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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캐나다인, 앤드류 멜런 (2006년)
작성일 : 2008-08-06 12:09조회 : 3,312


데이비드 캐나다인, 멜런 (알프레드 노프, 2006년, 800쪽, 35달러)

David Cannadine, Mellon – An American Life (Alfred A. Knopf, 2006, 800 pages)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나다인이 12년 간에 걸친 집필 끝에 펴낸 이 책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巨人(거인) 앤드류 윌리엄 멜런에 대한 최초의 傳記(전기)이다. 출생과 성장, 부친이 세운 멜런 은행을 기반으로 알코아, 걸프 석유 등 굴지의 기업을 일으킨 이야기, 원만하지 못했던 가족관계, 1920년대 공화당 정권에서의 재무장관으로서의 업적, 대공황과 루스벨트의 등장 등 멜런의 생애는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미국 역사 그 자체이다. 1930년대 이후 진보적 사관(史觀)이 주된 흐름을 이룬 미국 역사학계에선 멜런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멜런의 전기가 死後(사후) 70년이 되서 나오게 된 것도 그런 사정을 말해 준다.

피츠버그에서 은행을 차린 토머스 멜런

1818년 10월 1일, 아일랜드를 떠난 앤드류 멜런과 그의 아내 레베카, 그리고 어린 아들 토머스는 대서양을 건넌 항해 끝에 볼티모어港(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系(계) 아일랜드人(인)으로 개신교인이었다. 멜런 가족은 펜실베이니아 州의 농촌에 정착했고, 부부는 아이 네 명을 더 낳았다. 책 읽기를 좋아한 큰 아들 토머스는 농사 일을 해가면서 공부를 했다. 나중에 피츠버그 대학이 된 웨스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법원에서 수습을 한 후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로 성공한 토머스는 피츠버그 市(시)의 有志(유지) 제이콥 네글리의 딸 사라와 결혼했다. 피츠버그의 네글리街의 새 집으로 이사한 이들은 여덟 남매를 낳았는데, 다섯째가 1855년에 태어난 앤드류이다. 앤드류가 태어 났을 때 큰 형 토머스는 11세, 둘째 형 제임스는 9세였다.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딸은 어려서 죽었고, 바로 위의 사무엘은 9세 때 죽었다. 앤드류 밑으로는 나중에 사업상 동지가 되는 리차드와 막내 조지가 있었다. 조지는 27세에 사망해서 결국 아들 넷이 壯盛(장성)했다.

1859년에 토머스 멜런은 공화당의 지지를 얻어 판사가 되었다. 멜런 판사는 당시 큰 쟁점이었던 노예 문제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임기 10년이 끝나자 그는 “판사는 남의 일을  다루는 가난한 직업”이라면서 연임을 구하지 않았다.

부친의 은행을 경영한 앤드류 멜런

토머스 멜런은 네글리街(가)의 정원이 넓은 큰 집에서 아이들을 근엄하게 키웠다. 판사를 그만 둔 그는 ‘멜런 앤드 선스’(T. Mellon and Sons)라는 은행을 차렸다. 토머스는 자기 아이들이 은행 일을 익혀 家業(가업)을 승계하도록 했다. 날로 번창하는 피츠버그市에서 멜런家의 은행은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과 부동산을 사려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어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피츠버그는 사업가들의 천국이었다. 헨리 하인즈는 식품 가공업을 시작했고, 앤드류 카네기는 제철소를 세웠다. 카네기의 제철소는 피츠버그를 산업의 중심지로 바꾸었고, 멜런의 은행도 더불어 번창했다.
토머스 멜런은 웨스트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나온 아들 앤드류에게 헨리 프릭을 소개했는데, 프릭은 앤드류에게 사업은 물론이고 미술품 수집에 대해 자문을 하게 된다. 1879년 토머스 멜런은 은행을 앤드류에게 맡기고 지방의회에 진출했다.
1884년, 전에 없는 불황이 찾아 들어왔고, 이는 멜런 가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부로 진출했던 앤드류의 막내 동생 조지는 사업 실패로 사망했고, 리차드 동생은 자신의 사업을 접고 앤드류의 은행에 합류했다. 1889년에 앤드류는 유니언 신탁회사를 별도로 창업했다.

