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앨런 크로포드 외, 앙겔라 메르켈 (2013년)
2014-01-17 08:03 2,872 이상돈


앨런 크로포드 – 토니 츄츠카, 앙겔라 메르켈 (윌리 – 블룸버그 프레스, 2013년, 205쪽, 29.95 달러)

Alan Crawford and Tony Czuczka, Angela Merkel (Wiley – Bloomberg Press, 2013, 205 pages, $ 29.95)

2005년 11월에 독일 총리로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은 2009년과 2013년에 연임하는 데 성공했다. 최초의 여성 독일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라는 기록을 세운 메르켈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다. 메르켈은 대연정을 두 차례나 이루어내서 국내정치를 통합시켰을 뿐 더러, 그리스 사태로 촉발된 유럽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유럽 통합을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의 독일주재 기자인 저자들은 이 책에서 메르켈이 걸어 온 길과 위기에서 더욱 빛나는 메르켈의 리더십을 잘 설명하고 있다.

출생과 성장

1954년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메르켈의 결혼 전 이름은 앙겔라 카스너이다. 앙겔라의 부친은 베를린 출신으로 목사였고, 모친은 함부르크 출신으로 영어 교사였다. 부친이 교회 일로 함부르크에서 머물 때 이들은 결혼을 해서 앙겔라를 낳았다. 당시는 동독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대거 넘어 갈 때였는데, 이들은 오히려 동독 지역으로 건너갔다. 교회가 앙겔라의 부친에게 베를린 북동쪽에 위치한 템플린으로 가서 신학교를 세우라고 명했기 때문이었다. 템플린은 베를린 보다 폴란드에 더 가까운 자연 풍광이 좋은 작은 도시였다. 앵겔라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는데, 물리학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좋아했다. 14살 때부터 앙겔라는 학교 실험실에서 라디오를 숨겨 놓고 서독 방송을 즐겨 들었다.

1950년대에 서독과 동독은 왕래가 자유로웠고, 함부르크에 살고 있는 앙겔라의 모친의 친척들은 템플린을 종종 방문했다. 1961년 여름, 앙겔라의 가족과 함부르크에서 온 외할머니는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서독 바바리아까지 여행을 하고 템플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고 국경을 폐쇄했다. 템플린 주민들은 놀랐고, 서독 출신인 앙겔라의 어머니는 통곡을 했다. 197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앙겔라는 친구들과 함께 프라하를 여행했고,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내에서 앙겔라와 친구들은 서방 음악을 즐겨 듣고 디스코를 췄다. 자연을 좋아한 앙겔라는 가까운 동유럽 국가를 여행했고, 서방세계를 동경했다.

앙겔라는 1977년에 같은 물리학과 친구인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당시 23세였던 메르켈은 동독 정부가 결혼한 부부만이 아파트에서 같이 살 수 있고 같은 도시에서 일 할 수 있게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훗날 밝혔다. 1981년에 메르켈은 갑자기 짐을 챙기고 남편과 헤어졌다. 그럼에도 앙겔라는 남편 성(姓)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앙겔라는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동독 비밀경찰 슈타시는 교수가 되기 위해선 슈타시 비밀정보원이 되어 동료들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고 하자 포기했다. 대신에 앙겔라는 베를린에 있는 동독 학술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해서 1986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술원에서 일 할 때 앙겔라는 두 번째 남편이 될 요하임 사우어를 만났다. 만일에 앙겔라가 슈타시 정보원으로 이름을 올렸다면 독일이 통일된 후에 정치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과학자였지만 앙겔라는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앙겔라의 부친은 원래는 동독 체제를 싫어했지만 자신의 교회와 가족을 위해서 동독 체제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친과 달리 앙겔라는 동독 체제가 병적(病的)이라고 생각했고, 부친이 내세웠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경멸했다. 앙겔라는 1980년대 중남미를 풍미했던 해방신학은 물론이고 안토니 기든스의 ‘제3의 길’도 불신했다. 앙겔라는 첫 남편과 이혼한 후 매우 좁은 골방에서 생활하는 등 어렵게 지냈다.

