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폴 켄고르, 윌리엄 클라크 - 레이건의 최측근 (2007년)
2008-09-15 09:44 1,856 관리자



폴 켄고르 – 패트리샤 되너, 판사 (2007, 이그나티우스 프레스, 27.95 달러, 378쪽)

Paul Kengor and Patricia Clark Doerner, The Judge – William P. Clark, Ronald Reagan’s Top Hand (Ignatius Press, 2007)

레이건 대통령에 관한 두 권의 책(‘神과 레이건’ ‘十字軍’)을 낸 폴 겐고르 교수와 캘리포니아 향토 사학자인 패트리샤 되너가 펴낸 이 책은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무차관, 안보보좌관, 그리고 내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클라크의 전기(傳記)이다. 책의 제목이 ‘판사’인 것은 클라크가 캘리포니아 주(州) 법원 판사를 오랫동안 지내서 레이건 행정부에서도 편리하게 ‘판사’로 불렸기 때문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작은 대학을 苦學(고학)으로 나온 로널드 레이건은 내세울 만한 친척이나 친구가 없었다. 부인 낸시 여사가 레이건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것은 레이건에게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낸시 여사를 제외한다면 레이건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윌리엄 클라크였다. 클라크는 레이건 대통령이 폴란드를 해방하고, 소련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출생과 성장

클라크는 1931년 10월 23일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위치한 벤추라 카운티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家系(가계)는 아일랜드 가톨릭으로, 祖父(조부)때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클라크의 조부는 보안관을 지냈고, 부친은 벤추라 카운티의 작은 도시 옥스나드 市의 경찰서장을 지냈다.

농장에서 자란 클라크는 어릴 때부터 사냥을 하고 농장 일을 거두었다. 집안 일이 많은 탓에 일년 중 6개월 밖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 클라크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모는 그를 근처의 가톨릭 사립고등학교에 보냈다.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중단할 위기에 처했지만 학교의 신부(神父)가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스탠포드, 신학교, 로스쿨로 방황하다

클라크는 가톨릭 신학에 심취했지만, 법률을 공부하기로 하고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했다. 스탠포드에서 클라크는 타임지 창업자인 헨리 루스의 부인인 클레어 루스를 만났다. 클레어 루스는 하나 뿐인 딸이 스탠포드 졸업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사망한데 충격을 받아서 딸을 추모하는 예배당을 건립하려 했는데, 클라크가 그 일을 도와주었다.

스탠포드 대학 1년을 마치고 클라크는 학업을 중단했다. 스탠포드는 시골 출신인 그에게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클라크는 신부가 되고자 했다. 1950년 가을 클라크는 뉴욕주 햄버그 시에 위치한 아우그스티안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가(假)입교 1년 도중에 그만 두었다. 클라크는 자신의 지도 신부에게 성직에의 召命(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캘리포니아의 집으로 돌아 왔다.

클라크는 가톨릭계 대학인 산타 클라라 대학에 등록해서 2년간 다닌 후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로욜라 로스쿨에 입학했다. 클라크는 1952-53년 간 로펌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로스쿨을 다녔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관계로 그는 징집되어  육군에 입대했다. 군사훈련을 마친 후 방첩대에 귀속되어 독일에 파견됐다. 그는 독일에서 방첩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조앤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클라크는 학교로 돌아왔다. 로욜라 로스쿨의 저녁 반에 등록한 클라크는 낮에는 여러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로스쿨을 그만 두고 말았다. 법학 학위는 없었지만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있는 학점을 이수한 그는 두 번 시도 끝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런 연유로 클라크는 고등학교 졸업장 외에는 정식 학위를 갖지 못했다.

