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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픈 카인저, 초승달과 별 (2008년)
작성일 : 2014-02-26 09:32조회 : 4,276


스티픈 카인저, 초승달과 별 (2008 증보판, 파라, 스트라우스 앤드 지루, 265쪽, 16달러)

Stephen Kinzer, Crescent & Star (Rev. ed 2008, Farar, Straus and Giroux, 265 pages, $16.00)

뉴욕 타임스 기자로 중동을 다루어 온 스티픈 카인저는 1996년~2000년 간 이스탄불 주재원을 지냈다. 카인저는 그 때의 경험을 중심으로 2001년에 이 책의 초판을 펴냈다. 카인저가 이스탄불에 머물 때 터키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2002년에는 타입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KK)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2008년에 나온 증보판은 에르도안 정부가 들어선 후 터키에 불어 닥친 변화의 물결을 잘 다루고 있다. 

현대 터키에 있어 제1차 대전은 분기점이었다. 전쟁에 패배한 오토만 제국은 막을 내렸고,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유럽의 사조(思潮)에 영향을 받은 케말은 터키를 근대화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시작은 세속주의(secularism)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터키에 케말주의(Kemalism)이 생겨났다.

케말 아타투크

1880년(또는 1881년)에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태어난 케말은 군대에 입대해서 빨리 승진을 했고, 트리폴리, 카이로, 다마스커스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여행했다. 프랑스어를 배운 그는 루소와 볼테르를 읽는 등 서유럽 사상에 심취했다. 터키에 돌아온 그는 군대 내에 비밀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멤버들은 나중에 ‘젊은 터키인’(Young Turks)이라고 불렸다. 케말은 1915년 다다넬스 해협을 바라보는 갈리폴리에서 처칠이 이끄는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터키는 영토를 빼앗기는 등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 들여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터키의 자존심을 세워준 케말은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등장했다. 1922년엔 케말이 지휘하는 터키 군은 에게해(海) 해안에 주둔 중이던 그리스 군을 몰아내고 다나넬스 해협을 다시 확보했다. 1992년에 체결된 로잔느 조약은 터키에게 원래 영토 대부분과 보스포로스 해협 서쪽 땅을 인정했다. 

1923년 터키 의회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케말을 선출했다. 케말은 터키가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번창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케말은 터키가 유럽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부다처제 같은 이슬람 문화를 철폐했다. 그는 모든 터키인들이 성(姓)을 갖도록 했고 자신은 ‘터키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갖는 ‘아타튀크’(Atarturk)란 성을 가졌다. 1938년 이른 나이에 케말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었다. 케말을 따르는 이들을 흔히 ‘케말 엘리트’(the Kemalist elite)라고 부른다.

케말 엘리트

케말 엘리트들은 국민이 아닌 국가가 사회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중앙집권적 정부를 약화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를 경계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야 자유로운 선거가 허용된 것도 이 때문이다. 케말 엘리트들은 선거과정과 정치 상황을 예리하게 지켜 보았고, 1960년, 1970년, 1980년 그리고 1997년 네 차례에 걸쳐 선거로 구성된 정부를 축출했다. 1980년 쿠데타 후에 군부는 3년간 직접적으로 통치를 했고, 국가안보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놓고서야 민간에게 정부를 이양했다. 국가안보회의는 대통령, 총리, 국방, 외무, 내무장관과 합참의장, 3군 총장, 그리고 헌병대장이 참여하는 상실기구로 사실상 정부 위에 군림했다.

1983년에 총리가 된 투르것 오잘은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국가보조금을 삭감해서 군부 엘리트 계층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등 개혁을 했다. 그는 군부에 대해 민간정부가 우위에 있음을 보여 주었고, 쿠르드 등 소수민족이 터키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오잘은 1993년에 65세 나이로 심장마비로 별안간 사망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암살 당했다고 생각했다. 오잘이 사망한 후 터키의 정치는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에르도안 

