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윌리엄 미덴돌프 2세, 영광의 참패 (2006년)
2008-06-14 00:13 1,816 관리자


미국 보수주의의 기폭제가 된 1964년 대통령 선거
- ‘작은 정부’와 減稅, 그리고 反共主義를 주창한 배리 골드워터 –

윌리엄 미덴돌프 2세, 영광의 참패  (2006년, 베이직 북스, 303쪽, 26.95 달러)

J. William Middendorf II, A Glorious Disaster (2006, Basic Books, 303 pages, $26.95)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후보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민주당 후보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언론은 골드워터는 물론이고 공화당이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1964년 대선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기폭제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4년에 골드워터가 보수주의를 들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 父子(부자)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작년(2006년)에 나온 ‘영광의 참패’의 저자 윌리엄 미덴돌프 2세는 골드워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고, 선거기간 중 골드워터 캠프에서 재정을 관장했다. 미덴돌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투자회사를 운영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골드워터 선거운동을 계기로 정치에 간여해서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 네델란드 주재 대사와 해군 장관을 지냈고, 윌리엄 버클리 2세와 함께 미국 보수연합(The American Conservative Union)을 창설했다.

1968년 대선에서 패배한 골드워터

1909년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태어나서 家業(가업)인 백화점을 운영하던  골드워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방위군에 입대해서 조종사로 임관되어 전쟁 기간 중 폭격기와 수송기를 조종했다. 전쟁 후에 피닉스 시의원을 지내다가 1952년에 공화당원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1958년에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주창했고, 노조 개혁을 주장해서 의회 내의 보수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1960년에는 ‘보수주의자의 信條(Conscience of a Conservative)’란 책을 펴냈는데, 대단한 베스트 셀러가 됐다. 1964년 대선에 출마한 골드워터는 일반투표의 38%를 얻는데 그쳐 애리조나 등 6개 주에서만 승리해서, 전체 선거인단표 중 52표를 얻어 486표를 얻은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에게 크게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은 골드워터가 北베트남에 핵 폭탄을 투하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해서 참패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골드워터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 미디어가 왜곡해서 선전한 탓에 그렇게 알려졌던 것이다. 골드워터는 공화당내의 政敵(정적)의 사보타지와 존슨 대통령의 ‘더티 트릭’으로 참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지지자 50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150만 명이 소액헌금을 한 골드워터의 선거운동은 미국 정치에 새 里程標(이정표)를 세웠다.

골드워터를 추대한 젊은 보수주의자들

1961년 여름 타임誌(지)는 골드워터에 대해 다음 대선에 출마할 의향이 없냐고 물었는데, 골드워터는 “나는 계획도, 스태프도, 야심도 없다”고 말했다. 얼마 후 초선 하원의원 존 애쉬브룩과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이던 윌리엄 러셔 등 30대의 젊은 보수주의자들이 모여, 1960년 대선 패배 후 공백상태에 빠진 공화당의 리더십에 대해 논의했다. “당내 보수파인 골드워터를 차기 후보로 내세우자”는 말이 나왔고, 여기에 미텐돌프 등이 가담했다.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는 넬슨 록펠러 뉴욕 지사, 조지 롬니 미시건 지사, 윌리엄 스크랜튼 펜실베이니아 지사가 거론되고 있었다. 록펠러 등은 북동부에 근거를 둔 진보파 공화당원으로, 뉴딜 등 민주당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오고 있었다.
再選(재선)을 준비하던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들은 민주당은 록펠러 지사를 상대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는 말을 흘려서 록펠러의 출마를 부추겼다. 1962년 말 갤럽은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도가 록펠러 41%, 닉슨 21%, 롬니 15%, 골드워터 4%라고 발표했다. 