알루미늄과 석유 사업에 투자한 앤드류 멜런

전기분해로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피츠버그 리덕션社를 세운 엔지니어들은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은행이 대부해 준 4000 달러를 갚으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1889년, 이들은 앤드류 멜런을 찾아 가서 4000 달러를 대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알루미늄 생산공법과 의욕에 찬 엔지니어들에게 감명을 받은 멜런은 25,000 달러를 선뜻 빌려 주었다.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게 된 이들은 알루미늄을 생산할 수 있었다.
앤드류와 리차드는 이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서 경영에 참여했다. 경영 감각이 뛰어난 앤드류에 힘입어 회사는 1893년부터 이익을 올렸다. 앤드류는 될성부른 기업을 알아보고 지원하고, 또 인내를 갖고 기다릴 줄 알았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기업이 성장하고 직장이 생기며, 문명이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알루미늄 사업에 성공한 앤드류는 석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에선 油田(유전)이 발견돼서 석유 붐이 불었다. 석유 사업을 먼저 시작한 조카 윌리엄과 함께 앤드류는 크레슨트 석유회사를 세웠다.
록펠러의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자기 영역인 석유사업에 뛰어든 멜런을 도산시키기 위해 방해공작을 했으나 멜런 가족은 송유관 회사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1890년대 중반에 불황이 닥쳐오자 이들은 석유사업을 스탠다드 석유에게 넘기고 다른 사업에 투자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앤드류는 피츠버그의 부호로 이름이 났다. 하지만 당시에 미국엔 백만장자가 4000명을 넘었기 때문에 그의 富(부)는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앤드류의 재산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서 였다. 경기가 다시 좋아지자 앤드류는 조선 건설 등 다방면에 투자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결혼과 좌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앤드류는 웃음과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20대부터 사업에만 매달려 살아 온 그는 백만장자가 된 후에도 독신으로 부친의 집에서 살았다. 1900년 앤드류는 19살 소녀 노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는데, 그 때 45세였다. 이들은 다음해 딸 애일사를 낳았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크고 관심사가 다른 부부는 곧 파탄을 맞게 됐고, 앤드류는 큰 상처를 안게 됐다.

1901년 앤드류 카네기는 자신의 철강회사를 J. P. 모건에 4억 8천만 달러에 매각하고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모건은 회사 이름을 유에스 스틸로 개명하고 자본금을 확충해서 이를 세계 제1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사업에 전념하고 있던 멜런家는 자선에 몰두하는 카네기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1902년 노라는 알프레드 커페이라는 건달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서 앤드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중공업 투자로 성공하다

이즈음 앤드류는 두 분야에 투자를 했다. 하나는 열차를 제작하는 스탠다드 열차회사를 설립한 기업자들에게 투자를 한 것이다. 열차 붐을 타고 주문이 쇄도해서 멜런은 대단한 수익을 냈다. 또 하나는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을 하던 제임스 거파이와 존 게일리의 부탁으로 거파이 석유회사에 투자를 한 것이다. 거파이 석유회사의 경영이 부진하자 앤드류는 경영권을 장악하고 대규모 투자를 했다.
1907년, 멜론은 거파이 석유회사의 이름을 걸프 석유회사로 바꾸었다. 알루미늄을 독점생산하던 피츠버그 리덕션社의 이름을 알코아(Alcoa : The Aluminum Company of America)로 바꾸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40개 이상의 회사의 이사직을 맞게 된 앤드류와 동생 리차드는 중공업의 중심지 피츠버그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인이 되었다.

1907년 여름 앤드류와 노라 사이에서 아들 폴이 태어났다. 그 해 가을에 닥쳐온 불황 때문에 앤드류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 관심을 보일 수 없었고, 노라는 이에 분노했다. 1908년 초, 토머스 멜런이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앤드류가 멜런 가문을 이끌어 갈 대표임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했다.

하지만 앤드류의 결혼 생활은 파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앤드류와 노라와 별거에 들어갔고, 커페이와 노라는 파리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신문이 멜러 드라마 같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해서 멜런家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노라가 앤드류에게 이혼을 선언하자 양측은 변호사를 동원해서 위자료와 생활비, 아이들 양육을 둘러싸고 법정 싸움을 벌였다. 1912년 여름, 법원은 아이들이 앤드류에게 연간 8개월, 노라에게 4개월 머물도록 했다.

