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피터 버겐, 가장 긴 전쟁 (2011년)
2013-12-04 15:45 2,426 이상돈


피터 버겐, 가장 긴 전쟁 (2011년, 프리 프레스, 473쪽, 28달러)

Peter Bergen, The Longest War : The Enduring Conflict Between America and Al-Qaeda
(2011, Free Press, 473 pages, $28.00)

피터 버겐은 CNN 특파원으로서 중동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왔으며, 9-11 테러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가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펴낸 이 책은 그간 미국이 벌린 ‘테러와의 전쟁’의 명암을 다루고 있다.

9-11 테러는 큰 충격이었지만 그 해 여름 테러 활동을 추적하던 일단의 사람들은 알 카에다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1년 9월 초,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했다. 9월 9일, 이들은 그들의 숙적이던 아마드 마수드를 암살했다. 칸다하르에 묶고 있던 빈 라덴은 추종자들에게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9-11 테러가 일어났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자 CIA에서 테러 문제를 담당하던 지나 베넷은 그것이 빈 라덴의 소행임을 알았다. CIA에서 알 카에다를 추적하던 지나 베넷, 바버라 서드 등은 미국의 중요한 정부기관이 테러의 표적임을 알고 있었다. FBI에선 대니얼 콜맨이 이끄는 팀이 알 카에다를 추적했지만 역시 테러를 막지 못했다. 당시 백악관에서 테러 대책반을 이끌던 리차드 클라크는 언론에 나와서 미국민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9-11 후에도 부시 대통령은 책임자를 문책하지 않았고 테러 관련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데 집중했다.

준비되지 않은 부시 행정부

2001년 1월 25일, 리차드 클라크는 새로 임명된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에게 알 카에다에 대해 보고하고 이에 대한 각료급 정책검토가 시급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라이스는 마치 알 카에다를 처음 들어 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라이스는 부(副)보좌관인 스티픈 해들리에게 이 안건을 넘겨 주었다. 9-11 전까지 부시 행정부 고위직들은 알 카에다에 대해서 단 한마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의 안보 국방 요직을 차지한 네오콘들은 사담 후세인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표시했다. 2000년 10월에 일어난 구축함 콜호(號) 폭파사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군함에 대해 테러를 가해도 미국이 반격을 가하지 않자 빈 라덴은 미국을 나약한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2001년 7월 10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알 카에다의 공격 위협에 대해 라이스에게 보고하고 이를 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라이스는 이를 부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8월 6일, 휴가 중이던 부시 대통령은 CIA 분석관이 올린 알 카에다의 위협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다. 그러나 부시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9월 들어서야 긴 휴가를 마치고 백악관에 돌아왔다. 그 해 여름 라이스 보좌관은 대통령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군의 효율성을 제고한다면서 군 장성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그 다음 날 리차드 클라크는 부시에게 “알 카에다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보고했다. 부시는 “이라크가 연루됐는지를 파악하라”고 했다. 클라크는 “이라크가 연루됐다는 근거는 없다”고 서면으로 보고했다. 9월 13일,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는데, 럼스펠드는 “이라크가 위협”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 사태에 대해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다. 테닛 CIA 국장은 “CIA 팀을 보내서 아프간 북부동맹군과 합동작전을 펼 것”을 제안했다.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라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이라크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이라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9월 20일, 부시는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10월 7일부터 미군기들은 탈레반에 대해 공습을 시작했고, 이어서 특수부대 팀이 마자르 이 샤라프에 투입됐다. 11월 9일, 마자르 이 샤리프가 북부동맹군에 함락됐고, 사흘 후에 카불이 북부동맹군 수중에 들어갔다. 미리 아프간에 들어 온 CIA 팀은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하미드 카르자이를 새 정부 수반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타린 코우트에서 미 해군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탈레반은 결국 그들의 본거지인 칸다하르를 내 주고 흩어져 버렸다. 12월 7일, 카르자이는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에 입성했다.

빈 라덴 탈출하다.

