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
2015-06-28 22:16 2,671 이상돈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 노튼, 493쪽, 27.95 달러)

John Diggins, Ronald Reagan : Fate, Freedom, and the Making of History
(2007, Norton, 493 pages, $27.95)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뉴욕시립대학에서 지성사(知性史)를 가르치면서 미국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10여권의 책을 쓴 존 디긴스 교수는 2007년에 펴낸 책에서 레이건이 단순히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보수’라고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 3~4명 중 한 명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긴스 교수는 또한 레이건의 정신세계는 오히려 진보에 가깝다고 평가해서 주목을 샀다. 디긴스 교수는 2009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운명, 자유 그리고 역사 만들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레이건의 생애나 그의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넘어서 레이건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2004년 6월 11일, 레이건은 10년 간 알즈하이머와 투병하던 끝에 서거했다. 저자는 레이건의 영결식이 에이브라햄 링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영결식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링컨과 루스벨트는 각각 5년에 걸친 전쟁을 겪었지만, 레이건은 직접적인 군사대결을 피했고, 냉전을 외교적 수단을 통해 종식시켰다. 그럼에도 퇴임 후에 레이건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미디어와 아카데미가 좌편향 돼 있기 때문이다. 레이건 퇴임 후에 나온 <몽유병으로 역사를 헤매다>(Sleepingwalking Through History), <우리의 오랜 국가적 백일몽> (Our Long National Day Dream), <로널드 레이건, 영화>(Ronald Reagan, the Movie)은 레이건을 경량급으로 격하하는 내용이었다. 공식적 전기인 루 캐넌의 <레이건 대통령>(President Reagan)과 그 후에 나온 리차드 리브스의 <레이건 대통령>(President Reagan)이 비로서 레이건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호평을 얻었다. 이어서 레이건의 서신, 연설문, 및 방송칼럼이 책으로 출판되자 레이건의 평판은 올라갔다.

레이건은 항상 앞을 내다 보았다. 레이건은 “모든 미국인이 영웅(hero)”이라고 했는데, 그 자신의 영웅은 미국 독립혁명을 고취하고 프랑스에 건너가서 대혁명을 촉진한 토머스 페인이었다. 레이건은 1985년 고르바쵸프와의 제네바 회담에 앞서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머스 페인을 인용했다. 레이건은 국가가 자유를 위협한다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수용했다. 링컨과 루스벨트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했지만 레이건은 전쟁을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켰다. 레이건은 미국인들에게 자기 자신과 미국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미국을 다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레이건은 20세기 들어서 3세대에 걸친 과격한 파괴적 흐름으로부터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에선 좌파들이 스탈린 체제를 지지하는 것을 보았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에는 신좌파들이 카스트로와 마오쩌둥을 우상화하는 것을 보았으며, 대통령으로서 대학가가 나카라과의 산디니스트 정권을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레이건은 공산체제를 ‘악(惡)의 제국’이라고 지칭한 적이 있지만 소련과 협상을 통해서 핵 전쟁의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소련 국가 시스템의 개혁을 절실히 원했던 고르바쵸프와 핵 확산을 우려했던 레이건은 결국에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피터 슈와이저 등 보수평론가들은 레이건이 군비경쟁을 함으로써 소련이 몰락하게 됐다고 본다. 레이건이 군비를 확장한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레이건은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군비를 축소해야 함을 알았다. 

대학을 다닐 때 레이건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사회철학자인 프레데릭 바스티아를 읽었다. 바스티아는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를 비난한 학자로 유명하다. 레이건은 또한 윌리엄 워스워스와 랠프 에머슨을 심취해서 읽었다. 레이건은 토머스 페인과 랠프 에머슨을 통해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레이건은 또한 이들의 영향으로 종교와 신은 인간을 제약하는 요소가 아니며, 인간이 행복해 짐으로써 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레이건은 낙관주의자가 되었다. 사실 어떤 대통령도 레이건처럼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대통령 재직 시에 레이건은 교회를 가기 위해 백악관을 나선 적이 거의 없으며 목사가 백악관에 와서 예배의식을 한 적도 없었다. 퇴임 후에 레이건은 이따금 교회에 나갔을 뿐이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은 예수를 종교적 지혜를 갖춘 존재로 존경했다. 제퍼슨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했지만 레이건은 그것을 인정했다. 1980년대에 보수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이 연설을 할 때 마다 ‘신’(God)을 언급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지만 정작 레이건에게 있어 종교는 신앙과 비전이었다. 레이건은 신(神)을 지키면서 동시에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과 전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건은 소련을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악’으로 불렀다. 1982년만 해도 레이건은 핵 무기 감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5년 들어서 레이건은 모든 핵 무기를 감축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고르바쵸프를 만난 후 레이건은 이제 핵 무기를 없앨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이건은 카터의 비관주의를 거부했다. 레이건은 미국이 ‘약속받은 땅’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레이건의 스피치 라이터였던 페기 누넌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했고, “다시 아침이다”(morning again)라고 표현했다. 정부를 적대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는 레이건의 철학은 토머스 제퍼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점에서 레이건은 에머슨적 낙관주의를 만개하게 한 진보적 낭만주의자(liberal romantic)이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아버지 존 레이건은 아일랜드 계통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스포츠와 댄싱을 좋아했으나 주벽(酒癖)이 있었다. 주로 구두 가계 세일즈 맨으로 일한 존은 일자리를 자주 옮긴 탓에 가족들은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많이 했다. 어머니 넬리는 스코틀랜드 계통으로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 넬리는 주말이면 술에 빠지는 남편을 용인하고 살아가는 인내심 많고 자상한 여성이었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 주의 탬피코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린 레이건이 ‘더치’라고 불렀다. 화란 사람이란 의미의 ‘더치’는 강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었는데, 그 후로 ‘더치’는 레이건의 애칭이 되었다.