불황과 反독점소송

1907년 여름 피츠버그는 큰 홍수를 당했다. 1907년 10월 몇몇 은행의 파산을 시작으로 월街의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J. P. 모건, 록펠러, 그리고 카네기가 5천만 달러를 긴급히 투입해서 주식시장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몇 개의 거대한 중공업이 주축을 이룬 피츠버그는 큰 타격을 입었고, 고용이 불안해 지자 反기업 정서가 기승을 부렸다. 앤드류는 기업이 비리와 음모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폭로하는 신문에 경악했다. 공화당원이지만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해 적대적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서도 앤드류는 놀랐다.

1909년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법무부는 셔만 反독점법에 근거해서 록펠러와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경쟁하고 있는 걸프 석유회사를 갖고 있던 앤드류는 록펠러가 패소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하겠지만 대법원은 록펠러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스탠다드 석유의 분할을 명한 하급법원 판결을 지지했다. 앤드류는 스탠다드 석유 판결이 자신을 겨눌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알코아가 알루미늄 생산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5월 법무부는 알코아에 대해 反독점소송을 제기했다. 알코아가 카르텔 해체를 약속하자 법무부는 소송을 취하했다.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이 되자 의회는 공정거래법과 클레이튼法을 제정해서 기업을 더욱 옥죄었다. 1913년 의회는 연방준비은행법을 통과시켜서 연방정부가 은행에 개입하도록 했다. 앤드류는 이 같은 개혁법령이 反기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멜런 은행과 걸프 석유 등 멜런의 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군수산업

1915년, 60세가 된 앤드류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고려했다. 이혼 소송으로 망신을 당한데다가 사회분위기가 개혁적으로 흘러가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먼저 사업을 접은 카네기는 피츠버그를 떠나서 뉴욕에 정착했다. 앤드류의 동업자이며 조언자인 헨리 프릭도 뉴욕으로 이사했다. 앤드류는 20세기에는 새로운 산업이 성장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연구와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13년에 325,000 달러를 투입해서 멜런 연구소(The Mellon Institute)를 설립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철강 등 무기 소재 생산기지인 피츠버그는 호황을 누리게 됐다. 미국 정부가 영국과 프랑스를 돕기 전에 J P 모건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 거액을 융자해 주었고, 멜런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멜런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코퍼스라는 회사는 TNT의 원료인 벤젠과 톨루엔을 미국에서 독점생산하고 있었다. 코퍼스의 두번째 대주주는 하이인리 코퍼스라는 독일인이었는데, 그의 지분이 적산(敵産)으로 공매되자 멜런家가 이를 인수했다.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코퍼스 외에도 알코아, 걸프 석유 등 멜런家의 기업은 전쟁 特需를 누렸다.

전쟁은 앤드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비치기도 했다.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린 연방정부는 기업에 대해 초과 이윤세를 부과하고, 소득이 1백만 달러를 넘는 부자들에 대해 40%나 되는 초과 소득세를 부과했다. 앤드류는 자기 재산이 증가했음에도 세금 때문에 돈 걱정을 하게 됐다. 의회에 禁酒(금주)법안이 제출되자 앤드류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오버홀트 酒造社를 걱정했다. 전쟁이 끝나자 알코아의 이익은 급격히 줄었고, 1921년과 1922년에는 연거푸 적자를 기록했다. 앤드류는 주식을 처분해서 세금을 내야만 했다. 1919년에 피츠버그의 번영을 이끌었던 헨리 하인즈,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헨리 프릭이 모두 사망했다. 앤드류는 자신이 사후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미술에 눈 뜨고 정치를 시작하다

앤드류는 그 시대의 부유층에 비한다면 검소한 생활을 했었다. 그는 이혼이 남긴 상처 때문에 사교계에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앤드류는 노라와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집을 카네기 공대에 기증하고, 방이 40개 있는 우드랜드街의  대저택을 구입했다. 앤드류는 프릭의 권고를 받아 들여 비싼 미술품을 사서 집의 곳곳에 걸었다. 장성한 딸 애일사를 사교계에 등장시키고 아들 폴은 명문 사립고교 초트에 보냈다.

