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재희 그리고 1970년대 기억

작성일 : 2023-02-19 11:25조회 : 1,301

남재희 그리고 1970년대 기억

2013년 초 Jtbc가 두 사람이 만나서 대담을 하는 ‘동행(同行)’이란 기획 프로를 한다면서 연락이 왔다. 그러라고 했더니, 누구와 같이 대담을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고, 또 반드시 누구와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후에 남재희 전 장관과 같이 하면 좋겠다고 하면서 장관님도 좋아하신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하루 날을 잡아서 동숭동 과거 서울대 본부 건물 앞에서 만나는 장면을 시작으로 녹화를 했다.

이런저런 덕담과 2012년 대선 이야기를 나눈 후 내가 남 장관님에 대해 가장 궁금했던 바를 여쭈어 보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하시다가 어떻게 해서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가셨냐 ?”고 말이다. 남 장관님은 나의 돌직구 질문에 약간 당황하신 표정을 지으신 후 당시 공보부장관이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한테 남재희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시킬 테니까 내 놓으라고 하자 방 회장이 그리고 가라고 지시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후배 기자들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주변에서도 말리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에 나온 책 <시대의 조정자>에도 이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아마도 그런 질문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 장관께 하기는 내가 처음이지 않았나 한다.

남 장관님의 이력을 보면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계기로 구 여권(공화당-민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게 된다. 내가 대학 2~3학년이던 1971~72년 기간은 71년 봄 대선과 총선에서 야당이 돌풍을 일으킨 ‘서울의 봄’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결국 72년 10월 유신으로 향하는 격동기였다. 당시 우리(서울법대생)는 대학 선배인 동아의 송건호와 조선의 남재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71년 봄, 서울대 총장을 지낸 형법학자 유기천 교수님이 “총통제 개헌 음모가 있다”고 일갈(一喝)하고 미국으로 출국해서 파문이 일었는데, 실제로 우리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런 시점에 남재희 선배가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의 편집국장으로 간다고 하니 허탈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요즘 세대는 조선일보나 서울신문이나 그게 그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4.19가 있던 1960년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도 도렴동이라서 집에서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한 후 안정이 되어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불타버린 서울신문 건물을 본 적이 있다. 학생 시위대가 정부나 대변하는 서울신문을 얼마나 미워했기에 건물에 불을 질렀는지 지금 생각해도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도 서울신문은 그대로 정부 기관지였고, 우리들(서울법대생)은 정부 기관지는 공산국가에나 있는 것이라고 백안시했다.

1972년 유신 후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탄압은 더욱 강해졌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결국 1973년 말 광고가 끊기는 사태를 맞게 된다. 견디다 못한 동아일보는 주필을 지낸 천관우(1925~1991) 이사와 송건호(1927~2001) 편집국장을 퇴사시키고 만다. 동아를 상징하는 두 인물이 동아를 떠난 것이다. 그 후 송건호 선생은 민주언론운동에 나서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가담하게 됨은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천직이었던 언론을 떠난 천관우 선생은 재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러다가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부 외곽단체와 통일원 고문 등을 지내다가 1991년 세상을 떴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 온 나는 천관우 선생이 5공 정권 외곽에 참여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남재희 장관의 책에는 천관우와 송건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45세 나이에 직장을 잃어버린 송건호 선생은 닥치는 대로 원고를 써서 어렵게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주필과 이사라는 대단한 직위를 별안간 잃어버린 천관우 선생은 원고료 수입도 없어서 생활이 정말 어려웠다고 한다.

천관우 선생이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게 된 데 대해 남 장관님은 오랫동안 생활고도 심했을 뿐더러 “치열하게 대항하던 상대가 사라지자 긴장이 확 풀리는 일종의 역학적 현상 같기도 하다”고 평했다.(책 322쪽) 박정희와 치열하게 대립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평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는 해석이다. 여하튼, 10월 유신은 동아일보의 두 거목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두 사람마저 종국에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말았으니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천관우(千寬宇 1925~1991)는 서울대 사학과를 나온 국사학자이며 장안(長安)의 지가(紙價)를 올린 동아일보의 대(大)논객이고 문장가였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후 <신동아>를 쭉 구독했는데, 월간 교양잡지인 <신동아>는 그 시대 최고 필진의 품격있는 평론을 많이 실었다. 천관우 선생은 <신동아>의 주간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그 시절 동아의 주필 천관우는 학술논문을 남긴 국사학자이기도 했고, 조선의 주필 선우휘(鮮于煇 1922~1986)는 불후의 소설을 남긴 문학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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