1920년 레이건 가족은 인구 1만 명 작은 도시 딕슨으로 이사를 갔다. 공공도서관과 상점이 늘어서 있는 메인 스트리트가 있는 딕슨에서 레이건에게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레이건의 어머니는 레이건에게 독서와 연극을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좋으신 존재이고 어려움도 그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레이건에게는 닐(Neil) 레이건이란 형이 있었는데, 형은 레이건과 달리 집중력과 성공 욕구가 없었다. 레이건이 11살 때 어느 추운 겨울 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문 밖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레이건은 모르는 체하고 집으로 먼저 들어가서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집 밖으로 나가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집으로 끌고 들어 왔다. 훗날 자서전에서 레이건은 그 순간이 자기가 처음으로 책임을 졌던 때라고 회고했다.

레이건 가족은 빈곤해서 주말에 정육점에서 가서 고양이 먹이로 그냥 주는 닭의 간을 얻어서 요리를 해 먹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자기 가족이 불행하거나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레이건은 나중에 정부가 자신의 가족을 빈곤 가정으로 판정한 후에 비로서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이런 태도가 나중에 레이건이 사회복지를 보는 관점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공황이 시작되자 레이건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어 버렸다. 뉴딜 정책이 시행되어 그는 비로서 공공 근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1932년 선거부터 레이건 부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계속 지지했다.

레이건은 1920년대 후반기에 딕슨에서 여름에 인명구조원으로 일했다. 그는 강에서 수영하다가 사고가 날 뻔한 사람을 총 77명 구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구해 준 사람들은 자기에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감정을 자신에게 표출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레이건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1929년 가을, 레이건은 딕슨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리카 대학(Eureka College)에 입학했다. 전체 학생수가 250명이던 작은 기독교 대학에 대해 레이건은 아주 좋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 레이건은 작고 알려지지 않은 모교를 방문해서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유리카 대학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레이건은 학과 외에도 연극과 스포츠를 많이 했다. 레이건은 1학년 때 학생을 대표해서 총장의 예산 삭감 시도에 반대하는 연설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결국 학교 예산을 깎으려던 총장은 그만 두고 말았다. 레이건은 미식 축구 선수로서 대학에서 날렸다.

레이건은 대공황이 심각할 시점인 1932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직장을 구하러 시카고로 히치하이크를 해서 갔지만 거기에도 일자리는 없었다. 다시 아이오와 주 데이븐포트 시에 도착한 레이건은 WOC라는 방송국에서 스포츠 해설자로 취직을 했다. 유리카 대학에서 미식 축구를 했던 경험이 그 일자리를 구하는데 결정적이었다. 레이건은 축구와 야구를 해설하는 방송으로 중서부에서 상당히 유명해 졌다. 레이건은 스포츠 현장을 간 적은 적었지만 경기장 분위기를 살려서 경기 결과를 전하는 방송을 해서 많은 팬을 얻었다.

그런 과정에서 레이건이 노틀담 대학의 축구 팀 하프백으로 유명한 조지 깁George Gipp(약칭 기퍼 the Gipper)에 관심을 갖게 됐다. 레이건은 나중에 노틀담 축구팀을 그린 영화 <너트 로크니, 올 아메리칸>Knute Rockne, All American 에서 조지 깁의 역할을 하게 되며, 조지 깁이 사망하는 장면에서 ‘기퍼를 위해 승리를 해 달라’ Win one for the Gipper라는 유명한 대사를 하게 된다.  이 대사는 레이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 지지자들이 내세워서 유명해 졌다. (**레이건은 1988년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 조지 H. W. 부시에게 ‘"George, go out there and win one for the Gipper."라고 했다)

당시에 시카고 컵스(Chicago Cups)는 남부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의 카탈리나 섬으로 봄에 전지훈련을 갔다. 서부를 보고 싶은 레이건은 스포츠 캐스터로 팀과 같이 갔는데,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그는 워너 브러더스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하고 아이오와로 돌아 왔다. 얼마 후 워너 브러더스는 주 200달러로 7년간 계약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레이건은 당장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자신의 내쉬 컨버티블 자동차를 3일 동안 운전해서 할리우드에 도착했다. 

