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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티 쉴래이스, 잊혀진 사람 (2007년)
작성일 : 2008-08-17 00:27조회 : 1,654



아미티 쉴래이스, 잊혀진 사람 (하퍼-콜린스, 2007년, 464쪽, 26.95달러)
 Amity Shlaes, The Forgotten Man – A New History of the Great Depression
(HarperCollis, 2007, 464 pages, $26.95)

월스트리트 저널의 논설위원을 지내고 지금은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는 아미티 쉴래이스가 펴낸 이 책은 1929년-1940년에 걸친 미국의 대공황 시대의 역사를 소설처럼 잘 그려내고 있다. ‘대공황에 대한 새로운 역사’라는 부제목을 단 이 책에서 저자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대공황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황을 불필요하게 장기화시켰음을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1929년 10월 주가(株價) 대폭락으로 시작한 공황에 대해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 졌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실시해서 경제를 회생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보편적 상식이 잘못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가 폭락 사태에 대해 후버가 취한 조치가 오히려 공황을 심화시켰는데, 루스벨트는 후버 보다 더 잘못된 정책을 펴서 미국민의 고통을 장기화시켰다는 것이다. 책은 또한 자유시장경제론자였던 당대의 기업인 앤드루 멜런과,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 렉스포드 터그웰 교수를 비교해 보여준다.

책의 제목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책을 읽은 독자가 판단할 수 있게 돼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 초인 1932년 4월, “오늘날 같은 불행한 시대는 경제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잊혀진 사람’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하는 플랜을 요구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루스벨트는 실업에 허덕이는 빈곤층이 ‘잊혀진 사람’이며, 자신이 이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공언한 것이다.

그러나 ‘잊혀진 사람’은 1883년에 예일 대학의 경제학자 윌리엄 섬너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섬너 교수는 당시에 태동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A는 고통을 겪고 있는 X를 도와야 한다고 B를 설득한다. A와 B는 X를 돕기 위한 법률을 제정한다. 이 법률은 이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C로 하여금 X를 돕도록 강요한다. C는 전혀 생각되어지지 않은, ‘잊혀진 사람’이다. C는 성실하게 일하고 투표하고, 또 항상 돈을 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대공황 시절에 정말로 잊혀진 사람이 누구였나를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책은 1937년 말 뉴욕 브루클린에서 굶주림에 시달린 13세 소년이 자살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1938년 들어 미국의 실업률은 20%를 넘는 등 공황이 한층 심해졌다. 유럽은 공황을 벗어 났지만 미국만 유독 공황이 더 심해 진 것이다.

1929년에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한 대공황은 1920년대의 거품 성장에서 비롯됐고, 루스벨트의 뉴딜이 이것을 치유했다고 보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일반적 설명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1920년대는 대단한 성장을 기록한 위대한 시대였고, 후버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이 단기에 그칠 공황을 오래 지속시킨 것이다.

캘빈 쿨리지의 뒤를 이어 1925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허버트 후버는 광산 엔지니어 출신이다. 시장은 자율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정부의 역할은 작아야 한다고 생각한 캘빈 쿨리지는 재무장관이던 앤드루 멜런이 보다 훌륭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었다. 피츠버그 출신으로 알코아(Aluminuim Company of America), 베들레헴 철강, 멜런 은행 등 많은 기업을 거느린 멜런은 하딩, 쿨리지, 그리고 후버 대통령의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사람들은 세 사람이 멜런 장관 아래서 대통령을 지냈다고 비꼬았다. 멜런은 세금을 줄여야 민간이 투자를 하고, 그러면 좋은 결과가 스스로 생긴다고 믿었다. 하지만 토목기사 출신인 후버는 시장과 금융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1927년 여름, 컬럼비아 대학의 렉스포드 터그웰 교수 등 몇몇 사회주의 성향의 학자들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에서 이들은 미국민권연합(ACLU)을 세운 로저 볼드윈을 만났다. 미국이 자본주의로 병들었다고 생각한 이들은 소련을 훌륭한 대안으로 보았다. 이들은 소련에 우호적인 뉴욕타임스의 모스코바 특파원 월터 듀란티의 기사에 심취해 있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그러했다.

1929년 10월 월街(가)의 주식 시장은 폭락했다. 8월에 381까지 갔던 다우 지수는 11월에 200선까지 내려갔다. 당황한 후버는 연방정부의 지출을 늘렸고 주정부에 대해서도 재정지출을 늘리도록 권했다.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한 의회는 높은 관세를 정한 스무트-할리법(法)을 통과시켰고, 후버는 이에 서명했다. 모건 금융회사의 토머스 라몬트 회장은 후버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빌다시피 했으나 無爲(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대항해서 경쟁적으로 관세를 인상했다. 무역량이 급격히 줄었고 공황은 세계로 번져갔다. 그럼에도 후버는 “무분별한 투기가 공황을 야기했다”고 월街를 비난했다. 뉴욕 주지사이던 루스벨트는 후버가 재정지출을 충분히 늘이고 있지 않다고 비난했다.

요즘 같으면 경기가 쇠퇴하면 자금 공급을 늘리고 경기가 과열하면 공급을 줄인다. 하지만 1930년대 초에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공황이 닥쳐왔음에도 화폐 공급을 줄여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자본주의에 본질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많은 미국인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돌파구로 생각했다. 공산주의 실험을 배우기 위해 매년 수 천명의 미국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다. 휴이 롱 상원의원 같은 선동가들은 대기업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四面楚歌(사면초가)에 놓인 멜런은 1932년 초 재무장관직을 사임했다.