              애쉬브룩 등은 자신들을 ‘골드워터 추대위원회’로 명명하고, 1963년 4월 워싱턴에 처음 모습을 들어냈다. 워싱턴에선 골드워터를 위한 여성 공화당원의 모임이 열렸다. 이 때 록펠러와 골드워터는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각각 43%와 26%의 지지도를 얻고 있었다. 1963년 5월 이혼 상태에 있던 록펠러가 금방 이혼한 20년 연하의 여인과 결혼을 하자 록펠러의 지지도는 29%로 급락했고, 골드워터는 40%로 올라섰다.
언론은 골드워터가 1964년 대선에서 케네디에 대한 對抗馬(대항마)가 될 것이라고 쓰기 시작했고, 1963년 11월 초 골드워터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1963년 11월22일 케네디가 암살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케네디 암살이 극우 세력에 의한 것이라는 루머가 돌자 골드워터 지지도가 갑자기 떨어졌다. 더구나 골드워터는 메시지 전달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골드워터는 “사회안전망으로 시작한 사회보장제도가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피력했는데, 미디어는 “골드워터가 사회보장제도를 없앨 것”이라고 썼다.
             
                골드워터는 “나토軍(군) 총사령관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언론은 “골드워터는 모든 지휘관이 핵무기 사용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썼다. 골드워터의 연설장에는 청중이 많이 모였지만, 그의 연설은 지루한 편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몇몇 모여서 시작한 골드워터 진영은 돈도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는 16개 州(주)만 예비선거를 했고, 나머지는 코커스가 지지 후보를 결정했다.

                적대적 언론의 왜곡 보도

1964년이 되어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앞두고 골드워터는 “노년층에 대한 의료보장제도는 가정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연방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베트남 공산세력에 대한 전쟁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미디어는 골드워터를 총잡이 카우보이로 묘사했다.
                골드워터는 자기를 지지하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껴안는 제스처를 할 줄 몰랐다. 반면 억만장자인 록펠러는 자기 돈을 펑펑 써가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뉴햄프셔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뉴햄프셔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헨리 롯지 당시 베트남 주재 대사(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러닝 메이트였다)가 1등을 하고, 골드워터가 2등, 록펠러가 3등을 하는 異變(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일리노이, 애리조나, 루이지애나 등에서는 골드워터가 승리했다.
                6월 중순에 자기 돈 6백만 달러를 퍼부은 록펠러는 경선 포기를 선언했고, 록펠러를 밀던 진영은 스크랜튼 펜실베이니아 지사를 지원하고 나섰다. 7월 중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골드워터는 압도적 다수로 후보로 지명되었다. 골드워터는 부통령 후보로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이던 월街(가)의 금융인 빌 밀러를 지명했다.

                동부 언론은 “골드워터가 反共(반공)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그에게선 파시즘의 냄새가 난다”고 써댔다. 미국 각지의 신문은 골드워터를 조롱하는 만화로 뒤덮였다. 부통령 후보인 밀러는 지명도가 낮아서 골드워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골드워터는 존슨 대통령과 TV 토론을 하기를 원했다. 군소 후보가 많기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의 경우와 같이 양당 후보가 TV 토론을 하기 위해선 모든 후보에 대해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연방통신법 규정에 대해 의회가 예외를 인정하는 결의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토론에 약한 존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민주당 의원들은 예외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로널드 레이건의 지원 유세

TV 토론이 무산되자 골드워터는 유세를 통해 자기 정책을 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골드워터는 “집권하면 전면적 減稅(감세) 조치를 취해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적자 투성이인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를 민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존슨 대통령 측은 TV 광고를 통해 골드워터가 대통령이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몰아 붙였다. 골드워터 측은 자발적인 지원유세에 기대를 거는 수 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골드워터 선거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에서100회 이상 지원유세를 해서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닉슨은 36개 주에서 237회의 연설을 했다. 10월 중순에 골드워터는 유타 州 솔트레이크 시티의 모르몬 대성당에서 “미국민의 도덕이 썩어나가고 있으며, 존슨은 神(신)을 말하지 않는다”면서, 민주당의 無神論(무신론) 성향을 공격했다.

                선거를 얼마 앞둔 10월27일 레이건은 골드워터를 위해 감동적인 TV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우리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정부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멀고 먼 首都(수도)에 자리잡은 소수의 知的(지적) 엘리트들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도록 할 것인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고 했다. 이 연설을 계기로 레이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1964년 대선은 매우 추잡한 선거였음이 나중에 확인됐다. 존슨 대통령은 골드워터의 선거본부를 도청하고, 그이 선거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지저분한 트릭을 썼던 것이다. 선거 운동 도중의 여론 조사는 항상 존슨이 골드워터를 거의 두 배로 이기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선거가 끝난 후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자기가 제기한 문제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은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패배했을 뿐 더러 공화당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렸다고 빈정거렸다.

