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리차드 하스, 필요적 전쟁, 선택적 전쟁 (2009년)
2014-01-23 19:56 2,057 이상돈


리차드 하스, 필요적 전쟁, 선택적 전쟁 (2009, 2010 pbk, 사이먼 앤드 슈스터, 337쪽, 16달러)

Richard N. Haass, War of Necessity, War of Choice (2009, 2010 pbk, Simon & Shuster, 337 pages, $16.00)


리차드 하스는 조지 H. W. 부시 행정부 시절 대통령 보좌관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정책실장을 지냈으며, 2003년부터는 외교협의회 회장을 지내고 있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을 도와서 걸프 전쟁을 준비했으나,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보좌관으로서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었다. 하스는 이 책에서 아버지 부시 정부의 걸프 전쟁은 정당한 필요적 전쟁이었지만, 아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는 선택적 전쟁이라고 규정한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2009년에 이 책이 나오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0년에 나온 페이퍼 백에서 저자는 책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자신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졸렬한 선택(poor choice)이었다고 말한다. 9-11 테러 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은 필요적 전쟁이었지만, 오바마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증파하고 전쟁을 확대한 것은 선택적 전쟁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공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이 미군을 파병한 조치는 필요적 전쟁이었으나,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상했을 때 한국 전쟁은 선택적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본다. 저자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의 실수를 교훈 삼아서 바그다드 진격을 중단하고 전쟁을 종료시켰다고 말한다.

두 개의 이라크 전쟁

저자는 1990년 여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백악관 안보 부보좌관으로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과 함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만나 상황을 의논했던 일을 떠올린다. 2002년 여름에 저자는 국무부 정책실장으로서 이라크 침공이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하고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에게 그런 의견을 피력했더니, 라이스는 “대통령은 이미 침공하기로 결정을 했다”고 답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는 논의를 했고, 아들 부시 대통령으로부터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라크 침공에 회의적이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대통령이 이미 결정을 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라크를 상대로 한 두 개의 전쟁은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전쟁은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침략행위를 되돌려서 현상회복을 하기 위한 전통적 전쟁으로, 자위전쟁에 관한 보편적 원칙에 부합하며 유엔 안보이사회 결의를 거치는 등 국제적 합의를 모은 다국적 노력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 전쟁은 이라크 정권을 추방하기 위한 예방적 전쟁으로, 국제사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미국의 일방적 전쟁이었다. 첫 번째 전쟁은 시작할 때는 국내에서 지지가 약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광범한 지지를 받았고, 전쟁 비용이 1,000 억 달러 소요됐지만 동맹국의 재정분담으로 미국의 재정부담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두 번째 전쟁은 시작할 때는 국내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에서 반대하는 여론이 갈수록 커졌고, 미국은 전쟁비용으로 1조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첫 번째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 숫자는 수 백 명에 불과했으나, 두 번째 전쟁에서 미군 4,000 명 이상이 전사했다.

필요적 전쟁

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 시작됐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자 합참의장 콜린 파월이 주도권을 잡았고, 민간 정책담당자들은 정책적 이슈가 제기되지 않는 한 2선에 머물러 있었다. 이라크가 이스라엘에 스쿠드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에 자제를 요청했다. 조지 H. W. 부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백악관에서 폭격지점을 결정했던 존슨 대통령의 우(愚)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콜린 파월은 “압도적 군사력을 동원해서 제한된 목표를 단기간에 달성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파월 독트린)을 그대로 실천했다.

2월 말에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 들자 사담 후세인 정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바그다드까지 가지 말고 공격을 끝내자고 주장했고, 딕 체니 국방장관은 후세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란이 지역패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라크가 건재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와 미군 전사상자를 줄여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해서 부시 대통령은 승리를 선언하고 미군의 작전을 정지시켰다.