191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善戰(선전)했다. 1919년 초,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공화당내 개혁파는 붕괴했다. 앤드류 멜런은 이런 변화를 반겼다.  1920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사회주의와 노조를 경계하고 親(친)기업 성향을 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공화당은 워렌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캘빈 쿨리지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앤드류는 공화당에 6000달러를 기증하고 공화당 선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재무장관이 되다

그 해 선거에서 공화당은 백악관을 탈환하고 상×하원의 다수석을 차지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하딩은 앤드류 멜런에게 재무장관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멜런같은 財界(재계)의 거물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멜런은 이를 수락했다. 멜런은 사업 경영을 동생 리차드에게 맡기고 60여 개 기업의 이사직을 사임했다. 1921년 3월 5일 66세의 나이로 멜런은 미국 재무장관이 되어 워싱턴에서 새로운 인생 旅程(여정)을 시작했다.

재무장관으로서 멜런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하딩 대통령의 이너  서클 멤버가 아니었다. 멜런이 가깝게 느낀 사람은 쿨리지 부통령과 휴즈 국무장관 정도였다. 1921년 말 그와 가까웠던 녹스 상원의원과 펜로스 상원의원이 사망했다. 의회 내의 지지자를 상실한 것이다.
재무장관이라고 하지만 멜런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분야는 많지 않았다. 공화당내 진보파 로버트 라폴렛 상원의원과 민주당의 진보파 의원들은 멜런을 매우 싫어 했다. 예산국이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됐고, 하딩의 측근이 국장으로 임명됐다. 연방준비위원회에도 하딩의 측근이 임명됐다. 멜런은 소외된 것이다. 멜런은 관세를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공화당 의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각료 중에도 멜런과 철학을 달리 하는 사람이 많았다. 멜런은 광산 엔지니어 출신으로 상무장관이 된 허버트 후버를 좋아 하지 않았고, 농민을 보호하는 데만 관심이 있던 헨리 C. 월러스 농무장관(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농무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헨리 A. 월러스의 아버지)도 좋아 하지 않았다.

멜런 장관은 대중연설을 할 줄 몰랐고, 신문기자를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현안을 물어 오면 그는 “잘 모른다” “누구도 그 문제에 답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멜런은 자신이 소유한 사업체의 운영은 동생과 조카에게 맡겼는데, 政敵(정적)들은 멜런이 재무장관의 자리를 이용해서 자기 기업을 유리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워싱턴 정계 분위기에 어두운 멜런을 지켜 준 사람은 젊은 차관보 파커 길버트였다.

워싱턴의 호화판 아파트
 
워싱턴에 온 후 몇 달 동안 멜런은 윌러드 호텔(백악관 부근에 위치한 이 호텔은 오랫동안 정치인들의 모임 장소로 쓰였다.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백악관 수리 중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호텔 로비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활동이 이루어져 ‘로비’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口傳이 있다.)에서 머물렀다.

멜런은 새로 건축된 듀퐁 서클 부근의 매코맥 빌딩의 최상층 아파트에 연 25,000달러 임대료를 내고 입주했다. 매코맥 빌딩은 한 개 층에 아파트를 하나만 설계한 당시에는 가장 비싼 임대 주택이었는데, 멜런이 입주한 최상층은 그 중에도 제일 비쌌다. 멜런이 지출한 연간 임대료 25,000달러는 재무장관 연봉의 두 배였다.

멜런은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벽을 장식할 그림이 필요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화상(畵商)들이 멜런에게 접근했다. 당시는 유럽 경제가 피폐해서 미술품 국제가격은 바닥을 쳤다.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갖춘 멜런은 조지프 더빈 등 화상을 통해 유럽에서 매물로 나온 유명한 미술품을 구매했다. 이즈음 멜런의 이혼한 부인 노라는 다른 영국인과 재혼해서 뉴욕의 허드슨 밸리 농장에 정착했다. 그러면서도 노라는 멜런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했고, 멜런은 적잖은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1923년에 들어서자 미국 경제는 활기가 돌았다. 멜런은 “고용이 전에 없이 증가했고, 제조업 생산은 사상 최고에 달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번영이 경험 많은 재무장관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하원의원은 멜런이 “알렉산더 해밀튼(초대 재무장관) 이후 가장 훌륭한 재무장관”이라고 치켜 세웠다. 럿거스, 프린스턴 등 명문대학들이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줄을 섰다. 