할리우드 시절

레이건이 할리우드에 발을 들어 놓은 것은 1937년이었다. 미국은 아직도 대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할리우드는 번성기를 누렸다. 레이건은 할리우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좋은 날씨를 좋아했다. 레이건은 그 때부터 1960년대까지 75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숫자는 도큐멘터리 영화와 전시 홍보영화도 포함한 것이다. 레이건이 배우로서 명성을 얻은 계기는 <너트 로크니, 올 아메리칸>에서 조지 깁의 역할을 통해서였다 레이건이 출연한 가장 중요한 영화는 <킹스 로우>King’s Row였다. 이 영화에서 레이건은 여자친구의 부친인 가학적인 외과의사에 의해 다리를 절단 당한 젊은이로 나왔는데, 수술대에서 깨어나서 “나머지 내 몸은 어디있지?” Where’s the rest of me ?라고 자연스럽게 말한 대사가 특히 화제가 됐다. 레이건은 이 대사를 1965년에 나온 자서전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레이건은 영화에서 미국을 상징하는 좋은 사람 all-American good guy 역할을 했는데, 악역을 하지 못해서 연기자로서는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었다. 레이건이 했던 악역은 마지막 출연이었던 ‘살인자들’ The Killers였다.

여하튼 레이건은 영화배우로서 성공적이었다. 1941년 한해 동안 레이건은 52,000달러를 벌었는데, 당시 최고 스타이던 클라크 게이블은 그 해에 210,000 달러를 벌었다. 레이건은 출중한 외모와 반듯한 행동으로 남성 보다는 여성, 그리고 대도시 보다는 작은 도시에서 인기가 높았다. 레이건은 부모를 남부 캘리포니아로 오도록 하고 집을 사 주었다. 이렇게 해서 레이건의 부모는 생애 최초로 자기 집을 갖게 됐다. 레이건의 아버지는 레이건에게 온 팬 레터를 분류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대신해서 사인을 해서 팬에게 답신을 했다. 레이건은 할리우드에서 제임스 캐그니, 윌리엄 홀덴, 존 웨인, 헨리 폰다 등을 사귀었고, 할리우드를 취재하는 기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레이건은 영화배우로서 인기 절정이었다. 전쟁은 레이건의 영화 배우로서의 캐리어에 영향을 주었다. 근시로 인해 전투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레이건은 육군 예비역 장교로 임명되었고, 전시 홍보 영화를 제작하는 데서 일했다. 그 때 이미 레이건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을 때였다. 레이건은 육군 대위로 제대했고 할리우드에 복귀했으나 영화배우로서의 인기는 현저하게 떨어진 후였다. 영화가 부진함을 느낀 레이건은 당시 새로 부상하는 TV에 매력을 느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 레이건은 GE 극장(GE Theater)으로 대중에게 유명해 졌다. 레이건은 전국에 있는 GE 사무실과 공장을 찾아 다니면서 매주 일요일 저녁에 사회자로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레이건은 주로 자유기업의 장점을 홍보하는 방송을 했다. TV로 유명해진 레이건은 라이언스, 로터리 같은 단체의 초청을 받아 같은 주제로 강연을 했다. 레이건은 이 프로를 좋아했고 이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테네시 계곡공사(TVA)를 비판하자 GE와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TVA는 GE로부터 터빈을 구매하는 큰 고객이었는데, 레이건이 TVA를 비난하자 GE는 이 프로를 종료시켜 버렸다. 1962년에 GE 프로그램을 그만 두고 난 레이건은 뚜렷하게 할 일이 없었다. GE 극장을 그만 두고 난 레이건은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주관하던 영화산업에서의 노조에 대한 조사위원회에 출두해서 증언을 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1964년부터 1965년까지는 TV 시리즈 데스 밸리 데이스(Death Valley Days)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레이건이 출연한 마지막 영화였다.

결혼

할리우드는 성적으로 방종한 곳이지만 레이건은 그 점에서 보통 배우들과 달랐다. 레이건의 여성과의 관계를 연구한 앤 에드워드에 의하면 레이건과 데이트를 했던 여배우들은 레이건이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레이건은 여배우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정치 이야기를 화제에 길게 올리곤 했다고 한다. 레이건을 알던 여배우들은 레이건이 촬영현장에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데 익숙했다고 회고했다.

1938년 7월, 레이건은 제인 위먼(Jane Wyman)과 <브러더 랫(Brother Rat)>이란 영화에 같이 출연했다. 그리고 18개월 후인 1940년 1월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제인은 레이건 보다 할리우드에 몇 년 앞서 진출해서 아카데미 상에 지명되고 오스카 상을 탄 유명한 여배우였기에 이들의 결혼은 할리우드에서 화제가 됐다. 1941년 1월, 첫 아이 모린이 태어났고, 1945년 3월에는 갓 태어난 마이클을 입양했다. 어려서 양부모한테 입양되어 자란 제인은 공허감을 느끼는 성격이었고 이미 두 차례 결혼하고 이혼한 경력이 있었다. 제인은 무턱대고 쇼핑을 하는 등 문제가 있었고, 다른 남자와 만나더니 결국 레이건을 떠나고 말았다. 이혼 후에 레이건은 매우 상심했다고 전해 진다.