1990년대 터키는 암울한 시대였다. 군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쿠르드 족을 상대로 잔혹한 전쟁을 벌였다. 군부는 정부 비판자들을 무리하게 탄압했다. 이스탄불 시장이던 타입 에르도안도 군부의 표적이 되어 기소됐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를 태운 호송차가 불가리아 국경지역에 있는 교도소로 향하자 이스탄불부터 170마일 거리를 2000대의 시위차량이 호위하면서 군부에 항의를 했다. 4개월 복역한 후 에르도안은 석방돼서 이스탄불로 돌아 왔는데,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에르도안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이슬람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정치결사체를 조직했고, 2002년 총선을 앞두고는 정의개발당(AKK)을 만들었다. AKK는 자신들은 국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함이 목적이라고 선언했고,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도안이 총리에 취임함에 따라 터키는 민주화의 길을 가게 됐으니 케말 혁명 후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

케말은 터키를 세속적 국가로 만들었지만 터키 내륙지방에선 모스크가 신도들로 가득 차고 여자들은 헤드 스카프를 하며 이맘은 여전히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다. 케말이 사망한 후에 이슬람의 영향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1950년에 총리가 된 아드난 멘데레스는 이슬람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는데, 1960년에 군부가 정부를 장악하고 멘데레스는 다른 각료 두 명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1970년 네크메틴 에르바칸은 1970년에 국가질서당을 만들어서 이슬람 정치운동을 이끌었고, 복지당을 이끈 그는 곳곳에 시장을 배출해서 에르도안이 이스탄불 시장이 되는 길을 열었다.

1995년 선거에서 복지당은 1당이 됐고, 이에 놀란 케말주의자들은 연립정권을 수립했지만 곧 붕괴했다. 에르바칸은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섰고, 이로 인해 이슬람이 전면에 등장하자 여성주의자들이 반발하는 등 세속주의와 이슬람은 심각한 대립양상을 빚었다. 에르도안은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나, 그가 총리가 된 후에 헤드 스카프를 두르는 여성이 많아지는 등 터키 사회는 이슬람을 두고 혼란에 빠져 있다.

아르메니아 

터키에선 ‘아르메니아’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사항이다. 1915년까지 터키 동쪽 끝 접경지역에선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 해 봄, 아르메니아 인들은 국경 넘어 정교회 동족들과 함께 러시아-아르메니아 자치구를 만들고자 했다. 오토만 제국은 이를 반란으로 보고, 이런 움직임을 보인 아르메니아 주민들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자 오토만 군대와 쿠르드 무장세력은 아르메니아 마을을 유린하고 수십 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오토만 당국은 쿠르드족에게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증언도 있다. 참혹한 대량학살은 그 지역에 있었던 한 미국 외교관에 의해 기록됐으나, 터키 정부는 이 사건을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렸다. 학살을 기록한 박물관은 인접한 아르메니아 공화국 수도 예레반에 있다.

1970년대 들어서 자신들을 ‘아르메니아 대학살 특공대’라고 부르는 테러집단이 유럽과 미국에 있는 터키 외교관을 살해하고, 파리 오를리 공항에 있던 터키항공사 항공기를 폭파한 일이 일어났다. 1970년대는 이처럼 사회적 불안이 높았고, 그런 탓에 1980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안도하는 분위기 마저 있었다. 오늘날 터키에는 아르메니아 주민이 수만 명 있지만 대학살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의 후손은 대부분 프랑스와 미국에 살고 있다. 오늘날 터키에는 아르메니아 교회와 아르메니아 학교와 신문이 있고, 대학살은 터키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쿠르드 문제

수천 년 동안 쿠르드족(族)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아 왔다. 오늘날 3,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쿠르드족의 절반은 터키에 살고 있고, 25%는 이라크에, 15%는 이란에, 5%는 시리아에 살고 있고 나머지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 쿠르드족이 단순히 부족이 아니라 민족으로 인식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터키 정부는 공식적으로 쿠르드를 차별하지는 않으며, 쿠르드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 쿠르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여 살고 있는 터키 동남부 가난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이러던 중 1978년에 압둘라 오칼란이란 마르크스주의자가 PKK(쿠르드 노동자당)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1980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오칼란은 본거지를 시리아로 옮겼고, 아사드 정권은 적대관계에 있는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오칼란을 이용했다. 1984년 8월, PKK는 터키 동부에 있던 터키군 거점 두 곳을 로켓과 기관총을 동원해서 공격했다. 큰 피해를 본 터키 정부는 경악했다.