레이건과의 만남

변호사가 된 클라크와 그의 아내는 1958년에 옥스나드 시(市)로 돌아왔다. 로펌에 취직하지 못한 그는 작은 사무실을 열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변호했다. 클라크의 법률 사무소는 그런대로 잘 돼서 부부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크는 어릴 때 자랐던 전원과 목장에 대한 향수를 버릴 수 없었다. 클라크는 옥스나드에서 차로 세 시간 걸리는 산 루이 오비스코 카운티에 위치한 10 에이커 농장을 할부로 구매했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 닥쳐 오자 클라크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존슨 대통령이 제창한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정책이 전혀 위대하지 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다.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클라크 부부는 이 모임을 주선한 로널드 레이건을 만났다. 클라크와 레이건은 서로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선 레이건은 클라크에게 벤추라 카운티 선거본부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레이건은 그 해 11월 본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브라운 지사에 대해 대승을 거두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시절

레이건은 클라크에게 주정부 개혁을 위한 태스크 포스를 이끌어 주도록 요청했고, 주지사 취임 후에는 내각 장관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예산실장에는 캐스퍼 와인버거, 공보비서엔 린 노프지거가 임명됐다. 이들은 나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캘리포니아 사단(師團)’의 모태가 됐다. 1967년 레이건은 클라크를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레이건은 클라크를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자신도 가정적인 클라크는 낸시 여사가 남편에 대하여 갖는 관심을 충분히 이해했다. 클라크는 비서실 차장이던 마이클 디버에게 낸시 여사의 관심을 돌보도록 했다. 1968년 말 로버트 핀치 부지사가 닉슨 행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사임하자 레이건은 클라크에게 부지사 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캘리포니아 주법원 판사가 되다

하지만 클라크는 가정과 목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이 제안을 사양해서 레이건을 실망시켰다. 얼마 후 클라크의 목장이 있는 산 루이 오비스코 카운티 법원 판사 자리가 새로 생기자 레이건은 클라크를 그 자리에 지명했다. 클라크는 비서실장 후임으로 법률 보좌관이던 에드윈 미즈를 추천했다. 미즈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를 마칠 때까지 머물렀으며, 후일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을 따라 워싱턴에 가서 대통령 보좌역과 법무장관을 지냈다.

레이건이 클라크를 판사로 지명한 데 대해 지방변호사 협회는 반대했다. 클라크가 로스쿨을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런 비판에 개의하지 않았다. 법원은 클라크의 농장에서 4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클라크와 그의 가족은 농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971년 레이건은 클라크를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캘리포니아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했고, 1973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레이건은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의 색채를 바꾸기 원했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와 새크라멘토의 법원에 근무하면서도 클라크는 자기 농장에서 살았다. 월요일 새벽에 농장에서 세스나기(機)를 몰고 출근해서 목요일에 농장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한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 판사로서 클라크는 사형, 낙태 등 예민한 사안에서 보수적 판결을 해서 레이건의 기대를 반영했다.

1980년 2월 클라크는 낸시 여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낸시 여사는 클라크에게 레이건의 농장으로 급히 와 달라고 부탁했다. 대선(大選) 출마를 선언한 레이건은 선거대책 본부장을 급히 새로 임명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낸시와  클라크는 윌리엄 케이시를 선거대책 본부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윌리엄 케이시는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을 지내면서 소련을 붕괴시키려는 레이건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차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은 대승을 거두었다. 언론은 레이건과 가까운 클라크가 레이건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레이건은 클라크를 국무차관으로 지명했다. 클라크는 레이건에게 자기는 대외정책에 대해 전문성이 없다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바로 그래서 당신이 그 자리에 가기를 원하는 거요. 나는 필요한 모든 전문가들을 이미 갖고 있단 말이요.”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국무부 관료들이 미국의 국익 보다는 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을 지킬 수 있는 차관을 두기를 원했다.

국무차관으로서 클라크는 독선적인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 백악관을 조화시키고, 워싱턴에 공연차 온 소련의 지휘자 쇼스타코비치의 미국 망명을 성사시켰다. 차관으로서 겪은 가장 큰 위기는 레이건이 임기 초에 한 젊은이에게 저격 당한 사건이었다.