독일 통일과 정치 입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메르켈은 TV를 보고 모친에게 전화를 걸고 “이제 서독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군중을 따라서 서 베를린으로 넘어 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 통일 후 동독지역은 그나마 있던 경제 시스템이 순식간에 붕괴하고 큰 혼란이 일었다. 서독 총리이던 헬무트 콜은 동독 출신인 한스-크리스티안 마스를 동독으로 파견해서 1990년 총선에 참여할 기민당 조직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동 베를린에 도착한 하스는 메르켈을 만나서 새로 만들 동독내 기민당 연대 기구의 대변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앙겔라는 정치에 간여하게 됐다. 1990년에 치러진 동독 지역 총선에서 총리로 선출된 메지에르는 앙겔라를 동독 정부 부대변인으로 임명했다.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공식적으로 통일을 하고 동독 정부는 해산했다. 그 해 12월 2일에 통일된 독일에서 치러진 첫 총선에서 메르켈은 발틱 해에 접해 있는 메클렌부르그–서부 포메라니아 지역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을 내각에 포함시킬 필요를 느낀 헬무트 콜은 메르켈을 여성청년부 장관에 임명했다. 언론은 세련되지 못한 옷을 입고 담배를 피는 메르켈을 ‘콜의 여인’이라고 조롱했다. 1994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한 콜은 메르켈을 환경장관에 임명했다. 환경장관으로서 메르켈은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를 베를린에서 개최했고, 이 회의는 온실가스를 감축토록 하는 협정을 채택했다.

1998년 총선에서 콜이 이끄는 기민당은 패배하고 사민당이 승리했다. 이 선거에서 메르켈은 당선됐지만 얼마 후 콜이 총리 시절에 불법선거자금을 받았음이 밝혀져서 볼프강 쇼벨 기민당 대표가 사임했다. 당시 기민당 사무총장이던 메르켈은 콜 전 총리를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스캔들에 휩싸인 기민당은 메르켈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2002년 총선을 앞두고 당 대표를 선출해야 하는 기민당은 메르켈을 기민당 대표로 선출했다. 이렇게 해서 근검절약이 몸에 밴 동독 출신 여성이 기민당을 이끌게 됐다.

2005년 총선

1998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패배했을 당시 독일은 경제상황이 나빠서 심지어 ‘유럽의 병자’라고 불렸다. 새로 총리가 된 슈뢰더는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노동자는 경직되어 있으며 복지지출은 늘어가는 상황을 인수 받았다. 더구나 경제의 세계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져서 독일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이 와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았다. 이에 대한 슈뢰더 총리의 답이 ‘아젠다 2010’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노조 등 사민당의 지지기반이 ‘아젠다 2010’에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야당인된 기민당을 이끌던 메르켈은 ‘아젠다 2010’을 지지했다.

2005년 총선이 다가오자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은 당시 12.7%에 달하던 실업률을 이슈로 제기했다. 언론은 기민당이 사민당을 여유있게 누를 것으로 예측했으나 슈뢰더 총리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격차는 1%로 줄어들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사민당-녹색당 연합 중 어느 연합도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대연정을 이룩하려 했으나 총리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 결국 기민당-기사당, 그리고 사민당이 참여하는 대연정을 이룩하고 메르켈이 총리직을 맡기로 했다.

2005년 총선을 앞둔 2003년 10월에 행한 ‘독일은 어디로 가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메르켈은 독일의 변화를 촉구했다. 메르켈은 능률을 중시하고, 창의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고 균등주의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고등학교가 학생들을 선택해서 뽑을 수 있어야 하며, 제조업 외에도 금융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두고서 ‘기민당의 대처화(化)’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독일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독일 국민을 이를 받아드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더구나 총선 기간 중 메르켈은 GDP와 GNP를 혼동하는 실수를 했고, 플랫 세금(flat tax) 도입을 주장하는 교수를 정책자문으로 영입해서 불필요한 세금 논쟁을 야기했다. 2005년 8월에는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사민당을 19% 차이로 이기는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왔으나 메르켈의 연이은 실책으로 인해 선거일 직전에는 사민당이 역전하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기민당은 35.2%를 얻어서 34,2%를 얻은 사민당에 신승했고, 대연정을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됐다.