쿨리지 대통령과 콤비를 이루다

1923년 8월 하딩 대통령은 전국 순회 방문 중 과로로 사망했고, 부통령이던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뉴잉글랜드 출신인 쿨리지는 비즈니스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철학을 갖고 있어서 멜런과 잘 어울렸다. 하딩 대통령의 고질적인 부패를 경험한 두 사람은 정부가 청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멜런은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계획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쿨리지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어 멜런은 조세 개혁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멜런은 부유층에 부과하는 초과 세율을 50%에서 25%로 낮추고, 근로소득세를 25% 감면하며, 저소득층에 부담이 되던 잡다한 세금을 철폐하고자 했다. 조세심판소를 재무부로부터 독립시켜서 신속하게 이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회에선 멜런의 계획에 대한 반대가 많아서 멜런의 구상은 절반도 이루어 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의회는 1000만 달러가 넘는 유산상속의 경우에는 세율을 40%로 인상하고, 상속세 포탈을 막기 위해 증여세를 신설했다. 멜런의 원래의 구상 중 조세심판소 설치만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1924년 세법은 멜런의 패배였지만, 그 해 선거에서 쿨리지는 여유있게 승리했다. 멜런의 정적인 라폴렛은 공화당을 탈당해서 진보당 후보로 나섰지만 고향인 위스콘신에서만 승리했다.

減稅 운동에 불을 붙이다

1925년이 되자 좌절된 멜런의 減稅(감세) 구상이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멜런의 감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모임’이 조직돼서 감세 운동이 불처럼 일어났다. 미국 납세자 협회는 멜런의 감세안을 지지하는 로비를 벌였다. 1926년 라폴렛 상원의원이 사망하자 의회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1924년 세법의 많은 조항이 수정되고 증여세는 폐지됐고, 상속세는 세율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멜런은 정부를 기업처럼 운영하겠다고 밝혔고, 그 일환으로 연방 정부의 지출을 줄여 정부 부채를 감축했다. 멜런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다른 문제는 유럽 국가의 부채감축이었다. 멜런은 유럽국가와 협의해서 부채 문제를 타결하고 미국 기업에 대해 유럽에 투자를 늘릴 것을 적극 권유했다.

번영의 1920년대

1926년 들어서 미국 경제는 번영일로를 갔고 기업인들은 이를 멜런의 공헌으로 돌렸다. 민주당 의원들은 멜런이 부유층을 이롭게 한다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멜런의 감세는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했으며, 멜런은 간접세 보다는 완만한 누진구조를 갖은 직접세가 좋은 세금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1927년 들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연방소득세를 내지 않게 됐다. 

1926년, 멜런의 딸 애일사는 상원의원의 아들인 데이비드 브루스와 결혼했다. 이들의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은 워싱턴 사교계에서의 대사건이었다. 아들 폴은 초트 고교를 마치고 예일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재혼 했던 노라는 다시 이혼하고 멜런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 경제가 호황을 구가함에 따라 멜런家의 기업도 많이 성장했고 멜런의 개인 재산도 증가했다. 1927년에 멜런은 록펠러와 헨리 포드에 이어 가장  세금을 많이 낸 납세자가 되었다. 1927년 들어 연방정부의 지출은 반으로 줄었고 국가 부채는 60억 달러로 줄어 들었다. 멜런은 미국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質(질)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전까지 투자는 주로 제조업에 이루어 졌다. 하지만 돈이 많이 생긴 은행과 기업은 실물경제에 투자하는 대신 주식을 사들였다. 멜런은 이러한 주식 투기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정작 그런 투기가 생기는 배경을 잘 알지 못했다.
멜런은 1928년에는 세수가 1927년 보다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감세 폭을 줄인 세입세출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감세를 더 큰 폭으로 하자고 들고 나왔다. 큰 폭으로 감세를 하면 건전재정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한 멜런 덕분에 무책임한 감세안은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928년 초부터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멜런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주식 투자자들을 진정시키지 못했고, 국제금융시장을 혼란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근로 윤리가 굳건하다고 믿은 멜런은 주식시장의 과열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멜런과 후버