이 때 레이건은 낸시 데이비스라는 젊은 신참 여배우를 알게 됐다. 낸시는 자신과 똑 같은 이름을 갖은 여배우가 공산주의자로 지목받고 있어서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기 위해 영화배우조합(Actors’ Guild) 회장이던 레이건을 만나게 된 것이다. 레이건은 낸시가 작지만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무엇보다 낸시는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 낸시의 생모는 생부와 이혼을 한 후에 중서부 지방에서 유명한 외과의사와 재혼했는데, 새 아버지는 낸시를 잘 돌보았다. 낸시는 스미스 대학에서 드라마를 공부했고, 뉴욕시에서 모델과 광고 일을 했다. 낸시는 1940년대 말에 할리우드에 와서 영화에 출연을 했지만 결혼을 잘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과 낸시는 1952년 3월에 결혼했다.

할리우드와 공산주의

레이건이 할리우드에 왔을 때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났고, 이를 둘러싸고 작가와 문화계 인사들은 분열을 보였다. 스페인 공화파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은 링컨 여단 (Abraham Lincoln Brigade)을 만들어서 프랑코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카딸루나에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자 공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레이건은 한 때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호의적 생각을 했으나 1946년까지는 확실한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1947년 하원 비미활동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가 할리우드에서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관한 청문회를 열자 게리 쿠퍼, 로버트 몽고메리,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은 선서를 하고 증언대에 섰다. 한편 부부 영화배우 로렌 바칼과 험프리 보거드, 그리고 영화감독이며 극작가인 존 허스턴은 헌법 수정 1조를 지키기 위한 할리우드 위원회를 대표해서 워싱턴에 도착해서 이 같은 청문회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청문회에 소환됐으나 헌법 수정 5조 특권을 주장해가면서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절했던 10명은 ‘할리우드 10인’이라고 불리면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심문을 진행한 로버트 스트라이플링의 질문에 대해 레이건은 할리우드에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주장은 과장이며, 영화배우조합의 대표로서 그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답했다. 레이건은 증언대에 서서 진술을 했지만 사상적 검증을 하려는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 하지만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하자 레이건은 더욱 더 확고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갔다. 레이건은 소련의 미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고, 민주당원임에도 불구하고 195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리차드 닉슨에 투표했다. 루스벨트는 이미 사망했고, 루스벨트를 지지했던 부친도 사망함에 따라 레이건은 홀가분하게 처음으로 공화당 후보에 투표한 것이다.

레이건은 공산주의가 미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는 미국 영화계에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헌법에 보장하는 법적 장치를 이용해서 증언을 거부하면서도 러시아 국민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정치적 훈련

레이건이 정치를 배운 것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조합 대표로 협상과 조정을 하면서부터였다. 레이건은 노사간 이견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경험으로 깨달았고, 노사 관계를 계층문제로 이해해서 파업 등으로 강력하게 대응하는 노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레이건이 조직화된 노동운동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도 영화배우조합 대표를 지낸 후라고 이야기 된다. 레이건은 영화산업 기사들이 중심이 된 스튜디오 노조협회가 파업을 할 때도 그런 파업은 영화산업을 마비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의 일부일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레이건은 공산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고 나아가 반공주의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진보주의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고 보수주의자가 되었는데, 그것은 현실 세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였다. 레이건을 보수주의로 이끈 책의 저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휘태커 챔버스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진보주의가 결국 중앙집권을 초래해서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연다고 주장했다. 휘태커 챔버스는 <목격자>Witness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과정을 설명하고 뉴딜과 진보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급진좌파와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비판자로 변신한 챔버스는 레이건과 윌리엄 버클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관주의자였던 챔버스와 낙관주의자였던 레이건과 버클리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챔버스의 영향을 받은 레이건은 진보주의를 공산주의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당시나 스페인 내란에서 보듯이 공산주의는 진보주의를 먼저 척결했다. 레이건은 진보주의자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불신했다. 진보주의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그 후에도 변치 않았다.