카불이 북부 동맹군에 함락되자 빈 라덴과 다른 알 카에다 지도급들은 아프가니스탄 동쪽에 위치한 잘랄라바드로 도피했다. 잘랄라바드는 파키스탄과의 국경과 50마일 떨어져 있는 도시로, 빈 라덴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왔을 때 처음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잘랄라바드에서 파키스탄 국경으로 가는 도중에는 토라 보라 산지(山地)가 있어 숨기에도 좋았다. 빈 라덴은 토라 보라를 좋아했고 동굴에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어 놓고 거주하기도 했다. 2001년 11월 17일부터 시작된 라마단 기간 중 빈 라덴과 알 자와히리는 토라 보라 동굴로 피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불이 북부 동맹군에 함락되던 날 카불에 도착한 CIA 팀장 번첸은 빈 라덴이 토라 보라로 도피했다고 생각하고 대원 8명을 이끌고 그리로 향했다. 델타 포스 대원 40명, 그린 베레 14명, 영국 특공대원 12명 등이 추가로 도착해서 60명 정도로 구성된 번첸 팀은 토라 보라 산을 뒤지면서 알 카에다 대원들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토라 보라 산지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증원군을 요청했지만 국방부 지휘계통에서 그 요청은 사라져 버렸다. 60명 대원으로 토라 보라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토라 보라에 대해서 대대적 공습이 이루어 졌고, 12월 9일에는 데이지 커터라는15,000 파운드 초대형 폭탄이 투하됐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폭탄 투하로 빈 라덴이 만들어 놓은 동굴 요새는 파괴됐고, 빈 라덴은 200미터 차이로 죽음을 면했다. 12월 12일, 알 카에다와 전투를 벌이던 북부 군벌 아지 가미샤릭은 알 카에다 지휘관과 항복협상을 벌인다면서 하루 동안 공세를 그쳤다. 그 날 밤에 알 카에다 지도부는 토라 보라를 탈출해서 파키스탄으로 스며들었다. 토라 보라에 보다 많은 지상군을 투입하지 못한 것은 미군의 중대한 실책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과 주변에는 미군 정예부대  2,000명이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군 지휘부는 이들을 보내서 국경을 봉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지휘부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였던 아프가니스탄을 상실했다. 9-11 테러는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준 전술적 승리였지만, 그들은 본거지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전략적 실패였다.

혼란스러운 미국 내부

테러 위협에 준비되어 있지 않던 부시 행정부는 9-11 후 테러 위협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다. 그 해 10월에는 탄저균 봉투가 의회와 언론인에게 배달되는 일이 벌어져서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탄저균 테러는 한 과학자의 미친 짓으로 밝혀졌지만 세균 테러를 두고 부시 정부는 혼선을 빚었다. 부시 정부는 사로 잡힌 알 카에다 대원에 대해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 대법원은 행정부가 이들에 대해 제네바 협정을 적용하라고 판결했다.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에 의해 이루어 졌다. 콘돌리사 라이스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결정이 이루어 진 하루에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는 강압적 방법으로 알 카에다 포로들을 심문했지만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과잉적이었지만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라크 침공

빈 라덴은 서방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담 후세인이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고 비난했다. 빈 라덴은 이라크 바트당(黨)의 세속주의를 혐오했고, 사담 후세인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어 왔다. 그러나 9-11 테러 후 부시 정부는 이라크 정부와 알 카에다가 연계되어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물 사건의 배후에 이라크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다수 이라크 전문가들은 그 주장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리차드 펄, 폴 울포비치 등 네오콘 이론가들은 “이라크가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있고 따라서 9-11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네오콘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이라크 망명객 아마드 찰라비가 제공한 의심스러운 정보를 믿었지만, 나중에 찰라비는 사기꾼임이 밝혀졌다. 9-11 테러범이 이라크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나중에 사실이 아님으로 밝혀졌다.

2002년 1월, 부시는 새로운 예방전쟁(preventive war)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악(惡)의 축’(axis of evil)로 지칭했다. 2002년 초에 부시는 이미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의 테러대응 책임자였던 랜드 비어스는 빈 라덴으로부터 눈을 떼고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해서 사직했다.

2003년 3월 19일, 부시는 이라크 공격을 명령했다. 3주일 만에 미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고 대신에 연합군 임시정부(Coalition Provision Authority : CPA)가 통치권을 행사하게 됐다. CPA는 바스당 기구를 해산했고, 이라크 군대도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이라크 군이 갖고 있던 막대한 무기와 탄약을 압수하지 못했다. 직장을 잃어버린 이라크 군인들은 무기를 약탈해서 민병대로 변신했다. CPA 장관이던 폴 브레머는 순니 부족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로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고 미군은 반군(叛軍)의 공격에 시달려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요르단 출신인 악명 높은 테러 전사(戰士) 알 자르카위는 반군을 이끌고 칸다하르에서 미군과 싸웠는데,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부대원을 이끌고 이라크로 들어왔다. 그는 이라크 전역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했는데, 2003년 8월 19일에는 바그다드에 설치된 유엔 건물을 폭파해서 유엔 직원 22명을 죽게 했다. 유엔은 이라크에서 철수했고, 이라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고 말았다. 자르카위는 인질로 잡은 미국인을 참수하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 자르카위는 이라크의 시아파를 폭발물로 공격해서 순니파와 시아파 간에 피비린내 나는 폭탄 테러 악순환을 촉발시켰다. 팔루자에선 순니파 반군이 미국 경호업체 직원 4명이 살해하고 그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4년 11월, 미 해병대는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치열한 시가전 끝에 팔루자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라크에는 아랍 전역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반군이 몰려 들어서 미군을 공격했다. 이라크 침공의 근거로 내 세웠던 대량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한 미국은 이라크에 세계 각지의 테러리스트들이 몰려 들어서 이들과 전쟁을 한다는 궁색한 이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르카위 등이 실제로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연계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미국과 싸우기 위해 이라크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2003년에 비해 2006년에는 일곱 배나 많은 테러 공격이 발생해서 무수한 민간인이 사망했고, 미군도 각종 은익 폭발물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라크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나 오히려 테러를 유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부시 정부는 뒤늦게 이라크 국민에 민주주의를 안겨 주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입장을 바꾸었지만, 순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내전으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의 삶은 한층 피폐해졌다.

