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검은 고양이인가 흰고양이인가 ? (2008-07-12 게시판으로부터)

작성일 : 2008-07-12 13:41조회 : 2,070

( *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발언과 금강산 여행객 총격사망 사건에 대해 인문학도 님께서 게시판에 올려 주신 글을 많은 분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앞으로 옮겼습니다. 이상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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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猫(흑묘)인가 白猫(백묘)인가

인문학도 (2008-07-12)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납북기본합의서와 6.15 공동선언, 10.4합의를 존중하고 실천의 시대를 열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그러나 기존 합의에 대한 존중은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남북관계 회복을 위한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북측과 일정한 신뢰를 형성하고 있는 전문가와 민간 평화운동가 등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측과의 신뢰관계를 지렛대 삼아 동북아 정세의 주동적 행위자로 나서는 적극적인 행보를 기대한다."

오늘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대해 진보신당이 낸 논평의 일부이다. 그의 연설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는 있지만, 어쨌든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를 존중하겠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때늦은 후회이기는 하나 어쨌든 옳은 결정'이라며 인색한 칭찬을 하고 있다. 인색하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다. 살다보니 이명박 씨가 진보신당의 칭찬을 들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지만 일이 고약하게 꼬여버렸다. 하필이면 국회 연설이 있는 날 새벽에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피살당하는 사고가 터진 것이다. 새벽 5시 경에 일어난 일을 오후 1시 반이 되어서야 대통령 귀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현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도 상식 밖이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명박 씨의 태도다. 비록 국회 연설을 위해 출발하기 직전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소식을 들었다면 연설 일정을 취소하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연설문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어야 가당할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국회의원들에게 사건에 대한 간략한 경위를 알리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대통령이 한 것이라고는 지난밤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었더니 목이 쉬었더라는 실없는 농담을 내뱉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는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정해진 대본을 읽어내려가는, 어쩐지 그답지 않은 연설을 했다.

이는 그간 이명박 씨가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대북강경책'이 얼마나 허울좋은 개살구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인 셈이다. 정권 초창기에 대통령은 자신의 입으로 여러차례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 그러한 기세 자체는 좋다. 그 기세에 박수를 보낸 우파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세'가 남긴 결과는 무엇이었나? 그간 핵 카드를 가지고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무수히 얻어낸 북한의 노련한 외교술에 휘말려서 '통미봉남'이라는 카드 앞에 바보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정부의 초라한 자화상이었다. 그 덕분에 냉각로가 폭파되는 순간에도 가만히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했으며, 심지어는 아무 댓가 없이 옥수수 5만톤 지원을 제안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해버리는 외교적 치욕까지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은 '6.15선언 존중'이라는 친화적 카드를 내걸었다. 그것도 자국민이 북한 땅에서 군인의 총에 맞아서 사망한 그 날에 말이다. 이 정도면 원칙이 없어도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무게중심 없는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언제는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겠다더니,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서 뒤늦은 햇볕을 내려쬐이겠다는 이유는 뭔가? 햇볕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제와서 그렇게 햇볕 쬐일 거면 그 동안 무엇하러 열심히 비를 뿌려댔느냔 말이다. 결국 얻은 것도 없이 그 동안 뿌린 비를 말리기 위해 더 많은 햇볕을 '낭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니 참 우습다.

애초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북강경책을 입으로만 외쳐댄 것이 결정적인 실수다. 레임덕에 몰린 부시 정권이 대북 유화책을 쓰면서 임기 내에 외교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들 것이라는 흐름조차 읽지 못했다. 애초부터 남한보다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원했던 북한이 얼씨구나 하고 통미봉남책을 택하리라는 것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앞으로 다가올 6자 회담에서 아무런 주도적인 역할도 하지 못한 채, 결정은 남의 손에 맡기고 비용만 부담해야 하는 머슴 신세가 될 거라는 역학구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지지계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립 서비스'로서의 강경대응만 외우다가 비 맞은 중 꼴이 된 셈이다.

이제와서 이 정권이 대북 강경기조로 돌아서기를 기대하기란 참 어려워보인다. 일단은 부시가 지원사격을 안해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마 G8 정상회담 자리에 가서 이명박 씨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했을 것이다. 부시는 자기 임기내에 한미FTA나 대북관계 정상화 등의 현안들을 빨리 해치우려는 데에만 급급해 있을 뿐, 대한민국 정부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강경책 운운해봐야 결국 북한은 통미봉남 기조만 강화할 게 뻔하다. 실익은 북한과 미국이 챙기고, 대한민국은 뒷짐 지고 소리만 떵떵 치다가 실익은 커녕 대의명분마저 잃기에 딱 좋다.

이명박 식 실용주의란 결국 원칙없는 트리비얼리즘에 불과하다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이제는 그간 지지를 아끼지 않던 보수우파마저 등을 돌리게 생겼다. 벌써 조갑제 씨는 자신의 칼럼에서 분기를 차마 억누르지 못하는 듯 보이니 말이다. 등소평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다지만, 여기에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등소평 자신의 고민과 철학이 바탕에 깔려있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은 흰 고양이도, 검은 고양이도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주위의 요구에 따라서 색깔만 열심히 바꾸는 카멜레온에 불과하다. 그나마 카멜레온 고양이기라도 하면 특이하다고 하면서 봐주기라도 할텐데, 쥐조차도 제대로 잡질 못하니 고양이도 아닌 그저 카멜레온이다. 날아다니는 파리라도 제대로 잡아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마 그조차도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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