영화배우로서 연기를 했던 레이건은 그 경험이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는 평을 나중에 들었다. 극작가 아서 밀러는 2001년에 행한 강연에서 “정치인이 된 배우는 여유있는 진정성 relaxed sincerity을 갖게 되며”, “레이건은 연기를 좋아했고 실제 상황과 연기를 혼동했고”, “자신이 말하고 있는 진실에 관한 본심을 내 보이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실제로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됐을 때 기자가 주지사로서 막중한 일을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레이건은 “나는 주지사 역할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정치 

캘리포니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1930년대엔 모래 폭풍을 피해 중서부 농민들이 대거 캘리포니아로 몰려 왔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새로운 삶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왔는데, 레이건도 그러 했다. 1950년대 레이건이 영화배우와 방송인으로 유명해 졌을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팻 브라운 Pat Brown이라는 민주당 정치인이 있었다. 팻 브라운은 1958년 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됐는데, 전형적인 권모술수형 정치인이었고 세금 많이 거두어서 많이 지출하는 tax and spend 진보정치인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는 주지사와 상하원 다수석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에 패배한 리차드 닉슨은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했으나 팻 브라운에게 패배했다. 부통령을 지내고 대통령 후보였던 리차드 닉슨을 물리친 팻 브라운은 ‘거물 킬러’ giant killer 라는 별명이 붙는 등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케네디 대통령은 팻 브라운에게 전화를 걸어서 축하했다.

1960년대 초, 공화당은 세가지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는 넬슨 록펠러로 대표되는 동북부의 진보적 공화당원이다. 이들은 정부의 권한과 부(富)의 권력은 협력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사회개혁과 복지를 지지했다. 이들은 링컨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 부류다. 둘째는 배리 골드워터로 대표되는 서부와 서남부 공화당원이다. 이들은 개인주의와 자유기업, 주권(州權)과 개인의 사적 자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libertarian) 성향이었다. 셋째는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캘리포니아 내륙에 기반을 둔 보수 기독교 공화당원들이다. 제리 팔월(Jerry Falwell) 같은 개신교 목사들이 이들을 이끌었지만 이들이 정치적 기반으로 성장한 시기는 1970년대 들어서이다.

이런 가운데 캔디 회사 창업자인 로버트 웰치가 창업한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가 세력을 늘려갔다. 이 단체에는 자영업자, 퇴역 장교, 그리고 나이 든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매카시즘에 편승해서 진보세력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 

한편 윌리엄 버클리와 배리 골드워터는 진보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당시 얼 워렌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이 사회과학적 접근으로 연방주의와 주권(州權)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골드워터는 1960년에 펴낸 <보수주의자의 신념>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 이란 책에서 높은 세금과 워싱턴의 관료주의에 대한 항의를 담아 냈다. 1964년 7월, 골드워터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64년 대통령 선거

1964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둔 10월 27일, 레이건은 TV에 나와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선거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정부는 국민 아래에 있으며, 주권적 국민 이외에는 권력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쟁점은 “저 멀리 수도에 있는 소수의 지적 엘리트가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레이건의 이 연설은 정부 관료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으로 현대 미국 정치사에 있어서 전설적 연설로 평가되고 있다. 민주당 후보인 남부 출신인 린든 존슨 부통령은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통해서 흑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존슨은 골드워터를 압도적 차이로 승리했다. 유권자들은 반공주의자인 골드워터가 당선되면 베트남 전쟁에 핵 무기를 사용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1964년 선거 후 미국에선 학생운동이 폭발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대학 캠퍼스는 반전 운동으로 몸살을 알았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부유층은 경악했다. 급진파 학생들이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모임’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SDS)을 조직하자 버클리와 UCLA에서 ‘자유를 지향하는 젊은 미국인들’ Young Americans for Freedom 지부가 결성되었다. 좌파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이야기 했고, 우파는 자유와 개인주의를 이야기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1966년에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당선됐다. 당시 신좌파 운동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1981년에 레이건이 백악관에 입성할 때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신좌파 운동권은 대학 교수로 확실하게 자리잡았고, 그 결과로 대학에서 우파 운동을 했던 젊은이들은 박사학위를 해도 대학교수로 자리 잡지 못하고 워싱턴의 싱크 탱크로 진출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팻 브라운은 고속도로를 정비했을 뿐더러 캘리포니아 워터 프로젝트를 수립해서 북부의 물을 남부로 끌어오는 도수로 공사를 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시스템도 구축했다. 1964년 12월 버클리에서 대규모 반체제 시위가 일어났는데, 진보주의에 동정적인 브라운 지사는 이를 방관하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뒤늦게 주 경찰을 투입해서 진압했다. 1965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근교 와츠에서 흑인 주민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 본 캘리포니아 공화당의 우파들은 레이건을 주지사 후보로 지지하게 됐다.

레이건은 주지사 선거에 나설 때 높은 세율을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주지사로서 레이건은 이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레이건의 예산 자문관이던 캐스퍼 와인버거는 레이건에게 전임 지사 팻 브라운이 2억 달러 재정적자를 남겨 놓았다고 보고했다. 문자 그대로 캘리포니아 주정부 재정은 약탈당하고 고갈된 셈이었다. 레이건은 주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세율을 급격하게 인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레이건은 기업과 은행에 대한 법인세를 두 배 인상하고 소득세는 7% 내지 11% 인상했다. 이런 조치와 당시 인플레이션에 힘입어서 주 재정은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팻 브라운은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 사업을 벌였으나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주민투표로 공정주택법을 폐지하자고 해서 관철시켰다. 그러자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공정주택법 폐지가 평등원칙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 건설업계는 공정주택법을 수정하는 새로운 입법을 추진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공정주택법이 빈곤한 사람들을 돕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수정입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레이건은 주립 정신병원 예산을 대폭 삭감해서 주정부 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 환자들을 사회로 내 보냈다. 정신병원이 오히려 정신병을 고착화시킨다는 이론도 있지만 당장 갈 곳이 없는 이들은 거리를 배회하게 됐다. 그러자 여론이 안 좋아 졌고 레이건은 예산을 다시 회복시켜서 이들을 다시 정신병동에 수용토록 했다.