아프간 전쟁

2003년 들어서 아프가니스탄은 비교적 평온해 졌다. 탈레반의 압제를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망갔던 많은 아프간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 왔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카르자이는 예상대로 당선됐다. 미군 지휘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병력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부시 정부의 관심을 이라크에 쏠려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미군 병사가 줄어 들자 치안이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가 제공한 원조는 구호활동을 한다는 각종 국제기구의 인건비와 경비로 대부분 쓰여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아프간 사람들은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2006년 들어서 탈레반 반군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테러를 하기 시작했다. 아프간 중앙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탈레반이 다시 정부와 같은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나토 26개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안전에만 급급해서 전투를 할 자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군 외에는 영국군과 캐나다 군 만이 원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프간에는 다시 마약 재배와 밀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탈레반이 이에 개입했다. 탈레반은 외국인을 인질로 삼아 돈을 갈취했다. 2006년 들어서 카르자이 정부는 단지 수도인 카불과 주변만 장악하게 됐다. 부시가 8년간 임기를 마쳤을 때 아프가니스탄 전역의 72%가 탈레반의 통제에 들어갔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느냐고 아프가니스탄을 방치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알 카에다 2.0

2004년 3월 11일, 스페인 국철이 모로코 출신 무슬림들에 의해 폭파돼서 191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 당했다. 스페인이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데 대해 불만을 품은 집단들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테려였다. 2005년 7월 7일에는 영국 지하철이 자폭 테러 공격을 당했다. 승객 52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는데, 범인들은 영국에서 자란 무슬림들이었다. 알 카에다와는 연계되지 않았지만 알 카에다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테러범들이 벌인 이 같은 테러는 세계 어느 나라도 이슬람 테러에서 안전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2008년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미국인이 소말리아에 건너가서 자폭테러를 감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2009년 11월 5일, 텍사스 포트 후드 미군 기지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군의관인 니달 하산이 총기를 난사해서 동료 군인 13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무슬림들이 위험한 테러범으로 돌변할한 것이니, 새로운 형태의 알 카에다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셈이다.

파키스탄

토라 보라가 함락된 후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국경을 넘어서 파키스탄에 스며들었다. 파키스탄 서부의 광활한 접경지역은 이들이 은둔하기에 적합했다. 사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에 있어 이 지역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와 국경분쟁이 있는 캐슈미르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민병대를 배후에서 지원했고, 그런 탓에 파키스탄 군부 내에선 탈레반을 지지하는 성향이 농후했다. 

9-11 테러 후 미국에 협력해 온 무샤라프 대통령은 국정 장악력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미국은 망명지에서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지켜 보고 있었다. 옥스포드와 하버드를 나온 매력적인 부토 여사는 자신이 집권하면 탈레반과 알 카에다를 없애겠다고 공언했다. 2007년 10월, 부토 여사가 카라치로 돌아오자 지지자들은 환호했는데, 그런 와중에 두 명의 테러범들이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거리에 나온 140여명이 사망했지만 부토는 간신히 화를 면했다. 탈레반은 그 해 12월 27일 라아발핀디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부토 여사를 저격해서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라크 상황

알 자르카위는 이라크 내에서 독자적인 알 카에다 그룹을 이끌면서 가공할 만한 테러를 이끌었다.  2006년 2월 22일, 자르카위 그룹은 이라크 내의 시아파 성지인 사마라에 있는 황금 모스크를 폭파해서 이라크를 내란으로 내몰았다. 자르카위 그룹은 이라크 전역에 테러를 감행해서 미군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자르카위가 장악했던 라마디 등 안바 지역에서 순니 부족장들이 지르카위를 적으로 선언하고 미군과 협력하자 상황은 자르카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군은 포로로 잡힌 자르카위 대원을 심문해서 자르카위의 소재를 파악하고, 2006년 6월 7일 F-16기를 발진시켜 그를 처치했다.