1981년 6월 연방대법원의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이 사임하자 레이건은 클라크에게 대법관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클라크는 캘리포니아에서 판사 일을 충분히 했다면서, 그대로 정부에 남겠다고 했다. 1982년 1월 초 레이건은 사임한 리차드 앨런 안보보좌관 후임으로 클라크를 임명했다. 언론은 “레이건이 자기와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 클라크를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고 썼다. 유럽의 언론은 클라크가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근본주의 반공주의자’라고 비꼬았다.

안보보좌관 시절

레이건은 클라크에게 그가 주관하는 국가안보회의의 멤버를 구성하도록 했다. 클라크는 ‘내셔널 리뷰’ 발행인이며 보수주의 평론가인 윌리엄 버클리 2세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로버트 맥팔렌 국무부 자문관과 존 포인덱스터 제독을 팀에 합류시켰다. 클라크는 항상 레이건 행정부의 주인은 레이건임을 강조했다. 클라크는 레이건 행정부 고위관리에 의해 정보가 언론에 유출되는 데 대해 경고하는 등 대통령을 보위하는데 앞장섰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클라크는 신앙심이 돈독한 레이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공산체제를 ‘惡(악)’으로 보았다. 클라크는 미국이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세력을 압도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이를 천명한 비밀 지침을 만들었다.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클라크는 폴란드가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관건이라고 보았다. 동유럽 한복판에 자리 잡은 폴란드는 당시 자유노조 운동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었고,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의 자유노조를 지원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워싱턴에 소재한 교황청 연락관을 통해 교황과 레이건 간의 채널을 구축했다.

1982년 들어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야심적인 시베리아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대해 서방이 재정과 기술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레이건을 비난하고 나섰다. 클라크는 미테랑을 만나 “레이건은  프랑스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헤이그 국무장관과 국무부 관료도 레이건의 이 같은 강경책을 반대했다.

레이건 취임 초기부터 백악관과 의견 충돌이 많았던 헤이그 국무장관이 결국 사임하자 클라크는 후임으로 조지 슐츠를 레이건에게 추천했고, 레이건은 슐츠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1982년 가을 미국이 서유럽에 MX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부르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클라크는 “이 연설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면밀하게 계산된 것”이라고 주변에 알려주었다. 동유럽 국민들과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반(反)체제 인사들은 레이건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악의 제국’ 연설이 있은 후 2주일 후 레이건은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방어 이니시어티브(SDI)를 발표했다. 슐츠 국무장관 등 행정부 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클라크는 이를 비밀리에 추진했던 것이다.

1983년 여름 타임지와 뉴욕타임스는 클라크가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치고 있는 측근이라는 기사를 특집으로 내 보냈다. 클라크는 이 기사를 보고 자기가 레이건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안보보좌관으로서 클라크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에 의해서 격추된 사건에 대처한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행위가 “대량 학살이며, - - 구역질 나는 야만적 행동”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클라크가 작성한 것이었다.

클라크는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레이건의 희망을 조용하게 실현시켰다. 1983년 11월 의회는 바티칸에 대사관을 두는 것을 금지하는 19세기 법률을 폐지했고, 레이건은 바티칸에 대사를 파견했다. 1983년 10월 13일, 레이건 대통령은 클라크가 안보보좌관을 사임하며, 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내무부 장관이 되다

클라크가 백악관을 떠나기로 결심한 데는 여러 가지가 작용했다. 당시 레이건의 백악관에선 실용적 노선을 추구하는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과 마이클 디버 비서실 차장, 그리고 보다 원칙주의적인 케이시 CIA 국장, 에드윈 미즈 보좌역, 그리고 클라크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클라크는 자신과 베이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이 레이건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백악관을 떠나겠다고 레이건에게 말한 것이다. 클라크가 안보보좌관에서 물러 날 것이라는 소문이 들자 워싱턴의 보수 진영은 불만을 표시했고 소련의 프라우다지(紙)는 환영하는 논평을 실었다.