레이건은 주지사 직무가 생각보다 힘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거의 매일 녹초가 되어서 관저에 돌아왔고 샤워를 한 후에 낸시와 함께 TV를 보면서 간단한 저녁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낸시는 내륙 도시인 새크라멘토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자식 문제와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시위로 고민을 해야만 했다.

레이건의 자녀

레이건에게는 자녀 4명이 있었다. 첫 딸 모린은 첫 부인 제인 위먼과 사이에서 1941년에 태어났다. 4년 후 레이건과 위먼은 마이클을 입양했다. 낸시와의 사이에선 패트리셔 앤(패티)이 1952년에, 그리고 로널드 프레스콧(스키퍼)이 1958년에 태어났다. 이들 4명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성장기에 부모와 따듯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 레이건은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식과 돈독한 시간을 갖지 않았다. 레이건과 낸시는 그들이 자식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숙명처럼 받아 드렸다.

첫 딸 모린은 대학을 중퇴하고 여권 운동과 낙태 자유화 운동에 뛰어 들어서 인정을 받았다. 양아들 마이클은 소년 시절에 사고 뭉치였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정을 찾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라디오 토크 쇼 진행지로 성공했다. 마이클이 결혼을 생각하자 레이건은 편지를 보내서 이렇게 썼다. “너는 불행한 가정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 -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남자가 문의 다른 쪽에 발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을 아는 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단다.” 불행한 가정은 위먼과의 결혼을, 그리고 행복한 결혼은 낸시와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임은 분명했다. 마이클은 200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연설을 했다.

낸시와의 사이에서 난 패티는 외모는 아버지를 닮아서 매우 아름다웠으나 정치적 성향은 정반대였다. 패치는 록 밴드를 했고 아버지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자 그것을 매우 불편해 했다. 누드 사진과 코카인을 했던 패티는 아버지가 알즈하이머를 앓게 되자 비로서 부모와 화해를 했다. 막내인 로널드는 예일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에서 발레 댄스를 했고, 연상의 여인과 결혼을 한 후에 시애틀에 정착해서 TV 토크 쇼 진행을 맡았다. 그는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다.

격동의 캠퍼스

1960년대 미국 캠퍼스는 혼돈의 시대였다. 버클리 등 캘리포니아의 주립대학과뉴욕에 자리잡은 컬럼비아 대학은 그 중심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은 빈곤층과 소수 인종 학생을 많이 다니는 학부중심 대학이었는데, 그 위치 때문에 역사 인문 예술 분야에 우수한 교수들이 많았다. 이 대학은 아프로-아메리칸 역사(흑인 미국사) 과목이 있었는데, 1966년 가을에 과격한 학생운동단체들은 흑인 교수가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항의했다. 역사학과는 이런 주장에 호응해서 학생단체가 박사학위를 가진 흑인 교수를 추천하면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단체는 고등학교를 나온 흑인을 교수로 추천했고, 학과 교수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학생단체들은 “스트라이크!”를 외쳤고 대학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이 문제들 두고 역사학과와 사회과학부는 분리되었고, 경영학과와 공학부는 학생들의 요구에 반대했다.

폭동진압 경찰이 캠퍼스를 도착하자 오클랜드 시에서 블랙팬더 대원들이 학생들을 지원하러 몰려왔다. 이렇게 해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사태는 전국적 주목을 사게 됐다. 이런 와중에 총장이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들은 경찰을 캠퍼스내로 불러드리기를 거부하고 교수들에게 학생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이성적으로 대하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레이건 주지사는 새무엘 하야카와 교수를 새 총장으로 임명됐다. 일본계 미국인인 하야카와는 학생들이 캠퍼스에 설치한 확성기 전선줄을 손수 뽑아 버리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널리 알려져서 하야카와는 유명해졌고, 총장직을 그만 둔 후 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학생 소요가 계속되던 버클리는 클라크 커 총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레이건 지사는 커 총장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회가 커 총장을 해임하자 캠퍼스가 요동을 쳤다. 후임으로 임명된 찰스 히치 총장도 상황을 장악하지 못했다. 레이건은 버클리가 히피와 블랙팬더 그리고 마약의 천국이라고 비난했다. 1967년 2월, 대학생과 교수 7,500명이 새크라멘토 주정부 청사로 시위행진을 했다. 레이건은 주정부 청사 앞에 나가서 시위대를 향해 “주지사로서 나는 주민을 대표하고자 한다. 법을 지키든가 당장 여기서 나가든가 하라”고 일갈했다. 레이건은 기자들에게 “저들이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다수를 대표한다면 대학의 앞날을 신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모습은 TV 뉴스에 나와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버클리 뿐 아니라 산타 바버라, 어바인 등 주립대 캠퍼스는 계속해서 급진파 학생들로 몸살을 앓았다. 버클리 캠퍼스에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 낡은 건물을 허물어 낸 공터가 있었는데, 운동권 학생들이 이 공터를 ‘피플 파크’ People’s Park으로 부르고 일종의 해방구로 선포했다. 레이건은 주 경찰과 특공대를 투입해서 학생들은 진압했다. 17일 동안 버클리는 학생들이 자동차를 방화하고 주 경찰은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해서 진압하는 등 전쟁과 같은 사태가 진행됐다. 이 사태는 신좌파 운동이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됐다.

