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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톰 허스턴
작성일 : 2023-01-01 00:08조회 : 1,469


톰 허스턴


애너 체놀트 사건(1968년 대선을 앞두고 체놀트 여사가 남베트남 티우 대통령에게 이야기해서 존슨 대통령의 평화회담을 거부하도록 한 사건)이 워터게이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 고리 역할을 한 사람이 톰 허스턴이다. 톰 허스턴(Tom Huston 1941~)은 인디애나 출신으로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학부와 로스쿨을 다니고 육군 정보 장교로 국방정보국에서 근무한 후 닉슨 백악관 초기에 2년 동안 공보 비서를 지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60년에는 미국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일생(그리고 미국 역사)을 바꾸었다.

인디애나 대학에선 톰 허스턴, 그리고 그와 함께 프래터니티 숙소에서 같이 생활했던 후배인 에밋 티렐(Emmett Tyrell 1943~)이 YAF에 참여했다. (에밋 티렐은 인디애나 대학원을 다니면서 <The American Spectator>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최초로 폭로해서 클린턴을 탄핵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허스턴은 조직과 대중연설에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YAF 인디애나 대학 지부를 설립한 허스턴은 YAF 중서부 지역 대표를 지내고 인디애나 로스쿨 다니던 1965년에는 YAF 전국 대표가 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당시 YAF는 가장 큰 보수단체였고 더구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단체였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았다. 따라서 YAF를 이끄는 톰 허스턴이 있는 인디애나 대학을 배리 골드워터와 윌리엄 버클리 등 저명인사가 연달아 방문했다. 덕분에 졸릴 것 같은 대학 도시인 블루밍턴이 갑자기 뉴스를 탔다.  1964년 대선을 앞두고 배리 골드워터가 공화당 후보가 되자  톰 허스턴은 전국 대학을 누비면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허스턴이 YAF를 이끌 때 YAF는 회원이 3만 명이 넘었다. 허스턴은 공산주의와 성전(聖戰)을 주장했으며 신좌파 학생단체인 SDS(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 대표와 토론을 벌이고 사이공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대단한  활동을 했다. 로스쿨을 다니면서 ROTC 훈련을 받은 허스턴은 졸업한 후 육군장교로 현역근무를 시작했다. 허스턴은 정보장교로 국방정보국(Defense Intelligence Agency : DIA)에서 근무했다, 허스턴이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반전 운동이 팽배해 갔으나 1968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닉슨이 승리했다.
 
리차드 닉슨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기자를 지내다가 닉슨의 로펌에서 닉슨의 스피치라이터를 하던 패트릭 뷰캐넌(Patrick Buchanan 1938~)은 닉슨 백악관의 공보실에서 일하게 됐다. 뷰캐넌은 YAF 회원이었고 그런 관계로 톰 허스턴을 잘 알았다. 1969년 2월 현역에서 제대할 톰 허스턴은 닉슨이 취임한 다음날부터 백악관의 비서실에 자리를 얻어 근무하게 됐다. (계속) 

- 사진 : 인디애나 대학 캠퍼스를 찾은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왼쪽에서 세번째)과 톰  허스턴(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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