클라크는 자기 후임으로 자기의 보좌관이었던 맥팔렌을 추천했고, 레이건은  맥팔렌을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클라크는 캘리포니아의 농장으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레이건은 사임한 제임스 와트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클라크를 임명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내무장관인 와트는 환경단체와 필요 이상으로 충돌했고, 소수인종과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사임이 예상되고 있었다. 레이건은 농장을 갖고 있으며 야생자연을 이해하는 클라크가 국립공원을 관장하는 내무장관으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내무장관으로서 클라크는 논란이 많았던 그랜드 캐년 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 하는 등 환경단체의 주장을 많이 받아 들였다. 그러면서도 클라크는 중서부 목장주의 이해를 반영해서 이해 조정자로서의 내무부의 위상을 정립했다. 또한 클라크는 단순한 내무장관이 아니었다. 레이건은 중요한 각료 임명에 관해 클라크에게 의견을 물었다. 1984년 5월에 알래스카 페어뱅크에서 레이건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날 때 클라크는 레이건을 수행했다. 그것은 물론 클라크가 갖고 있는 ‘가톨릭 커넥션’ 때문이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 오다

1984년 11월 선거에서 레이건은 민주당의 월터 몬데일에 대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클라크는 자기가 워싱턴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레이건에게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클라크를 항상 옆에 두고 싶었던 레이건도 이번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임을 승락하는 친서에서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썼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많은 어려운 일을 맡겼습니다. 모든 경우에 당신은 맡은 일을 잘 해 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보다 직무를 통해 나에게 충실하게 봉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난 18년간 했던 많은 일에 대해 감사합니다.”

워싱턴을 떠나 캘리포니아의 농장으로 돌아온 클라크는 로저 앤드 윌스 로펌의 자문으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클라크는 레이건를 사적(私的)으로 도왔다. 1985년 5월 레이건은 클라크로 하여금 한국, 대만, 그리고 중국을 순방하도록 했다. 클라크는 서울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1987년에 클라크는 오랜 친구 두 명을 잃었다. 클레어 루스가 사망했고, 이어서 CIA 국장이던 케이시가 뇌종양으로 숨진 것이다.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는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휘청거렸다. 민주당의 정치적 공세로 인해 안보보좌관 포인덱스터 제독과 올리버 노스 해병 중령가 기소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클라크는 이란-콘트라 사건을 ‘사소한 정치적 문제’로 생각했다. 클라크는 레이건에게 편지를 보내 포인덱스터와 노스를 사면하도록 여러 차레 촉구했으나 레이건은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백악관을 떴다.

생애의 마지막 사업

1988년 3월 클라크는 목장에서 자기의 경비행기를 이륙해서 비행하던 중 인적이 드문 계곡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우연하게 지나가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구한 클라크는 이것을 ‘신(神)의 뜻’으로 생각했다. 

이 사고 후에 클라크는 생애의 마지막 사업으로 채플을 세우고자 했다. 클라크의 목장 입구 언덕에 세워진 채플에는 가톨릭 미사와 개신교 예배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이따금 종교 음악회를 열어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목장으로 은퇴한 레이건은 기념 도서관을 부근에 세우고자 했다. 레이건과 클라크는 1991년 11월 레이건 기념 도서관 개막식에서 만났다.

1993년부터 레이건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레이건은 오랫동안 자기의 비서를 지낸 마이클 디버를 알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클라크 만은 알아 보았다. 1994년 11월 5일 레이건 대통령은 자기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있음을 알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2004년 6월 5일 레이건은 오랜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2006년 3월 27일 레이건의 공보비서를 지낸 린 노프지거가 사망했고, 그 다음날 국방장관을 지낸 캐스퍼 와인버거가 사망했다. 운명을 앞둔 와인버거에게 클라크는 성경 구절을 읽어 주면서 신(神)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마이클 디버 마저 암으로 사망해서 캘리포니아부터 레이건의 신화를 만든 사람 중에는 이제 클라크와 에드윈 미즈만 살아 있다. 한때 신부(神父)가 되고자 했으나, 레이건을 만나 20세기 말에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과업에 참여한 클라크는 자기가 세운 채플에서 기도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월간조선 200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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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