주지사로서 두 번 째 임기 동안 레이건은 복지 개혁에 전념했다. 뉴딜 시절에 도입된 사회보장제도 중 부양아동이 있는 가정에 대한 부조(Aid to Families with Dependent Children : AFDC)가 특히 문제가 많았다. 레이건은 AFDC를 개혁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AFDC가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고 있으며, 수혜자들이 주류 판매점이나 경마장에서 사용하고 있다는데 대해 문제 의식을 느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1963년에 375,000건이던 AFDC 케이스가 레이건이 주지사로 취임한 1967년에는 769,000 건으로 증가했다. 레이건은 1971년에 캘리포니아 복지개혁법을 통과시켜서 복지 사기를 규제하고 1년간 거주 요건을 부과하는 등 몇 가지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정은 보다 많은 부조를 받도록 했으며, 3년 내에 케이스가 300,000건으로 감소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 임기 중에 취한 복지 개혁은 큰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내셔널 리뷰> 편집인 윌리엄 버클리는 레이건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보수세력은 급진적 학생운동세력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 레이건을 높이 평가했다. 주지사를 끝낸 후에 레이건은 급진세력과 맞부딪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기에 레이건이 상대했던 많은 급진좌파 젊은이들은 레이건이 대통령 임기를 마칠 1989년에는 대학교수와 각종 사회운동가로서 자리를 굳건하게 잡게 됐다.

대통령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 8년을 지낸 후 레이건은 일단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레이건은 자신이 은퇴한 시민이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세계와 국내 정세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특히 낸시 여사는 남편이 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사이곤이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는 모습을 본 레이건은 정부가 승리하기를 두려워하는(afraid to win) 전쟁에 젊은이들을 싸우러 나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존슨과 닉슨은 베트남에서 패배하는 것이 두려워서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끌었던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포드는 뉴욕 주지사이던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에 임명했다. 보수 공화당원들은 진보파인 록펠러를 부통령에 임명한 조치에 격분했다. 공화당 보수파들은 레이건에게 1976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가라도 독촉했고 레이건은 이에 응했다. 레이건은 초기 예비선거에서 패배했고,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을 장악한 포드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포드는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다.

카터는 미국 대통령 중에서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던 첫 번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소련의 위협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 1979년에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 점거되고 직원들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어서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냉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지만 카터 행정부는 무기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제리 팔웰 목사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조지프 쿠어스와 리차드 스카이프는 그들이 움직이는 재단을 통해 헤리티지 재단, 미국기업연구소(AEI), 맨해튼 연구소, 케이토 연구소 등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은 4400만 표를 얻었고 카터는 3600만표, 그리고 독립후보 존 앤더슨은 600만 표를 얻었다. 선거인단 표에서 레이건은 489표를 얻어서 49표를 얻은 카터를 압도했다. 젊은 백인 남성들이 레이건을 많이 지지했고, 결혼한 여성도 레이건에 표를 몰아 주었다. 취임 연설에서 레이건은 “우리는 작은 꿈에 국한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나라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레이건 백악관 참모와 각료

레이건은 대통령직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터는 집무실에 캐주얼한 가디건을 입고 나오곤 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엄중하다고 생각한 레이건은 항상 정장에 타이를 매고 집무실에 나왔고, 거울을 지나칠 때면 넥타이를 바로 잡고는 했다. 레이건은 각료를 잘 임명해야 성공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레이건은 조지 H. W. 부시의 참모였던 제임스 베이커를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레이건과 인연이 없었던 텍사스 출신의 변호사인 베이커는 실용주의자였다. 비서실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레이건의 오랜 참모인 에드윈 미즈 3세는 대통령 보좌관이란 직책으로 백악관 참모진에 가담했다. 대학교수 출신인 미즈는 원리주의자였고 또한 조직적이지 못했다. 레이건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캘리포니아 시절부터 레이건을 보좌했던 마이클 디버인데, 그는 백악관 부실장으로서 대통령의 일정과 기자회견, 그리고 홍보를 책임졌다. 낸시 여사의 신임을 얻은 디버는 레이건의 가족들과도 가까웠다. 1985년에 백아관을 사임한 디버는 로비 활동 때문에 법적 문제에 봉착했고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을 했다. 베이커, 미즈, 그리고 디버는 ‘레이건 백악관 토로이카’로 불렸다.