1928년이 되자 세상의 관심은 쿨리지 대통령이 재선에 나서는가 하는 것이었다. 멜런은 쿨리지가 재선에 나설 것으로 생각했다. 쿨리지는 의외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자 멜런을 공화당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잠시 돌았다. 하지만 멜런은 이미 70대 중반이었다. 멜런은 국무장관이던 찰스 휴즈가 대통령 후보가 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휴즈는 출마할 생각이 없었다.

멜런은 대통령에의 뜻이 있던 허버트 후버 상무장관이 나라를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멜런은 후버가 국가재정을 돌보지 않으면서,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무책임한 정치인으로 여겼다. 멜런은 후버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후버는 선거운동을 시작했고, 예비선거에서 승리의 機先(기선)를 잡았다. 후버가 우세해 지자 멜런을 보좌하던 오그덴 밀스 재무차관도 후버를 지지했다. 후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멜런의 명성은 전과 같지 않았다.

페더럴 트라이앵글
 
재무장관으로서 멜런은 워싱턴의 정부 청사를 건축하는 문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워싱턴에는 백악관, 의회, 재무부 외에는 내놓을 만한 건물이 없었다. 1926년부터 멜런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15번가, 그리고 새로 낼 컨스티튜션 애비뉴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페더럴 트라이앵글(Federal Triangle)에 연방정부 청사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했다. 멜런은 페더럴 트라이앵글에는 미국의 정신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1928년 선거에서 자신이 좋아 하지 않는 후버가 대통령이 됐음에도 멜런은 은퇴할 생각이 없었다. 멜런은 자기의 정책이 지속되기를 원했고, 또 페더럴 트라이앵글 사업을 완성시키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멜런은 워싱턴 생활을 좋아 했다.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멜런은 유능한 젊은 보좌관들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 했다. 하나 뿐인 아들 폴과 소원해 진 멜런은 파커 길버트, 데이비드 핀리 같은 유능한 젊은이들을 아들처럼 생각했다.

대공황이 시작되다

1928년 11월 株價(주가)가 최고점을 기록하자 멜런은 “투기 집단과 주가가 계속 오를 것으로 믿는 대중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1929년 3월 계속되는 주가 상승에 후버 대통령마저 우려를 갖게 됐다. 주식투기에 열광하는 대중을 좋아 하지 않은 멜런은 이자율을 올리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방준비위원회는 금리 인상을 거부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그 해 8월에야 금리를 6%로 인상하는 조치를 취했고, 주가는 조정을 받은 후 다시 상승했다. 1929년 가을 후버 대통령은 멜런이 자신의 임기 동안 재무장관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월街는 이를 환영했다.

1929년 10월 23일 주가는 폭락했다.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에 주가는 더 폭락했다. 이후 3주일 동안 주가는 계속 하락해서 9월 초에 비해 시가 총액의 1/3이 사라졌다. 어느 정도의 주가 하락은 불가피하다고 본 멜런은 후버에 대해 과잉반응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멜런은 이자율과 세금을 낮추면 경기가 서서히 되살아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조해 진 후버는 정부지출을 확대시켜 경기를 부양하려 했다. 이자율 인하 등에 힘입어 1930년 중반에 주가는 상승하기 시작했고 금융시장도 정상을 되찾았다. 1930년 6월 의회는 수입품에 高(고)관세를 부과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통과시켰고, 후버는 마지못해 이에 서명했다.

재무장관 사임

멜런의 기대와는 달리 경기는 하강을 계속했다. 1930년 11월 중간선거 전날 멜런은 “미국 경제는 고통스런 구조조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에서 민주당은 大勝(대승)을 거두어서 상×하원의 다수석을 차지했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 은행이 파산하자 유럽 전역에서 현금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유럽發(발) 금융위기는 곧 미국을 덮쳤지만 멜런은 원칙론적인 말만 하고 있었다. 후버 대통령은 멜런을 젖혀 놓고 오그덴 밀스 재무차관을 직접 상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멜런이 시대 흐름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후버는 멜런을 교체하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영국 주재 대사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멜런은 이를 수락하고 1932년 4월 런던에 부임했다.