전쟁의 양상이 후퇴하는 이라크 군을 미군이 첨단무기로 살육하는 형상이 되고 만데 대해 부시 행정부는 부담을 느꼈다. 또한 이라크에서 쿠르드 지역이 분리해 나오면 미국의 우방국인 터키에 불안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군이 작전을 중단하자, 후세인에 충성하는 공화국 수비대가 시아파 지역을 유린했고, 후세인은 독가스 공격으로 쿠르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한 부시 행정부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걸프 전쟁은 많은 숙제를 남기고 미완으로 끝을 맺었다.
 
클린턴 행정부

1992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자 저자는 워싱턴에 있는 몇몇 싱크탱크에서 대외정책 연구를 했다. 클린턴 행정부 기간 동안 이라크는 골치거리였다. 유엔 제재에 따라 이라크는 주권을 제약 받았으나 후세인 정부는 유엔 사찰단과 끊임없이 숨바꼭질을 하면서 클린턴 행정부를 괴롭혔다. 그러자 1991년 걸프 전쟁 때 후세인을 제거할 수 있었는데 왜 그대로 두었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1995년 4월, 유엔은 이라크가 식량 수입을 위한 석유수출(‘oil for food’)을 승인했다. 그 해 8월에는 후세인의 사위가 요르단으로 망명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정부는 유엔 사찰단과 협력을 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즈음 남아 있던 생물학 무기를 폐기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사담 후세인은 유엔 사찰단에 대해선 무엇인가를 숨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후세인에 분노한 미국 의회는 1998년에 이라크 해방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사담 후세인을 교체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이 법을 실천에 옮길 생각이 없었다. 중부군 사령관 토니 지니 대장은 “후세인에 대한 반대세력이 약해서 레짐 교체(regime change)가 현실성이 없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한 봉쇄 정책을 유지했다. 유엔 사찰단의 현지 조사가 후세인에 의해 방해를 당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1998년 12월 16일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명령했다. ‘사막의 여우’(Desert Fox) 작전은 사흘 동안 지속됐는데. 미군은 크루즈 미사일과 폭격으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의심되는 시설을 파괴했다. 이 후 후세인은 유엔 사찰단과 협력을 중단했다. 

부시 행정부

2001년 1월, 퇴임하는 빌 클린턴은 조지 W. 부시에게 미국이 당면한 안보 문제를 우선순위에 따라 간단하게 설명했다. 클린턴은 시급한 안보현안을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중동 문제, 인도와 파키스탄, 파키스탄과 탈레반 및 알 카에다의 관계, 북한, 그리고 이라크 순서로 열거했다. 빈 라덴이 가장 긴급한 위험이고 이라크는 우선순위에서 가장 끝이었다.

조지 W. 부시는 스캔들에 식상한 미국민들의 정서를 파고 들어서 선거에서 간신히 승리했다. 그럼에도 부시는 마치 자신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은 것처럼 행동했고, 주변인물들은 권력을 행사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저자는 조지 W. 부시가 후보 시절일 때 대외정책 자문 팀에 합류했는데, 콘돌리사 라이스가 팀을 이끌었고 폴 울포비츠 등 네오콘 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콜린 파월이 국무장관이 되자 저자는 국무부 정책실장이 되었으나 그 자리는 그다지 역동적이지 않은 직위였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대중적이고 온건하고 또한 독립적인 인물이어서 백악관 참모들은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그리고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대통령을 싸고돌면서 파월을 소외시켰다. 그리고 9-11 테러가 발생했다.

9-11 테러가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흔히 CIA와 FBI 사이의 협조가 부족했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부시 정부의 안보정책 담당자들이 테러를 심각한 위험요소로 생각하지 않은 데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9월 14일에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은 테러 집단이 독단적으로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9-11 직후 열린 고위급 안보회의에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기 주장대로 몰고 갔고, 파월 국무장관은 대체로 침묵했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 접근에 대해서 불신하는 의견이 팽배했다. 탈레반이 패퇴한 후에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주목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선 다시 군벌들이 부활했고, 아편 재배가 늘어났으며 탈레반이 부활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진정한 위협이라면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데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라크를 통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콜린 파월과 이 책의 저자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소외됐고 백악관 안보 팀은 이제 이라크를 어떻게 공격하는가를 다루게 됐다. 이라크 침공은 기정사실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제동을 건 사람은 조지 H. W. 부시 백악관에서 안보보좌관으로 걸프 전쟁을 기획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였다. 2002년 8월에 그는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을 위험에 빠뜨리는 - - 불필요한 전쟁이며 나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하기에 앞서 조지 H. W. 부시와 의논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부시가 아들 부시에게 불편한 심기를 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돌았다. 그러나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미 전쟁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알 카에다와 이라크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선 분명한 증거가 없었지만, 당시 이들은  후세인이 생물무기와 화학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 후에 처음으로 재량적 판단에 의한 전쟁을 시작하게 됐다.

