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키신저 : 칠레와 이집트

작성일 : 2023-06-10 11:03조회 : 1,150

키신저 : 칠레와 이집트

1972년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1972년 한 해 동안 있었던 베이징 방문과 모스코바 방문은 닉슨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대선을 며칠 앞두고 키신저가 “평화가 손에 잡혀 있다:(”Peace in at hands.")라고 기자회견을 해서 베트남 평화회담 타결이 임박했음을 알렸을 때 선거판은 이미 끝난 것이다. 닉슨은 자신의 재선을 의식해서 대외정책을 추진했고 키신저는 그 역할을 충실히 했다. 대선이 끝난 후 북베트남이 평화협정 조인을 거부하자 닉슨은 다시 대규모 폭격작전을 명령하며, 결국 파리 협정이 체결되고 대부분이 조종사인 미군 포로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73년 봄부터 의회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는 청문회를 열고 언론이 본격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함에 따라 닉슨은 비서실장 등 참모들을 퇴진시켜야 했다. 워터게이트 파문은 갈수록 커져서 1973년 여름부터 닉슨은 정상적인 집무가 어려워 졌다. 그 즈음 키신저에 가려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이 사임을 밝힘에 따라 닉슨은 키신저를 국무장관을 겸직하도록 했다.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리더십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키신저는 사실상 ‘외교 대통령’이 된 모습이었다. 야당인 민주당도 대외정책은 키신저가 이끌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가을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9월 11일에 발생한 칠레 군부 쿠데타이고 또 하나는 10월 6일에 발발한 4차 중동전쟁이다.

CIA를 싫어한 닉슨은 CIA 국장은 안보보좌관을 통해서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당시 CIA 국장은 리차드 헬름스였다. 그는 2차 대전 중 OSS 요원으로 활약한 CIA 창업 멤버였다. CIA는 칠레의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미국이 지지하는 기민당이 지지를 잃어가고 좌파 정치세력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키신저는 자기는 '남쪽 나라'(The South : 중남미와 아프리카)에는 관심이 없다고 종종 이야기했다. 1970년 들어 닉슨은 키신저에게 칠레 상황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CIA는 우익 정당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칠레에 친미 정권을 세울 수 없음을 알았다.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엔데가 일반투표에서 1위를 하자 군부 내 우익세력은 아엔데의 당선을 막기 위해 르네 슈나이더 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슈나이더가 저항하자 총을 쏴서 그가 죽는 일이 발생해서 쿠데타는 실패했다. CIA는 이런 군부의 움직임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는 보고를 받고 승인했음이 나중에 확인됐다. 쿠데타에 저항한 슈나이더 장군에 대한 추모에 힘입어 아엔데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엔데는 미국계 기업과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고 쿠바와 외교관계를 돈독히 했다. 1973년 9월 11일, 아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 군이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을 포위 공격했고 아엔데는 저항하던 중 사망했다. 당시는 CIA 국장 교체기였고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키신저는 이 사안을 보고 받고 또 승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키신저를 인권을 유린한 전범으로 지목해서 오늘날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문제로 온 미국이 시끄럽던 그해 10월 6일, 이집트 군과 시리아 군이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공격했다. 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 정보국은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다. CIA도 전쟁의 조짐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이집트의 기만 전술이 성공한 것이다. 키신저는 중동에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에 대해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경고해 왔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아랍 군대를 파괴할 수 있다면서 자만(自慢)에 빠져 있었다. 정작 포성이 울리자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고전(苦戰)했다. 과거와 달리 이집트 군의 전략과 전술은 치밀했으며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이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에 나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 총리를 지내게 되는 아리엘 샤론 장군이 이끄는 예비군 기갑사단이 수에즈 운하를 돌파해서 시나이 반도 남쪽에 진입한 이집트 3군을 완전히 포위하자 전황(戰況)은 반전(反轉)됐다. 닉슨 대통령이 팬텀기와 신형 탱크 등 군수물자를 긴급하게 공수해서 이스라엘 군은 힘을 얻었다. 이스라엘 군은 사막에 갇혀서 먹을 물도 부족한 이집트 3군(2개 사단과 지원부대로 구성)을 2-3일내에 초토화시킬 예정이었다.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경악했고,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도 그 결과가 두려워서 공격명령을 보류했다. 백악관에는 모스코바로부터 이집트 3군을 공격하지 말도록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으라는 경고가 날라 들어왔다. 이스라엘이 공격을 개시하고 소련이 공수부대를 보내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키신저는 이런 위기를 기회로 파악했다. 그는 카이로, 텔아비브, 다마스쿠스, 암만을 드나들면서 새로운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한 외교를 펼쳤다. 빈곤층 출신인 사다트 대통령은 범(汎)아랍주의 같은 이념 보다는 민생을 중시하는 지도자였다. 수에즈 운하를 건너 진격해서 1967년 6일 전쟁 때 훼손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한 그는 평화를 원했다. 무엇보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군에 포위된 이집트 3군을 살려야만 했다.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설득해서 휴전을 이루고 평화협정을 위한 셔틀 외교를 시작했다.

1974년 8월, 닉슨은 사임하고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외교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포드는 대외정책을 전적으로 키신저에 의존해야만 했다.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이 시작한 소련과의 핵무기 군축 협상을 지속했다. 그 시기에 키신저에 대한 비판이 공화당 내부에서 일었다. 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출마한 로널드 레이건은 키신저가 해빙(데땅트)라는 이름으로 미국 국익을 훼손하고 오랜 우방인 대만을 배신했다면서 그를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내 우파는 키신저를 ‘반역자’라고 불렀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포드가 승리했으나 1976년 11월 대선에서 포드는 카터에게 패배했다. 키신저는 8년간의 화려한 공직생활을 마치고 야인이 됐다.

키신저가 포드 대통령 임기 중 끝내지 못한 중동 평화협상은 1978년 9월 17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이듬해 비엔나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서명함으로써 키신저가 추구해온 군축(軍縮)도 결실을 맺었다. 카터가 자신의 업적으로 내 세우는 이 두 협정은 사실은 키신저가 이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키신저는 파리 협정이 아니라 중동 평화협상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터는 경제 실패와 이란 및 아프간 사태로 몰락하고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됐다. 레이건은 SALT II를 없던 것으로 하고 대대적인 군비 확장을 시작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물론이고 조지 H. W. 부시 부통령도 키신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키신저는 대통령과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홍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키신저가 타임지 표지에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레이건의 안보보좌관 리차드 앨런은 닉슨 백악관에서 안보부보좌관으로 있다가 키신저에 의해 쫓겨난 악연이 있었다. 부시는 자기가 유엔 주재 대사, 중국 주재 대표부 대사, 그리고 중앙정보국장을 지낼 때 키신저가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건-부시 12년 동안은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경제파탄에 봉착한 소련을 굴복시켜서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리고,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금기였지만 키신저는 단지 국외자였다.

키신저가 남긴 유산인 칠레의 군사정권에 대해선 복잡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피노체트 정권 하의 칠레에선 인권침해가 심각했으나 그런 문제는 안데스 산맥 넘어 있는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칠레의 군사정부는 세계은행이 지시하는 대로 시장경제로 전환해서 경제를 부활시켰다. 반면에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영국과 전쟁을 해서 나라를 파탄으로 내몰았다. 아엔데처럼 사회주의와 반미(反美)의 길을 간 베네주엘라는 아예 거덜이 나버렸다.

사진 (1) : 키신저와 아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대통령. 1976년.
사진 (2) : 키신저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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