1932년 대선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루스벨트는 터그웰 교수와 아돌프 벌 같은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꿈꾸는 개혁주의자들을 브레인으로 발탁했다. 후보 지명대회에서 루스벨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부도덕과 협잡 때문에 공황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내건 루스벨트는 부유층을 적대 계층으로 상정해 놓고 공격을 가한 것이다.

1932년 11월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후버를 압도적으로 눌렀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좌경화하는 것은 분명했다. 헨리 월러스가 농무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터그웰은 농무부 차관보가 되었다. 월레스와 터그웰은 농산품의 생산과 소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려 했다. 농업에 면허제를 도입했고, 농지를 줄여나가기로 했다.

1933년 9월 농무부는 새로 제정된 농업조정법에 따라 돼지고기 가격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새끼돼지 600만 마리를 살(殺)처분했다. 베이컨 한 점을 구하기 어려운 실직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농산물 과잉생산을 줄이기 위한 휴경(休耕) 제도는 대농장주만을 이롭게 했고, 小農(소농)과 小作農(소작농)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테네시 계곡에 대형댐을 여러 개 건설해서 고용을 늘리고 경제를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테네시 계곡 댐은 자원낭비적 측면이 많았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부도덕한 대기업 때문에 공황이 생겼다면서 기업인들을 옥죄어 나갔다. 법무부는 멜런을 탈세 혐의로 수사했고, 그가 소유한 알코아를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법무부는 파산으로 투자자에 큰 손해를 입힌 전기사업가 새무얼 인설을 기소했다. 하지만 멜런을 기소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인설은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연방정부는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온갖 법규를 만들어내서 기업의 투자의욕을 막았다. 과거와 똑같이 정상적으로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연방정부의 책상머리들이 만들어낸 법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브루클린에서 유대식으로 닭을 도살하여 팔던 섹터家(가)는 비위생적으로 닭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문닫게 되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35년 5월 연방대법원은 사업을 규제하는 국가산업부흥법이 과도한 입법권 위임을 했다고 이유로 위헌으로 판시했다. 대법원은 농업조정법도 위헌으로 판시해서 뉴딜 정책에 타격을 주었다. 

1935년 여름, 다우 지수는 119로 주저앉았고 경기는 더욱 나빠졌다. 루스벨트는 惡化一路(악화일로)를 가는 경제를 여전히 부자 탓으로 돌렸다. 의회는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고율 상속세를 규정한 세법을 통과시켰다. 공화당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해롤드 이키즈, 헨리 월러스, 해리 홉킨스 등 루스벨트의 브레인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루스벨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실에 좌절한 앤드루 멜런은 고향 피츠버그에 멜런 연구소(The Mellon Institute)를 세워서 장차 미국을 발전시킬 연구를 뒷받침하고자 했다. 멜런 연구소는 수백개의 특허를 얻어 내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6년, 80세를 넘긴 멜런은 루스벨트에게 비밀편지를 보내서 그가 평생동안 모은 미술품을 미국민의 품에 넘기겠다고 알려 주었다. 멜런은 워싱턴의 한복판에 세운 자신의 미술관에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기증하고, 미술관 자체도 미국민에 돌려 주겠으며, 미술관에는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The National Gallery of Art) 건축이 시작됐다.

루스벨트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37년 초에도 다우지수는 200을 넘지 못했다. 自助的(자조적) 집단농장을 건설하는데 많은 예산과 노력을 퍼부은 터그웰은 비로소 자신의 구상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농무부를 떠났다. 그가 그리던 농업 유토피아 건설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터그웰은 부인과 이혼하고 집단농장을 건설할 때 자신을 도왔던 젊은 여직원과 결혼했으니, 그것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1937년 8월 멜런은 82세로 사망했다. 그 해 11월 다우지수는 114로 또다시 폭락했다. 뉴딜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뉴딜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롤드 이키즈는 미국의 60개 부자 가문이 미국민을 상대로 파업을 해서 경제가 계속 나쁘다고 비난했다. 193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상하원 의석수와 주지사 숫자를 늘리는데 성공했다. 1930년 이후 공화당이 처음으로 선거에서 善戰(선전)한 셈이다.

1940년 들어 공화당은 다가 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력 주자인 토머스 듀이, 로버트 태프트, 아서 반덴버그 중 어느 누구도 후보 지명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웬델 윌키가 다크 호스로 등장해서 후보 지명을 받았다. 뉴딜을 비판한 윌키는 2200만 표를 얻었지만, 2700만 표를 얻은 루스벨트에 패배했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민은 루스벨트를 계속 선택한 것이다.

대선에 패배한 후 윌키는 고향 인디아나의 엘우드에 돌아와서 연설을 했다. 윌키는 섬너 교수가 이야기 한 원래의 ‘잊혀진 사람’이 중요하다고 했다. 윌키는 “‘잊혀진 사람’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기억해 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위대한 미국을 향한 우리의 모험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요구할 뿐이다”고 말했다.

저자는 ‘잊혀진 사람’이 당시 닥쳐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을 지키기 해 앞장서서 싸울 것이라는 말로 책의 끝을 맺는다.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1930년대 미국의 참 모습을 알게 해주며, 무엇보다 뉴딜의 허구성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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