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운의 월튼 워커 장군

작성일 : 2008-09-28 11:24조회 : 3,849

비운(悲運)의 월튼 워커 장군 (1899-1950)

이상돈 (2008년 9월 28일)

워커 힐 호텔로 우리에게 이름을 남긴 월튼 워커 장군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맹한 군인이다. 그는 2차 대전에선 조지 패튼 장군의 3군 휘하의 기갑사단장으로 발지 전투에 참가했다. 워커는 자신의 지휘관인 패튼 장군을 존경했다. 패튼 또한 워커를 좋아했다. 패튼은 휘하 지휘관 중 가장 용맹하고 자기의 명령을 가장 잘 이행하는 워커를 좋아했다. 군 사령관과 사단장 사이의 그러한 신뢰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맥아더와 워커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맥아더는 워커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사건건 워커를 견제했다. 워커 또한 맥아더를 존경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을 갖은 워커였지만 일본에서 신(神)처럼 추앙되는 맥아더에게 대항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이 같은 불편한 관계가 한국전쟁에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맥아더는 그가 총애하던 네드 알먼드 소장을 통해 워커를 견제했다.

대전에서 패퇴하고 대구로 사령부를 옮긴 워커는 본국으로부터의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본국에서 급히 파견한 해병 여단은 부산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에 빠진 워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맥아더는 해병 여단의 주력인 5연대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기로 했다. 워커는 “해병 5연대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워커는 낙동강 전선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휘하 지휘관에게 더 이상 증원군도 없고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없다면서 비장한 각오로 전투를 격려했다. 해병 여단은 해병 1사단으로 편성되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드디어 워커가 지휘하는 8군은 낙동강을 건너서 반격을 할 수 있었다. 38선을 돌파하면서 워커가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해병 1사단과 육군의 몇 개 연대로 이루어진 10군단을 8군과 분리해서 원산에 상륙시켜 별도로 북진시킨다는 소식이었다. 워커의 8군은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북진했으나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미 육군 2사단은 거의 궤멸되었고, 워커는 또 다시 후퇴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만 했다. 10군단은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미 육군과 한국군은 전멸했고, 미 해병 1사단만 영웅적 전투를 펼친 끝에 함흥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는 서울의 사령부에서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의정부로 전용 지프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워커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한 한국정부의 부대표창을 미 24사단과 영국 27연대에 수여할 예정이었다. 워커는 그가 존경했던 패튼과 마찬가지로 지프 앞쪽에 사이렌과 붉은 플래시 라이트를 장착하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전장(戰場)을 누볐다.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매우 복잡했다. 그런 와중에 한국군 무기 수송 차량이 워커 장군의 지프의 왼쪽 후미를 받아서 지프는 얼음길에서 전복하고 말았다. 패튼과 패튼의 지프를 2차대전 때부터 운전해 온 조지 벨튼 상사는 즉사했다.

워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맥아더는 워커가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고, 자신이 워커를 4성 장군을 승진하도록 최근에 상신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빈말이었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사고를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사고를 낸 운전자를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미군 지휘관들이 사고를 낸 운전자를 어떻게 총살하느냐고 항의했고, 미군의 항의 덕분에 사고 운전자는 징역 3년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워커의 후임으론 육군참모차장이던 매튜 리지웨이가 임명됐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은 워커에 무슨 일이 생기면 후임으로 리지웨이를 임명하기로 1950년 8월경에 이미 작정해 놓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맥아더에게도 전달이 되어 있었다. 합참은 워커의 지휘 통솔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8군이 또다시 패퇴하자 워커를 교체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교통사고로 워커가 사망한 것이다. 워싱턴은 맥아더는 쉽게 해임할 수 없으니까 대신에 워커를 교체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육군 2사단이 중공군 포위공격으로 전멸하다시피 한 사건은 미군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치욕(恥辱)이었다.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8군은 당신 것이요. 당신 마음대로 운용하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맥아더의 속마음은 불편했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는 어차피 자기가 지휘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당시 일기장에다 “리지웨이를 8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국방부와 국무부가 맥아더의 전쟁수행을 억제하기 위함”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가 중공과 전면전을 벌여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를 갖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패튼을 존경하고 좋아했던 워커는 죽음마저 패튼을 빼어 닮았다. (패튼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5년 12월 독일에서 미군 트럭과 충돌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나 워커는 미군이 후퇴 중에 사망했다는 점에서 더욱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워커 장군의 유해는 당시 한국전쟁에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 중이던 아들 샘 워커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나중에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아들 샘 워커는 4성 장군이 되어 은퇴했다.

워커가 사망하고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한국전쟁은 ‘맥아더의 전쟁’에서 ‘트루만의 전쟁’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그럼에도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충복인 네드 알먼드 장군을 해임하지 않았다. 맥아더의 심기를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먼드가 저지른 또 다른 오만은 원주 전투였다. 데이비드 할버스탐은 알먼드의 무모한 작전명령 때문에 한국군 1개 사단이 원주 전투에서 중공군에 의해 궤멸 당했다고 지적한다.

워커 장군의 지프를 들이받아 그를 죽게 한 한국군 운전자를 총살하도록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오히려 미군 지휘관들이 운전자의 구명운동을 벌였다고 하니, 당시 미군들이 한국 정부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강 인도교 폭파 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총살한 조치와도 비슷한 맥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리 전황(戰況)이 급박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항명 등의 이유를 들어 장병을 즉결 처형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는 ‘우울한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지도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은 어차피 모순덩어리”라는 말로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해야 할 것인가 ?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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