민주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뽑았다. 루스벨트는 ‘미국민을 위한 새로운 해결책(New Deal for the American People)’이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했다. 멜런의 후임으로 재무장관이 된 오그던 밀스는 “미국민은 루스벨트와 같은 자격없는 사람을 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해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압승을 거두었다. 실망한 멜런은 대사직을 사임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부자를 적대시한 루스벨트

  ‘새로운 해결책(뉴딜)’을 내놓겠다던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경기는 계속 하강했다. 루스벨트 취임 후 3년 동안 은행 5000개가 파산해서 70억 달러 예금이 사라져 버렸다. 공황이 심해지자 루스벨트는 과격한 정책을 연거푸 내놓았다.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자를 보호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실업자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국립공원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테네시 계곡에 댐을 세우는 공기업을 설립했고, 농산물 가격을 정부가 정하는 농업조정법을 통과시켰다. 멜런과 멜런을 도와 일했던 오그던 밀스, 데이비드 핀리 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뉴딜에 도취해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공화당이 장악했던 펜실베이니아에서도 민주당이 주정부와 주의회를 장악했다. 멜런이 장관직을 이용해서 거액을 수탈했다고 폭로하는 책이 출판됐다. 세상은 엄청나게 바뀐 것이다. 알코아, 걸프 석유 등 멜런家의 많은 기업들은 상장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가폭락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멜런 은행도 역시 어려움에 처했고, 멜런의 수입도 형편없이 줄어 버렸다.

미술관 건립에 나서다

1933년 멜런의 동생 리차드가 사망했고, 다음 해에는 형 제임스가 사망했다. 1935년에는 오랜 사업상 동료인 헨리 매킬다우니가 사망했다. 멜런은 이제 자신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평소에 미국에는 국립미술관이 없음을 아쉬워한 멜런은 자신이 미술관을 건립하고 자신이 모은 미술품을 미국민에게 돌려 주고자 했다. 1930년대 초에 멜런은 돈이 필요한 소련 당국이 국제시장에 내어 놓은 에르미타지 콜렉션을 사들여서 많은 값진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공직에서 물러난 멜런은 미술관 건립 구상에 전념할 수만은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그를 탈세와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수사했기 때문이다. 멜런은 자선사업가는 아니었지만 실정법을 충실하게 지킨 사람이었다. 국세청과 법무부 수사관들은 멜런과 그가 소유한 회사의 회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무부는 멜런을 기소했다. 1934년 5월, 대배심은 멜런을 무혐의로 판정했다.

루스벨트, 멜런을 탈세로 제소하다

1934년 5월, 의회는 증권거래법을 통과시키고 루스벨트는 증권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密酒(밀주)와 사기성이 농후한 주식거래로 악명 높은 조지프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를 임명했다. 같은 해에 통과된 세법은 富(부)의 상속을 어렵게 만들었다. 루스벨트는 46명의 백만장자들이 부당한 초과이윤을 향유해서 미국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사회주의 정책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부자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루스벨트는 법무장관으로 하여금 멜런을 상대로 탈세를 이유로 한 민사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멜런은 루스벨트의 위선과 대중 선동에 치를 떨었다. 멜런은 평생토록 지켜온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일급 변호사를 고용해서 대응했다. 1935년에 시작한 이 재판은 1936년 5월까지 계속됐다.

내셔날 갤러리 오브 아트 건립

1936년 11월 멜런은 암 진단을 받고 방사능 치료를 받았다. 멜런은 루스벨트에게 서신을 보내서 자신이 워싱턴에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of Art)을 건립할 것이며,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해서 미국인의 것으로 하겠으며, 미술관에는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이 제안을 받아 들이면서, 최종적으로 의회가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1937년 초 의회는 멜런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멜런은 페더럴 트라이앵글 부근에 미술관을 짓고자 했다. 멜런은 네오 클래식風(풍)을 좋아 했다. 피츠버그의 멜런 연구소와 페더랄 트라이앵글의 정부청사는 모두 네오 클래식 건물이었다. 멜런은 미국이 자랑하게 될 미술관도 네오 클래식으로 짓도록 했다.