선택적 전쟁

2003년 3월 19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됐다. 표면적 이유와 달리 이라크가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있거나, 또는 이라크가 생화학 무기를 갖고 있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럼스펠드는 2001년 12월에 이미 합참에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울포비츠는 이라크가 미국에게 전략적 기회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 3주일이 지난 후 저자는 파월 장관과 함께 부시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부시는 전쟁 진행에 만족해 했고 전쟁이 가져 올 수 있는 많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고 말한다.

미군은 어렵지 않게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하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후세인도 기여를 했다. 후세인은 생화학무기를 폐기했음에도 국내 통치를 위해 마치 생화학 무기를 갖고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어서 전쟁을 자초했다. 미군은 이라크의 해방을 위해 들어갔고 점령군이 아니었다. 이라크 정부가 무너지자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됐고 미군은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군정장관으로 부임한 폴 브레머는 이라크 군대를 해산했는데, 그 결정이 워싱턴에서 이루어 졌는지, 이라크 현지에서 이루어 졌는지도 불분명하다.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백악관과 국방부는 서로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이라크 사태가 혼돈에 빠지자 국내여론도 나빠졌고, 부시 정부는 이라크 전장은물론이고 국내 여론에서도 밀리게 됐다. 2007년에 미군 3만 명을 증파하자 비로소 이라크 상황은 진정됐다. 2008년까지 이라크에서 미군 4,000명 이상이 전사했고, 20,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미국은 약 1조 달러를 전쟁비용으로 지출했는데, 전사상자에 대한 복지와 의료 비용을 합한다면 그 액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란을 견제했던 이라크가 사라졌을 뿐더러 이라크 내부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이 증가해서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선택적 전쟁(war of choice)이었을 뿐 더러 미국 최초로 시작한 예방적 전쟁(preventive war)이었으나,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좁혀 버린 전쟁이었다.

두 개 전쟁의 교훈

부시 부자(父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이라크와 전쟁을 했다. 아버지 부시가 했던 전쟁을 필요적 전쟁이었을 뿐더러 대체로 성공한 전쟁이었다. 만일에 당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묵인했더라면 냉전 종식 후 세계 질서 재편과정에서 매우 나쁜 선례가 됐을 것이다. 아들 부시가 행한 두 번째 전쟁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분명히 다른 정책 대안을 갖고 있었음에도 전쟁을 선택했다. 두 번째 전쟁이 과연 전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 또 전쟁이 정당화되는지는 모두 불분명했다.

아들 부시는 전임자로부터 건강한 경제와 흑자 재정, 그리고 안정적인 군을 넘겨 받았다. 8년 후 부시는 후임자에게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채, 기진맥진한 군, 그리고 반미감정으로 팽배한 세계를 넘겨 주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대외적 영향력은 전보다 줄어 들었다. 부시가 안보에 관한 결정을 너무 쉽게 하는 덕분에 미국은 큰 대가를 치렀다. 이라크 전쟁 중 가장 성공적인 결정이었던 2007년 병력증강(surge)은 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정책결정의 산물이었다. 미국 역사상 또 다른 아들 대통령이었던 존 퀸스 애담스는 “미국은 모든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가 외국으로 괴물(monster)을 찾아가서 파괴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사담 후세인은 분명히 괴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추방하기 위한 전쟁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이야기해서, 선택적 전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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