실해 지고 말았다. 클린턴이 8년간 임기를 마칠 즈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고, 중동의 정세는 한층 위험해 졌다. 클린턴은 위험으로 가득 찬 국제정세를 다루기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 캐주얼하고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인 그는 분명한 전략적 사고(事故)를 하지 못했다. 클린턴은 그 보다 훨씬 원리주의적인 후임자에게 불안하고 위험한 유산을 넘겨주고 퇴임했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는 대외정책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발언은 세계 문제에 대한 무지(無知)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9-11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9-11을 계기로 그는 새로운 대통령으로 태어났다. 부시의 외교 팀은 경험 많은 노장(老將)으로 구성돼 있었다. 부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딕 체니는 부통령이고, 걸프 전쟁으로 알려진 콜린 파월이 국무장관이며, 포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이었다. 이들은 연령과 경험 면에서 대통령을 능가했다.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 스쿠터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이 2선에서 역할을 했다.

부시의 국내정책 참모들은 9-11을 국내정치에 있어 호재로 생각했다. 부시 자신도 여러 차례에 걸쳐 9-11이 그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었다고 말했다.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惡)의 축’(‘axis of evil’)으로 지칭했다. 콜린 파월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라크로 확대시키는 데 반대했지만 그의 의견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 부시의 외교 팀은 이라크 문제에 몰입되어 버렸다. 이라크 침공을 시작하고 불과 3주일 만에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백악관은 환호했다. 그러나 2006년이 되자 전쟁에 들어간 비용과 희생은 그로 얻어낸 결과 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이라크 전쟁은 글로벌 리더로서의 미국의 위상을 손상시켰다. 관타나모 기지와 아브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은 미국의 도덕적 권위를 중대하게 훼손했고 이슬람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렸다. 이라크 전쟁은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손을 잠시 뗀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이 살아났고, 파키스탄의 정치적 불안이 커졌다. 미군이 입은 인명 피해도 엄청나게 컸고, 전쟁 비용으로 인해 미국 재정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 세력이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뭉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라크 전쟁은 무력에 주로 의존하는 대외정책의 한계를 잘 보여주었다. 오늘날 수에즈에서 중국 신창성(省)에 이르는 지역은 새로운 ‘글로벌 발칸’{Global Balkan}이 되고 말았다. 이 지역에는 각종 인종 5,000만 명이 살고 있는데, 미국은 과거에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에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철수한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오래 걸리는 과정이며, 인권은 경제적 자유에서 시작되어 정치적 자유로 발전되어 갔음을 이해해야 한다.

콘돌리사 라이스는 부시의 2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됐다. 다른 지역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분명한 목표도 없고 전략도 없이 슬로건을 바꾸어 다는 식으로 표류했다.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은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의 중재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이란에 대하여 미국은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 북한 문제에 대한 6자 회담을 시작해서 그나마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미국이 전쟁과 경제악화로 시름할 때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러시아도 경제를 회복했다. 이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이란, 중동,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교토 의정서에서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다른 길을 갔다.   
 
조지 W. 부시는 역사적 계기를 오해했고, 불과 5년 만에 미국의 지정학적 위상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다음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정당성을 재건해서 미국이 글로벌 안보를 담보하는 역할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미국은 특히 유럽과의 협력이 세계를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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