레이건은 닉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알렉산더 헤이그 예비역 대장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독단적 성격이 강한 그는 항상 자신의 권한을 증대시키고자 해서 충돌을 일으켰는데, 결국 1982년 6월에 경질되고 조지 슐츠가 후임으로 국무장관이 됐다. 조지 슐츠는 인내심 많았고 협력과 조율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캐스퍼 와인버거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낼 때 주정부 예산실장을 지냈고, 닉슨 행정부에서 예산실장과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백악관 예산실장에는 젊은 하원의원 데이비드 스토크먼이 임명됐다. 재정적자에 좌절한 스토크먼이 사임한 후에는 리차드 다먼이 후임으로 임명됐다.

레이건은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낸 윌리엄 케이시를 중앙정보국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68세이던 케이시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통해 동유럽과 남미의 반공세력에게 자금을 제공했고,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해서 소련군에 대항토록 했다. 레이건의 오랜 친구인 윌리엄 클라크는 국무차관과 안보보좌관을 지냈는데, 워싱턴 생활을 싫어한 그는 레이건의 만류를 무릅쓰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재무장관에는 메릴 린치 사장을 지낸 도널드 리건이 임명됐다. 2기 임기 중에 리건은 비서실장이 됐고, 베이커는 재무장관이 됐는데, 독단적인 리건은 각료들과 충돌을 빚었고 낸시 여사와도 사이가 안 좋아서 결국 중도에 사임하고 말았다. 레이건의 각료와 참모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서 제대로 기능할 것인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레이거노믹스

유리카 대학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공부한 레이건은 공급 경제학 Supply-Side Economics를 신봉하게 됐다. 시카고 대학의 아서 레이퍼 교수, 월스트리트 저널의 논설위원 쥬드 워나스키, 그리고 잭 캠프 하원의원이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레이퍼 교수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딕 체니에게 내프킨에 커브를 그려서 세금을 올리면 오히려 세수가 줄어든다고 설명한 일화가 전해 지고 있다. 세금을 낮추어야 사람들이 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는 이론에 입각해서 잭 캠프는 1978년에 세율을 30% 감축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레이건은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높은 세금은 도둑질과 같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레이건은 기업이 시장의 법칙에 반응하며 정부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 정치인들은 공급 경제학을 비웃었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튼 프리드먼을 존경했다. 이들은 공급이 줄어들면 경제가 침체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돈이 먼저 투자로 유입되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레이거노믹스는 네 개의 목표를 추구했는데, 감세, 정부 규모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 그리고 규제완화였다. 이 중 레이건 행정부가 가장 성공한 부분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세금을 낮추고 국방비를 증가시켰으나 정부지출은 그다지 축소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로 레이건 임기 중 정부 부채가 3배로 폭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사회보장이 낭비적이고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사회보장 제도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책임지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1981년 가을이 되자 미국은 다시금 깊은 경기침체에 빠져 들었다. 레이건이 제시한 경제회복 프로그램이 의회의 동의를 얻은 지 얼마 안돼서 경기가 다시 나빠진 것이다. 레이거노믹스는 출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파업을 할 수 없는 공항관제사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레이건은 48시간 내에 복구하지 않은 파업참여자를 전원 해고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 조치는 레이건은 말하는 바를 실행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 주었다.

증가하는 재정적자와 정부 부채를 다룰 책임은 예산실장이던 데이비드 스토크먼이 지고 있었다. 스토크먼은 농업 보조금에서 사회보장에 이르는 많은 정부 지출을 급격하게 감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많은 정부 지출은 정치적으로 없애기가 어려웠고, 스토크먼은 국방예산을 증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12월 아틀랜틱 먼슬리에 ‘데이비드 스토크먼의 교육’이란 장문의 기사가 났다. 기사는 스토크먼이 공급 경제학을 믿지 않으며 레이건이 정부 부채에 무감각하고 대통령의 정책은 트로이의 목마처럼 부유층에게 감세를 허용해서 정부가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스토크먼이 해임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레이건은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서 계속해서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스토크먼은 결국 사임했다.

미국 경제는 1983년에 들어서 회복되기 시작해서 그 해에 1800만 개 직장이 생겨났고 이자율이 20%에서 11%로 떨어졌다. 중동산 석유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1983년에 2%로 안정되었다. 카터 시절의 연간 인플레이션 13%에 비한다면 물가가 안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경기회복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서 미국인들은 레이건이 경제를 살렸다고 믿게 되었다. 경기침체로 인해 198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24석을 잃어버렸지만 1983년부터 경기가 회복기에 들어감에 따라 레이건은 1984년 선거를 낙관할 수 있게 됐다.
(계속)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