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통령, '왕따'의 기로에 놓이다 (게시판에서)

작성일 : 2008-07-06 08:19조회 : 2,163

(시위가 과격해 지면 아무래도 대중의 호응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개신교 목회자들이 시작한 종교인들의 시청광장 집회는 촛불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 금요일의 불교계 법회는 조계종 종단 자체가 참가했다는 점에서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인문학도님께서 이에 대해 게시판에 올려 주신 글을 보다 많은 분들이 접할 수 있도록 여기에 옮겼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상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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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가 되고 싶었던 대통령, '왕따'의 기로에 놓이다.

인문학도 2008-07-05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 이후 촛불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단 모든 이들이 우려했던 '폭력의 에스컬레이션'은 바로 멈춰섰고, 경찰과 시위대 양측의 기류는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게 되었다. 시국미사 둘째날 경찰은 시청광장 주변에 전경 버스들을 아예 배치하지 않는 여유까지 보였고, 사제단은 거기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시민들을 이끌고 평화적인 침묵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고시 강행과 일방적인 관보 게재 이후 청와대행을 고집했던 시위대가 완전히 경로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시국미사 첫날, 시민들은 불타버린 숭례문을 어루만지러 갔다가 오후 10시에 일찍 해산했다. 미사 둘째날, 시민들은 구호조차 외치지 않은 채 사제단을 따라 시내 한바퀴를 돌고 역시 일찍 해산했다. 경찰들이 설치한 차벽을 넘으려는 시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청와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시민들은 남쪽을 향해서 묵묵히 시내를 돌았고 경찰은 이들의 행진에 관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면서 대통령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더 이상 시위대가 청와대로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행스럽게 여겼을까. 아니, 어쩌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시위대가 청와대를 향해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편이 상대하기는 더 쉽다. 차벽 세워놓고 물대포 쏘면서 적당히 미끼 한두 개 던져서 폭도들로 몰아버리면 다음날 보수 언론들이 알아서 지원사격을 해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여론으로부터 고립되고, 시위 참가자들은 서서히 줄어들면서 말라죽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대통령이 기뻐했든 아쉬워했든 그는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실책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 정치가이다.

6월 30일 이전의 시위대는 어찌보면 지극히 순수한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별다른 목적의식도 없이 그저 청와대로 가고자 했다. 청와대를 가서 뭘 할 건지, 무슨 주장을 할 건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으니까 가고자 했고, 경찰들은 시민들이 청와대로 가려 했기 때문에 막았다.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의 공방에 대한 진실은 단지 그것 뿐이다. 가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고, 막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 둘은 서로 물러설 수 없었다. 유치원생들 싸움과 같이, 물러서는 쪽이 지는 거라는 유치하고도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혹자는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그 밤중에 청와대로 가고자 하는 시민들이 폭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군사독재시절을 살아낸 '기성세대'들의 발상이다. 군사독재라는 걸 직접 체험해보지도 못했고,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러본 기억도 없는 지금의 10대~20대들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질질 끌어내릴 것'이라 생각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각하'보다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들은 아마도 대통령 '할아버지'가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청와대 앞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면 대통령 할아버지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아이고 그래 내가 니들 고통을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말해줄 거라 믿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로 그렇게 믿었던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물대포를 맞아가면서 "온수! 온수!"라고 외칠 수 있는 해학과 여유가 나오겠는가.

하지만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하긴, 기존 보수 세력들이 다들 '폭도' 내지는 '친북좌파세력'으로 몰아세우길 마다하지 않았으니, 대통령 역시 이들을 너그럽게 청와대 앞으로 초청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을 거다. 대통령 할아버지보다는 각하라고 불리우고 싶은 게 이명박 씨의 솔직한 욕심 아니던가. 그래서 명박산성을 쌓았고, 물대포를 쏘았고, 전의경들을 동원해서 방패와 곤봉으로 시민들을 후려갈긴 것일 게다. 그래야만 '각하'가 될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 하고 달려드는 철없는 것들을 멀찌감치 내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자 보다 못한 '다른 어른'들이 나섰다. 맨 처음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섰고, 그 뒤를 이어서 개신교의 일부 목사들이 나섰고, 마지막에는 스님들이 나섰다. 사제단의 신부님들은 먼저 이 '순진한' 시민들을 감싸안고 위로했다. 목사님들은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스님들은 포기하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그리고 이 세 '어른'들이 한결같이 한 이야기가 있었다.