                    1966년 중간선거와 1968년 대통령 선거

레스턴 같은 동부의 언론인들은 미국에서 일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보지 못했다. 골드워터가 깃발을 들기 전까지 공화당의 중심은 필라델피아, 뉴욕 등 동북부였고, 그들은 민주당과 차별성을 갖지 못했다. 골드워터가 깃발을 들어서 작은 정부, 감세, 도덕, 반공주의를 내건 새로운 공화당이 태동한 것이다.
               
                親민주당 성향의 미디어의 예측을 비웃듯이 1966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47석, 상원에서 3석을 추가했고, 8개 州(주)의 지사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때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지사로 당선됐고, 조지 H.W. 부시는 텍사스 휴스턴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미래의 공화당 대통령들이 골드워터 참패를 딛고 태어 난 것이다.

                1966년 선거는 닉슨의 승리이기도 했다. 닉슨은 열심히 지원유세를 해서 1968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68년 공화당 후보 지명전은 닉슨과 록펠러의 角逐戰(각축전)이었다. 닉슨을 위해 운동을 하던 공화당의 보수진영은 만일에 닉슨이 도중에 하차하면 레이건을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록펠러를 대의원표 692 대 287로 꺾었고, 뒤늦게 경선에 뛰어든 레이건은 의미있는 182표를 얻었다.
 
공화당 진보파의 소멸

                대통령 후보가 된 닉슨은 그 순간부터 자기를 지지한 당내 보수파를 배신했다. 미덴돌프 등 골드워터를 지지했던 그룹은 닉슨이 조지 H.W. 부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닉슨은 당내 진보파를 포용한다는 명목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 주지사를 지명했다. (애그뉴는 나중에 탈세 사건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했고, 닉슨은 제럴드 포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하자 포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포드는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해서 또다시 공화당 보수파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1976년 대선에 포드 대통령은 밥 돌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본선에서 패배했다. (1979년 1월 록펠러는 젊은 여인과 정사(情事)를 갖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1980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당내 진보파이던 존 앤더슨 하원의원은 경선 도중 탈당해서 독자 출마했다. 앤더슨의 탈당으로 공화당내 진보파는 소멸돼 버렸다. (골드워터는 1968년에 다시 상원의원에 당선돼서 3선을 다시 한 후 1987년 초에 은퇴했다. 골드워터는 1998년에 사망했다.)
 
                  1968년 대선은 1964년 대선 못지 않은 네거티브 선거였다. 닉슨은 공화당내 보수파를 배신했을 뿐더러,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민을 배신했다. 그러나 골드워터가 못 이룬 꿈은 1980년에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이루어 졌다. 

                  공화당 후배들에게 주는 助言(조언)

                미덴돌프는 공화당의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1) 민주당은 1년 내내 대통령 선거운동하지만, 공화당은 4년에 한번만 한다. 2) 공화당은 미디어와 보다 터놓고 지내야 한다. 3) 초기에 선거자금을 충분히 모아야 한다. 4) 지나치게 이념화 된 후보, 모든 연설문을 자기가 꼭 써야 하는 후보는 곤란하다. 5) 2-3개 정도의 중요한 쟁점에만 집중하라. 6)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자유주의 경제철학 같은 것을 교육하기는 매우 어렵다. 7) 애국심에 호소하면 소수인종 유권자들이 저항감을 갖게 된다. 8) 공화당은 언어 전쟁에서 민주당에 패배했다. 민주당은 ‘뉴딜’(루스벨트). ‘페어딜’(트루만), ‘뉴프런티어’(케네디), ‘위대한 사회’(존슨) 같이 항상 대중을 기만하는 용어를 만들어서 승리했다.
(월간조선 2007년 8월호)
 * 책 표지는 아래를 클릭하세요.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