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닉슨의 유산

작성일 : 2022-06-08 08:24조회 : 1,892

닉슨의 유산

금년 6월로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한지 50년이 된다. 1972년 6월 17~18일 밤에 양복 차림의 다섯 명이 포토맥 강가에 자리 잡은 워터게이트 콤플렉스의 사무동에 있는 민주당 대통령 선거 본부에 도청장치를 들고 침입해서 작업을 하던 중 부근을 지나던 사복 경찰관 3명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서 이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2년 2개월이 지난 1974년 8월 8일 닉슨은 사임을 발표하고 그 다음날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 2년은 미국에게 큰 악몽이었지만 동시에 미국 정치의 패턴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대통령을 물러난 닉슨은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말년의 닉슨은 자기가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뚱과 악수하고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대통령으로만 기억되고 있다면서 씁쓸하게 말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도 닉슨은 그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닉슨의 시대와 닉슨이란 사람을 돌이켜보면 그가 두 가지 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8년 동안 야인 생활을 한 닉슨은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외교는 물론이고 내정에 대해서 자기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닉슨은 정치를 상대방을 죽여야 자기가 산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닉슨이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오지 못해 젊었을 시절에 당한 수모는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매카시즘이 팽배했던 시절에 닉슨은 하원 비미(非美)활동위원회 위원으로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앨저 히스를 청문회에 세우고 날카롭게 몰아 세웠다. 그 때 히스는 “당신은 듀크대학을 나오지 않았소 ? 나는 하버드를 나왔다”고 닉슨을 조롱했다. 닉슨은 그 때 당한 모욕을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히스는 위증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했으며, 동유럽 공산체제가 붕괴한 후 공개된 냉전 시절의 비밀문서는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국무차관보이던 히스는 유엔 헌장 기초와 얄타 협정 과정에 참여했다. 유엔 헌장과 한반도 분할이 소련에 유리하게 된 데는 히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닉슨은 자기를 싫어하는 적(敵)이 의회, 언론계, 학계 등에 널려 있다고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그 같은 피해망상(paranoid)이 닉슨을 망령처럼 지배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세상은 어찌됐던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한 영원한 낙천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닉슨이 임기 중 물러나야 했던 것은 이 같은 성격 차이가 빚어낸 측면도 있다.

닉슨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열고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켜서 우리에겐 주로 대외정책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닉슨처럼 미국의 국내 정책과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준 대통령도 드물다. 닉슨 행정부 초기에 발족시킨 백악관 관리예산실(OMB)과 각료급 부서인 환경보호처(EPA), 그리고 상무부 산하에 설치한 해양대기청(NOAA)과 노동부 산하에 설치한 산업안전청(OSHA)은 오늘날 가장 성공한 중요한 정부 부처로 평가되며, 우리나라의 행정조직 개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이루어진 복지 개혁(Clinton welfare reform)과 오바마 행정부에서 이루어진 건강보험 개혁(Obama care)도 그 뿌리는 닉슨 행정부에서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개혁안이었다.

닉슨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legacy)은 그가 키워낸 공화당 인물들이다. 닉슨이 노동장관과 재무장관으로 기용한 조지 슐츠는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1980년대 외교를 주도했고, 닉슨이 유엔 주재 대사로 기용한 조지 H. W. 부시는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국방장관을 두 번 지내면서 미국을 이라크 전쟁으로 몰고 간 도널드 럼스펠드도 닉슨이 발탁한 인물이었다. 1971년 8월, 닉슨은 캠프 데이비드로 경제 장관과 참모들을 불러 모아 사흘 동안 회의를 했고, 그 결과를 담아서 달러화의 금태환(金兌換)를 중지시켜서 금 본위 시대를 끝내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그 때 캠프 데이비드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이 그 후 오랫동안 미국 경제를 이끌어 갔음을 알게 된다. 뉴욕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 의회의 ‘살아있는 지성’ 패트릭 모이니핸도 닉슨이 발탁해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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