"청와대에 가지 마라."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했던 시민들은 비로소 이명박 씨가 '할아버지'보다는 '각하'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자기들이 아무리 평화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청와대로 가려고 해도 우리의 '각하'께서는 경찰들을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만 할 뿐, 결코 청와대 앞뜰로 자신들을 초청해주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시민들은 청와대를 '포기'했다. 아니, 청와대의 존재 자체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청와대 '왕따'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이명박 씨는 '각하'의 위엄을 보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시민들의 반응이다. 이명박 씨가 스스로를 각하라고 부르든 지도자 동무라고 부르든, 더 이상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자체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혼자서 청와대에 앉아서 각하 놀음이나 해라, 우리는 당신을 각하라고 부르지 않을 저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러 갈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남침(?)을 택한 촛불시위대의 솔직한 생각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아니 어쩌면 대의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도입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기한 풍경이 2008년 7월의 서울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뽑은 지도자와 '대화'하는 것도, '대립'하는 것도 아닌 지도자 자체를 '백안시'해버리는 시위대, 대신 다른 시민들마저 모조리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대통령 각하를 '왕따'시켜버리겠다는 시위대가 지금 촛불의 현주소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여당이나 기존 보수 지지층의 그 어느 누구도 이 사태가 가지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하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토론과 설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대화'다. 어떤 정책이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를 통한 정치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의 시위대는 이 '대화' 자체를 사실상 포기해버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대상, 기본적인 신뢰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 그것이 시국미사 이후 시위대 속에 새롭게 자리잡은 대통령에 대한 '관념'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아니, 벌거벗은 대통령이 탄생한 셈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권위는 자기가 스스로 주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권력도, 어떠한 권위도 다수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존립할 수 없다. 하물며 반대도 아닌 '외면'을 당하는 권위의 말로란 어떠한 것일까. 자신을 뽑아준 국민이 자신에게 돌맹이조차 던지지 않고 '왕따'를 시켜버리고 있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이명박 씨는 어떠한 행로를 택할 것인가. 각하이기를 고집하면 더욱 심한 왕따의 수렁에 빠질 것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할아버지로 전환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린 대통령의 정체성은 과연 어느 자리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시민들에게 "청와대로 가지 마라"고 어루만지면서 그들을 비폭력과 축제의 장으로 돌려보낸 종교인들은 마지막까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이 무기한 단식에 돌입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대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순진한 시민들이 무작정 청와대로 가려다가 곤봉에 얻어맞아 으깨지는 아수라장이 벌어지도록 방관하는 대신,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대화'를 이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번 주말만 넘기면 촛불은 사그라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현 정부에게서 과연 불통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솔직히, 부정적이다. 예전에 지율스님은 100일 동안 단식을 했다지만, 그래도 그 때에는 기본적인 대화의 창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수백 명의 신부님과 수백 명의 스님이 모여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대화의 창은 여전히 굳건하게 닫혀 있지 않은가.

촛불시위대는 지금 '수행'을 떠났다. 아마도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과 훨씬 강해진 의지로 시청 광장을 밟을 것이다. 그들은 돌아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떠나보낸 사제들이 무기한 단식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순간까지도 이명박 씨가 계속 각하이기를 고집하면서 대화를 거부한다면, 더욱 강해진 힘으로 돌아온 촛불시위대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들불로 번져가는 불꽃을 사그라들어가는 촛불로밖에 볼 줄 모르는 청와대의 얕은 식견에 나는 그저 한탄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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