터키 정부는 동남쪽 쿠르드 지역에 군대를 파견해서 가혹하게 대응했고, PKK는 정부군에 대해 게릴라 전으로 맞섰다. PKK와 싸우다가 전사한 군인들의 장례식을 자주 보게 된 터키 사람들은 쿠르드가 아주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오늘날에도 쿠르드 지역인 디야바키르와 리세는 접근을 군이 통제하고 있다. 오칼란은 쿠르드 지역을 독립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를 원했고, 터키 군은 마을을 불사르는 등 PKK에 동조하는 지역을 가혹하게 대했다. 터키는 시리아에 대해 오칼란을 비호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오칼란은 모스코바 근처로 피신했는데 러시아 정부는 그를 로마로 돌려 보냈다. 오칼란은 로마에서 피신해서 케냐에 숨어 들었으나 1999년 2월 드디어 신병이 확보되어 터키로 압송되었다.

오칼란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유럽 지도자들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터키 총리 에체빗은 감형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수천 명에 달하는 PKK 무장전사들이 무기를 내려놓았고, 쿠르드와 전쟁을 끝이 났다. 2005년, 에르도안 총리는 쿠르드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디야바키르에 가서 “모든 문제를 민주주의로 풀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발언은 과거에 터키 지도자들에선 찾아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군부

케말의 영향으로 군부는 터키 사회의 중추적 엘리트를 구성한다. 14세에 입학하는 터키 사관학교는 자존심과 애국심에 충만한 장교를 길러내는 산실이다. 청소년 시기에 같이 생활하고 공부하고 훈련을 한 장교들은 결혼도 동료들의 누이동생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자기들만의 세상을 사는 이들은 일반 사회와 정서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터키는 아직도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의무적으로 1~2년씩 사병으로 복무해야 한다. 터키군 장교단은 50만 명이 넘는 군을 지휘한다. 50만 명이 넘는 터키군은 나토 회원군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다. 터키가 고립된 사회였을 때 군은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터키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했는데, 외국군대와 함께 낯선 외국에서 전쟁을 한 그 경험은 터키 사회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터키에서 아직도 ‘코렐리’(터키어로 ‘코리안’)라고 불리면서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젊은이들은 군 복무 기간을 시간낭비로 생각한다. 징병제도 시대착오적 제도이고 국가발전을 저해한다고 보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대외 관계

오토만 제국의 무분별한 해외진출이 재앙을 불러왔음을 잘 알았던 케말은 터키가 다른 나라와의 관계 보다는 국내문제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말은 소련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와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2차 대전 후에는 소련의 팽창을 우려해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고 나토에 가입했다. 투르것 오잘은 터키가 이슬람권 국가들과도 우호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터키는 80년 동안 독자적 외교관계를 갖지 못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펜타곤의 전쟁 기획자들은 터키가 미국에 당연히 협력할 것으로 생각하고 터키를 통해서 이라크 북부로 미군을 들여 보내려 했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에르도안 총리는 이런 미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많은 터키인들은 미군이 자국 영토를 통해 이라크를 침공한다는 발상을 알고서 경악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미군이 국경을 넘어서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으로 침공하면 터키 내의 쿠르드족이 동요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우려했다. 터키는 1991년 걸프 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가 이라크와의 교역이 끊어져서 경제적 타격을 당한 경험도 있다.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터키 내의 미국에 대한 여론은 나빠졌다.

터키와 유럽연합과의 관계도 기복이 많았다. 그리스가 유럽연합에 가입신청을 하자 유럽연합은 터키에게도 가입을 권고했다. 하지만 당시 좌파 정부를 이끌던 에체빗 총리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터키의 엘리트 계층도 유럽연합 가입과 함께 수용해야 할  경쟁법 등 국제기준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좋아하지 않았다. 1995년에 유럽연합과 터키는 다시 가입문제를 논의했고, 2004년에 가입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연합 자체가 정체성 논쟁에 휩싸이면서 터키의 가입은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유럽연합이 사이프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드리면서 터키에 대해선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터키 국민들은 유럽연합을 불신의 눈으로 보게 됐다. 오늘날 터키는 이스라엘과도 외교관계를 갖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공감을 하고, 러시아, 중국과도 관계를 개선하는 등 미국 일변도 외교정책에서 탈피해 나가고 있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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