2009년 총선에서 승리하다

대연정의 결과로 메르켈이 구상했던 대처식(式) 정책은 채택될 수 없었고, 사민당과 합의가 가능한 대책만이 시행됐다. 그 결과 연금수급 개시연령이 67세로 상향조정됐고, 부가가치세율이 16%에서 19%로 인상되었으며, 최고구간 소득세율도 45%로 인상됐다. 메르켈은 슈뢰더 총리 시절에 만들었던 ‘아젠다 2010’을 채택하고 자신이 내걸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안은 폐기했다. 2009년 총선에서 승리한 메르켈은 기민당-기사당 연합에 자민당을 추가해서 사민당이 빠진 소연정 내각을 구성했지만 자신이 내걸었던 대처식 정책을 다시 추진하지는 않았다. 메르켈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중도층은 메르켈을 지지했고, 내세울만한 정책 이슈를 상실한 사민당은 2009년 총선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두 번 째 임기 중 메르켈을 괴롭힌 쟁점은 원자력 발전소였다. 슈뢰더 총리는 재임 시절에 독일내 원전(原電)을 2020년까지 철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009년 총선 후 소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은 원전 사용기간을 연장하는 정책을 갖고 있었다. 메르켈은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의 정책과 점증하는 원전폐기 여론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만 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메르켈은 원전을 원래 계획대로 폐기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메르켈의 이 같은 정책변화는 기회주의적으로 비추어졌다. 그 즈음에 실시된 바덴-뷔르템부르크 주 선거에서 녹색당이 1위를 하고, 기민당이 2위, 그리고 사민당이 3위를 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원전에 대한 유권자의 의식이 반영돼서 기민당-자민당 연립정부가 지배하던 바덴-뷔르템부르크에 녹색당-사민당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메르켈의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이 지방선거에서 속속 몰락했으니, 메르켈에겐 뼈아픈 패배였다. 국내정치에서 메르켈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유럽 경제위기

2010년 들어서 유럽에서는 경제위기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스 등 여러 나라가 재정파탄에 빠진 것이다. 메르켈은 재정파탄이 난 그리스를 꾸짖고 “그리스가 도움을 원한다면 보다 많은 예산삭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리스 같은 “무책임한 국가들을 유로 통화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스에선 오랫동안 집권당이던 파판드레우 내각이 붕괴하고 파파데모스 내각이 들어섰지만 국민들은 긴축정책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리스가 지급불능 상태에 빠질 것으로 보였고, 이로 인해 시장이 붕괴될 가능성이 우려됐다. IMF도 그리스 부도사태가 초래할 대혼란을 걱정했으나 결정권은 메르켈이 쥐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메르켈은 2011년 말과 2012년 초에 걸쳐 “그리스가 구제금융 조건을 준수한다면 유로권에 머물게 하겠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국내정책에서도 그러했듯이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메르켈은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2012년 선거를 통해 그리스에는 사마라스 내각이 들어섰다. 그리스는 독일이 지나친 예산삭감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나 독일 국내여론은 그리스 등 구제금융을 기다리는 나라들의 주장에 냉담했다. 메르켈은 그리스 정부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취하라고 촉구했고, 2012년 12월에 드디어 그리스에 대해 491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이 제공됐다. 유럽을 뒤흔든 위기가 일단 수습된 것이다. 2012넌 12월에 열린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전체 투표의 98% 지지를 얻어 당 대표로 다시 선출됐다. 메르켈은 독일의 지도자일뿐더러 명실상부하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잡았다.

메르켈의 경제철학과 정치 스타일

그리스, 폴튜갈, 아일랜드에 대한 구제금융은 메르켈이 주도한 것이었다. 메르켈은 이들 나라에 긴축정책과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붙여서 폴 크루거만 교수 같은 진보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독일은 통일 후 20년 동안 동독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해야 만 했다.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은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경제체제에 익숙해 있었고 영미식 자유방임주의 경제철학에 대해 동감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균형재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2007년에 통일 후 처음으로 독일 재정이 균형을 이루었으나 2009년에 독일경제는 다시 침체에 빠졌다.

메르켈은 부채를 줄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2011년까지는 균형재정 기조를 달성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메르켈은 하이엔드 제조업과 수출경쟁력이 독일 경제의 자랑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대기업과 중간 기업, 그리고 소규모 기업이 서로 협력하는 독일 모델이 독일 경제의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에선 취업인구의 60%가 근로자 500명 이하인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언론은 메르켈을 두고 ‘주부 스타일의 고단수 정치’(‘High Politics, Housewife-Style’)라고 불렀다. 하지만 메르켈은 자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 스타일’이란 명칭은 걸맞지 않는다. 두 번째 결혼한 현 남편은 언론 노출을 꺼리고 있으며, 메르켈은 시간만 나면 자신의 지역구이기도 한 옛 동독 지역을 자주 찾는다. 메르켈은 자신의 사무실에 프러시아 제국을 독신으로 34년간 통치했던 카트리나 여제(女帝)의 초상화를 걸아 두고 있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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