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윌리엄 버클리 2세, 내가 아는 레이건 (2008년)
2009-03-01 00:06 1,423 이상돈



윌리엄 버클리 2세, 내가 아는 레이건 (2008년, 베이직 북스, 279쪽)
 
    William F. Buckley, Jr., The Reagan I Knew (2008, Basic Books, $ 25.00)

이 책은 2008년 2월에 타계한 윌리엄 버클리 2세의 55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다. 버클리는 이 책의 출간을 보지 못했다. 간단한 프롤로그에서 버클리는 자신이 레이건의 친구이며, 레이건은 원래 진보적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선 자기가 레이건의 멘토였다고 말한다. 레이건과 그의 가족을 잘 아는 버클리는 레이건에 대해 쓰여진 다른 책들에선 찾아 보기 어려운 ‘인간 레이건’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책을 남겼다.

버클리는 자기가 1961년 1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행사에 연사로 초청되었을 때 레이건을 처음 만났다. ‘내셔널 리뷰’지(誌)는 레이건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된 후 레이건 특집호(號)를 내보냈고, 레이건은 이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때만 해도 버클리는 레이건의 잠재적 가능성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고 있을 때인 1968년에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를 만난 자리에서도 버클리는 “영화 배우 출신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967년 7월, 버클리는 자기의 TV 토론 프로인 ‘사선(射線)’(Firing Line)에 레이건을 출연시키기 위해 다시 캘리포니아에 가서 레이건을 만났다. 토론에서 버클리는 “주정부가 독자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좋은 주지사(good governor)가 가능한가 ?”라고 물었다. 레이건은 “주정부는 연방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지방정부는 주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심한 상황”이며, “연방정부가 돈을 먼저 걷어가고 나중에 주정부는 연방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그러면 연방정부는 어떻게 돈을 쓰라고 정해 주면서 다시 돌려주는 것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다”고 답했다. 레이건이 주지사로 있던 8년 동안 버클리와 레이건 부부는 자주 서신을 교환하는 등 세상사에 대하여 관심을 나누었다.

1975년 여름, 버클리는 다음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레이건이 포드 대통령을 이길 것이라고 칼럼에 썼다. 1975년 12월, 레이건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을 발표했다. 197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포드와 레이건은 각축전을 벌였다. 레이건은 당내 진보파의 지지를 얻어내고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스웨이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미리 지정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당내 보수파 표가 일부 이탈했고, 펜실베이니아는 여전히 포드를 지지해서 레이건이 패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버클리는 당시에 자기도 스웨이커를 괜찮은 선택으로 알았다고 회고했다.

레이건 부부는 아들과 딸의 문제에 대해 버클리와 논의하곤 했다. 레이건 부부 사이에는 딸 패티와 아들 로널드 2세가 있는데, 둘은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았다. 호사가(好事家)들은 레이건 부부가 자기들끼리만 좋아 지내고 아이들은 돌보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패티는 시(詩)를 좋아 했다. 로널드 2세는 12살이 되던 해부터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부모와 교회에 가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노선(路線)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1976년 11월 추수감사절 때에 버클리는 코네티컷의 자신의 저택에 레이건 부부와 로널드 2세를 초대했다. 그 때 낸시 여사는 아들에게 버클리에게 “네 일을 말해 보라”고 했다. 당시 예일대 1학년이던 로널드 2세는 대학을 그만두고 발레를 배우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버클리는 로널드 2세에게 첫 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한 후에 발레를 배우면 나중에 복학을 할 수 있다고 달랬다. 하지만 로널드 2세는 첫 학기도 마치지 않고 예일대학을 자퇴해 버렸다. 레이건은 버클리에게 “솔직히 자기는 아들을 포기했다”고 고백했다.

레이건은 아들에 대해 일체의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고, 로널드 2세는 발레단에서 몇 년 동안 공연을 하다가 결혼을 한 후에는 프리랜서 기자생활을 했다. 딸 패티도 레이건 부부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대통령 재직 중에도 패티는 아버지의 정책을 비난해서 화제가 됐다. 플레이보이지(誌)가 패티를 누드 모델로 등장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레이건 부부를 괴롭혔다. 플레이보이 1994년 7월호에 드디어 패티의 전나(全裸) 사진이 실리자 낸시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항상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알즈하이머 증세가 생기기 시작하던 레이건은 낸시에게 “그 애들이 곤란에 처하면 당신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오”라면서, 힘없이 낸시를 달랬다. 

레이건이 대통령을 지내던 8년간은 버클리와 ‘내셔널 리뷰’에게 전성기였다. 레이건은 버클리를 몇 차례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1983년에 ‘내셔널 리뷰’가 워싱턴 지국을 열자 레이건은 직접 지국을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내셔널 리뷰’ 창간 30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열렸고, 레이건의 옆에는 버클리의 누나이고 ‘내셔널 리뷰’ 창간 이래 경영을 맡아온 프레실리아 버클리가 않았고, 버클리의 옆 자리엔 낸시 여사가 앉았다.

레이건에 대통령에 당선되자 버클리는 자신은 정부 직책을 맡을 계획이 없다고 알렸고, 그러자 이에 실망한 레이건은 버클리를 아프가니스탄 주재 대사로 임명한다는 답신을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점령 하에 있었다.)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버클리가 단둘이서 오찬을 할 경우가 있었다. 그때 버클리는 “당신이 임명한 대사가 카불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음을 보고할 수 밖에 없어서 유감”이라고 농담을 했다.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끝낸 레이건은 버클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내 임기 내내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지내서 당신은 이제 종신(終身) 대사가 되었다”고 했다. 이런 유머는 레이건과 버클리 사이가 아니면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버클리가 레이건을 마지막을 만난 것은 1990년 10월에 레이건의 자서전 ‘미국인의 생애’(‘An American Life’)가 나와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선(射線)’ 프로를 녹화할 때였다. 버클리는 레이건이 대통령을 지낸 1980년대에는 공산주의가 교조(敎條)로서 기능하기를 멈추고 단지 위협으로 머문 시기였으며, 레이건은 우리 사회의 공공문제는 정부가 만들거나 정부가 악화시킨 것이 많으며, 따라서 정부에 의해 풀 수 없는 것들임을 미국민에게 알려 주었다고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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