멜런의 건강은 눈에 보이게 나빠졌다. 1937년 5월 멜런은 자기가 세운 피츠버그의 멜런 연구소의 새 건물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 해 여름 쇠약해진 멜런은  애일사가 살고 있던 롱아일랜드로 이사했다. 8월 26일 저녁, 멜런은 애일사와 폴이 지켜 보는 가운데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뉴욕을 거쳐 피츠버그로 옮겨져서 먼저 사망한 동생이 잠든 묘지 옆에 묻혔다. 1937년 12월 국세심판소는 멜런을 상대로 한 법무부의 민사소송을 기각했다. 1941년 3월 국립미술관은 준공되어 문을 열었다.

멜런의 유산

멜런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멜런은 은행가이면서 산업자본가였다. 록펠러나 포드와 달리 그는 사업과 투자를 다원화했다는 점에서 포트폴리오 다원화라는 투자기법을 누구보다 먼저 사용했다. 멜런은 개인주의와 경쟁을 미덕으로 생각했고, 루스벨트의 사회주의 실험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은 공화당 보수파의 기본정책이 되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꽃을 피웠다.

앤드류 멜런은 가정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불충실한 아내와 이혼한 후 재혼은커녕 여자를 사귀지도 않았다. 그는 웃는 적이 거의 없었고, 항상 일에 몰두했다. 그는 하나 뿐인 딸과 하나 뿐인 아들을 무척 사랑했으나, 이들은 아버지의 과업을 이을 능력도 의사도 갖지 못했다. 맬런은 이 점을 무척 아쉬워 했고, 그래서 재부무 시절 자기의 보좌관이던 파커 길버트와 데이비드 핀리를 자식처럼 생각했다.

멜런은 이혼한 아내 노라의 방탕한 생활비를 묵묵히 댔다. 그럼에도 노라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세뇌시켰다. 폴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비로서 부모의 이혼이 어머니 탓임을 알게 됐다. 멜런이 사망한 후 애일사는 이혼했는데, 그들 사이엔 딸 오드리를 두었다. 말년의 멜런은 손녀 딸 오드리를 매우 귀여워 했다. 폴은 승마를 좋아 했지만, 병약한 아내 매리는 아이 둘을 남기고 1946년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애일사와 폴은 각기 재단을 세우고 미술품을 수집했다. 폴은 국립미술관의 이사를 지내다가 1963년에는 대표가 됐고, 1979-83년 간은 이사회 의장을 지내면서 미술관에 많은 돈을 댔다. 폴은 멜런 연구소가 취약하다고 생각하고 카네기 공대와 합병을 추진해서 카네기-멜런 대학을 발족시켰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앤드류의 손녀 오드리는 1967년 남편과 함께 비행기 사고로 죽었고, 이에 상심한 애일사는 1969년에 사망했다. 노라는 1973년에 95세로 사망했다.

폴은 아버지가 세운 멜런 교육자선 재단의 존속기간이 만료함에 따라 새 재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멜런 교육자선 재단은 해산 전에 500만 달러를 마지막으로 국립미술관에 기증해서 東館(동관)을 증축할 수 있게 했다. 동관은 앤드류 멜런이 그토록 싫어 했던 현대식 건축물로 지어졌다. 폴은 애일사가 남긴 유산을 합쳐 아버지 이름을 딴 앤드류 멜런 재단을 설립했다. 오늘날 앤드류 멜런 재단은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 보다 자산 규모가 더 크다.

예일 대학 등 교육기관에도 많은 기부를 한 폴 멜런은 1999년 1월 92세로 사망했다. 폴 멜런은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어퍼빌 묘지에 묻혔는데, 이 묘지에는 앤드류 멜런과 노라, 애일사, 그리고 먼저 죽은 폴의 첫 아내가 함께 묻혀 있다. 폴이 생전에 유해를 한 곳에 모아 놓았던 것이다. 생전에 화목하지 못했던 멜런 가족은 죽은 후에 비로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끝) (월간조선 2008년 6월호 게재)

* 앤드류 멜런에 관한 자료사진은 갤러리의 자료사진에 있습니다. 책 표지는 첨부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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