2006년 초, 자르카위가 황금 모스크를 폭파하고 난 후 이라크 상황은 최악이었다. 미군 지휘부는 그들이 이라크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2006년 여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2년간 근무한 백악관 안보 부보좌관 메건 오설리번에게 상황을 물어 보았다. 오설리번은 “이라크 상황이 매우 나쁘다”고 답했다. 오설리번은 이라크에서 “미군을 감축하면 이라크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유일한 방법은 미군을 증강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직접 제안했다. 반면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 케이지 대장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미 지상군을 철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리랑카 내란을 공부해서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오설리번은 군 지휘부의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설리번은 그런 상황에서 미군 병력을 감축하면 베트남의 재판(再版)이 된다고 생각했다.

2006년 10월, 안보보좌관 스티픈 해들리와 오설리번은 이라크 현지를 방문했다. 이들은 연대장과 대대장을 두루 만나서 의견을 구했다. 현지 지휘관들은 “이라크 국민들이 미군의 도움을 원하고 있다”면서 “이라크 군에게 치안을 넘겨 줄 때까지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라크 상황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병력을 증강해서 적극적으로 테러를 진압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만 했다. 전쟁 역사학자인 프레드 케이건과 베트남 참전용사인 전 육군참모차장 잭 케언이 병력증강(surge)에 동조했다. 그러던 중 의회는 이라크 연구 그룹이 작성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이라크 사태가 위중하며, 이라크 군이 제 역할을 하도록 미군이 도와야 한다”고 했다. 의회의 보고서는 이라크 철군을 촉구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의회의 분위기도 병력증강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럼스펠드 후임으로 국방장관이 된 로버츠 게이츠는 특수전을 전공한 페트레이어스 대장을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증강을 추진했다.

2007년 2월부터 미군 추가병력이 이라크에 도착했는데, 5개 연대가 바그다드 주변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 미군 증강에 따라 대대적인 작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미군 사상자가 늘어났으나 2007년 하반기 들어서 이라크 반군의 활동은 수그러졌다. 2008년 들어서 이라크 군과 경찰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고, 미국과 이라크 정부는 미군을 2009년 6월말까지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2009년 6월말까지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가 이루어졌지만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얻은 것이 무언지는 의문이다. 미군 장병 4,500명 이상이 전사했고 3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고, 10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사망했다. 미국 납세자들은 1조 달러 이상을 이라크 전쟁에 소모했다.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폴 울포비치는 “이라크의 석유 자원으로 이라크 재건비용을 댈 수 있다”고 주장했자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이 의도한 목적은 아예 없었던 셈이다. 이제 이라크는 시아파가 주도하는 국가가 됐으며, 세계 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추락했다. 더구나 2010년 들어서 알 카에다는 이라크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병력증강이 없었더라면 미국은 이라크에서 더욱 안 좋은 모습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병력증강은 부시 대통령이 재임 중 그가 했던 가장 외로운 결정이었다. 군 수뇌부와 의회가 모두 반대하고 있음에도 부시는 젊은 보좌관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어려운 결정을 했던 것이다.

오바마의 전쟁

오바마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알 카에다와의 전쟁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 미국은 파키스탄 내 반군 지도자를 무인 공격기를 통해 공격하는 빈도를 부쩍 높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오바마가 취임했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2003년 여름의 이라크와 비슷했다. 2009년 4월에 분석한 바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의 40% 지역이 탈레반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탈레반은 미군 침공 후 상실했던 기반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기 위한 지원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오바마 정부는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 맥키어넌 대장을 교체하고 특수전 전문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 대장을 임명했다.

칸다하르 등 아프가니스탄 남쪽과 동쪽은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2009년 여름, 미 해병대는 칸다하르 서쪽에 있는 헬만드 지역에 공세를 펴서 탈레반을 격퇴시켰다. 2009년 들어서 미군 33,000명이 아프가니스탄에 증파됐으나, 맥크리털 대장은 병력 40,000명을 추가로 요청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등은 “탈레반을 격퇴시킬 필요가 과연 있는가” 하는 궁극적 문제를 제기했다. 2009년 12월 1일, 오바마는 웨스트 포인트에서 행한 연설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병력 30,000명을 증파하고 2011년 7월부터는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겠다”고 했다. 이라크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병력증강(surge) 전략을 택한 것이다. 2010년 6월, 롤링스톤지(誌)와 인터뷰 파문으로 맥크리스털 대장이 물러나자 오바마는 페트레이너스 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 들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 c ) 이상돈


캐런 하우스, 사우디 아라비아 (2012년) 
앤드류 바세비치, 미국의 신(新)군사주의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